‘특검’ 역기능에 관심도 없는 야당, ‘법치’ 무너지면 야당도 없어
  • ▲ 12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친박게이트대책위-원내대표단 연석회의에서 전병헌 위원장(가운데)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 사진 연합뉴스
    ▲ 12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친박게이트대책위-원내대표단 연석회의에서 전병헌 위원장(가운데)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 사진 연합뉴스

    9일 자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여권의 유력정치인들에게 억대의 금품을 건넸다는 메모와 함께 메모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언론사 인터뷰를 남기면서, 정국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다.

    성 전 회장과 연루된 이들이 모두 여당 인사들이란 점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 ‘게이트’와 ‘특검’이란 낯익은 두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유력정치인이 연루된 대형 부패사건을 뜻하는 ‘게이트(Gate)는’, 1972년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Affair)에서 유래했다.

    이제는 낯익다 못해 식상한 이 단어가 우리 신문과 방송에 단골처럼 등장한 것은 2000년 이후다. 

    특히 2001년, ‘게이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지면과 방송 뉴스를 장식했다. ‘게이트 공화국’이란 신조어까지 생길만큼, 국민의정부 후반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과 가족들이 연루된 부패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국민의정부 말기, 봇물 터지듯 불거진 국내 게이트의 원조는 ‘정현준-진승현게이트’라 할 수 있다.

    정현준게이트는 2000년 10월 한국디지털라인(KDL) 사장 정현준씨와 동방금고 부회장 이경자씨 등이 수백억원대의 금고 자금을 횡령하면서, 당시 여당인 민주당 소속 정치인과 검찰, 금융감독원 등에 불법로비를 벌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핵심 연루자인 장모 전 금감원 국장이 자살하고, 핵심 관계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용두사미가 됐다.

  • ▲ 주가조작 등 혐의로 기소돼 제판을 받던 당시의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 ⓒ 출처 조선닷컴DB
    ▲ 주가조작 등 혐의로 기소돼 제판을 받던 당시의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 ⓒ 출처 조선닷컴DB

    정현준게이트와 거의 같은 시기 불거진 진승현게이트는, 그 실체가 검찰 수사를 통해 어느 정도 밝혀졌다는 점에서 미완의 수사로 끝난 정현준게이트와 차이가 있다.

    진승현게이트는 2000년 11월 MCI코리아 회장인 진승현씨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열린금고에서 3백억원이 넘는 불법대출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언론에 알려졌다.

    검찰은 진씨를 불법대출 및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으나, 수사과정에서 불거진 100억원대의 비자금 사용처와 행방, 갖가지 추측을 낳은 정관계 로비설에 대해선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권노갑 전 의원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이 이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의정부에 치명상을 안겼다.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의 측근과 가족들이 연루된 ‘이용호·최규선게이트’가 잇따라 터지면서 무너졌다.

  •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이용호 게이트로 재판을 받던 당시의 모습. ⓒ 출처 조선닷컴DB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이용호 게이트로 재판을 받던 당시의 모습. ⓒ 출처 조선닷컴DB

    이용호·최규선게이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씨와 삼남 김홍걸씨가 연루된 사건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는 이용호게이트, 삼남인 홍걸씨는 2002년 터진 최규선게이트에 각각 연루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철창신세를 졌다.

    참여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참여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박연차게이트’로 낙마하면서, 국민의정부와 같은 길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도 ‘봉하대군’이라 불리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몰락을 부추긴 ‘게이트’는,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졌다.

    이 기간에도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과 박영준 전 차관,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등이 구속의 사슬을 피하지 못하는 등, 대통령 측근과 가족을 둘러싼 잡음이 이어졌지만, 과거에 비해 그 정도가 덜했다.

  • ▲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 위해 만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출처 조선닷컴DB
    ▲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 위해 만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출처 조선닷컴DB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몰락을 지켜본,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집안단속에 각별한 신경을 썼고, 이런 학습효과가 측근들의 일탈을 제어하는데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있다.

    과거 정권의 ‘게이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대통령의 최측근 혹은 가족들이 연루됐다는 점, 게이트의 주범이 해당 정권과 함께 두각을 드러낸 기업인이란 점, 정권 후반기 사기 혹은 불법대출, 사업 인허가 등을 둘러싸고 불거진다는 점 등이 한국형 게이트의 특징이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정권 후반기 측근들의 빗나간 일탈을 유발해, 한국형 게이트가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대부분 대통령의 비선라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제도적 측면에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반면, 야당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왜곡 과장해, ‘게이트 정국’을 유발한다는 분석도 있다. 여권 유력정치인의 이름만 나오면 무조건 ‘게이트’를 붙여, 사건을 정권 차원의 대규모 부패스캔들로 키우려 한다는 지적이다.

    언론의 태도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언론의 지나친 특종경쟁이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미확인 보도와 ‘소설’ 수준의 ‘카더라 보도’를 양산하면서, 실체적 진실규명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

    야당이 ‘게이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 과거 ‘게이트’의 수사결과는 대부분 초라하다. 소문만 무성할 뿐, 법원의 판결은 주모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집행유예에 그친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핵심 피고인이 무죄 선고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사실은 검찰의 게이트 수사가 무리하게 이뤄졌음을 반증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성 전 회장 자살 뒤 야당이 보이는 행태는 유감스럽다.

    당장 야당은 이번 사건을 ‘친박 게이트’라 규정하고, 대통령 선거자금 전반을 수사해야 한다면서 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검찰이 성 전 회장이 남긴 메모와 관련, 별도 수사팀을 구성키로 결정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야당의 모습은 쌀도 씻기 전에 밥부터 내놓으라고 소리를 치는 것과 같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더라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특별검사제를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하는 정치권의 태도 역시 대단히 우려스럽다.

    특별검사제는 한 나라 수사사법체제에 대한 불신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나와서도 안 되는 기형적 제도다. 수사사법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특별검사제를 도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특검이란 당시 정권의 수사사법체계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논의할 수 있는 매우 예외적인 제도다.

    따라서 특검을 말할 때는 여야를 넘어 ‘불가피성’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현행 수사사법체계가 그만큼 불안한 상황인지, 현재의 수사사법체계를 부정할 만큼 사안이 중대한지, 그리고 특검 논의가 국가의 대외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생각한 뒤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야당은,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특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야당의 이런 행태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법치를 무시해도 좋다는 위험천만한 인식이 그 구성원들 내면에 자리 잡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

    야당의 특검제 주장에,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아가 특검제 도입 주장이, 검찰 구성원들의 사기저하에 직적접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책임은 검찰이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다. 검찰총장이 직접 나서 수사팀 구성을 논의했다. 그렇다면 정치권이 할 일은, 수사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특검을 말하는 것은 상식 밖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정당의 대표와 주요당직자들은, 사안이 중대한 만큼 처신을 무겁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란 점을 정치권도 언론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