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 직후 구금 사태 외교 변수로대미 투자 합의문 불발에 美 강압 가능성 제기"정책적 보복 단정은 어려워 … 레버리지 활용""행정집행 넘은 정치적 메시지 가능성 배제 못해"美, 호주·싱가포르에 쿼터 제공 … 韓만 비자 공백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간)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 도착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뉴시스

    미국 조지아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한국인 근로자 약 300명이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대거 구금된 사건이 단순한 불법체류 단속을 넘어 한미 통상·외교 현안으로 비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음에도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문 도출이 무산된 데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복성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재로서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면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레버리지 전략이라는 분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뉴시스

    ◆"투자 합의문 불발 보복 단정은 무리 … 레버리지 활용 가능성"

    한미 관계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뉴데일리에 "한미 정상회담에서 구체적 무역 협상이 잘 조율되지 않아 합의문이 나오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현대차 공장 단속으로 이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미국 의회 압박이 거셌고, 한국의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이 중국 기업에는 유리하고 미국 기업에는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됐다"며 "이런 맥락에서 확대 해석이 나오는 것으로 보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화가 나 단속을 지시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고 분석했다.

    이 전문가는 "순간적인 정치적 감각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 상황을 레버리지(협상 지렛대)로 삼았을 가능성은 있다"며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현금 지원 대신 대출·보증 방식을 내세운 점도 불만 요인으로 작용했다. 트럼프 머릿속에는 '한국에서 돈을 더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수모를 피하려면 투자 합의서를 빨리 도출하라는 압박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행정 집행 넘어 정치적 메시지 담겼다"

    박기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은 이번 사태를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전략 맥락 속에서 해석했다. 그는 "단속이 정상회담 직후 벌어진 것은 단순 행정 집행 이상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일 수 있다"며 "미국은 무역 분쟁, 비자 제한, 이민 단속 등 다양한 수단을 동맹국 압박에 활용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정부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점이 간접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불법 고용 단속을 통해 법치주의와 '미국 우선' 기조를 과시하는 동시에 동맹국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며 "이번 사건은 단순한 비자 위반이 아니라 한미 관계 내 긴장 요소와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재외국민 보호와 위기 대응 역량을 강화하고, 해외 파견 근로자 관리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또 비자 제도와 이민정책에 대한 한미 간 협의를 심화해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 이민당국이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에 위치한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공동으로 건설 중인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 소재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을 급습해 불법체류자 혐의가 있는 450여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출장간 한국인 30여명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수사에 참여한 주류·담배·총기·폭발물 단속국 애틀랜타 지부(ATF Atlanta)는 엑스(X, 옛 트위터)를 통해 이번 작전에는 “국토안보수사국(HSI)과 연방수사국(FBI), 마약단속국(DEA), 이민세관단속국(ICEO), 조지아주 순찰국 및 기타 기관이 참여했다”며 “지역 사회 안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사진=ATF 애틀랜타 X 계정 캡처

    ◆트럼프, '불법체류자'→'합법적 숙련인력'으로 입장 변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각) ICE와 국토안보수사국(HSI)의 HL-GA 합동 단속 결과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그들은 불법체류자(illegal aliens)였고, ICE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는 "우리는 한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면서 숙련 인력을 합법적으로 데려올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루스소셜에도 "우리는 당신들이 훌륭한 기술적 재능을 지닌 매우 똑똑한 인재를 합법적으로 데려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길 권장한다"면서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그것(인재 데려오는 일)을 신속하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 우리가 반대급부로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내부 고발發 해프닝 성격 … 압박용 단속은 아닐 것"

    반면 또 다른 외교안보 전문가는 "정책적으로 기획된 사건이라기보다는 내부 고발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인 한 정치인은 자신이 고발했다고 주장했고, 트럼프도 초반과 달리 지금은 발을 빼 수습하는 흐름"이라며 "협상 지렛대였다면 더 강하게 끌고 갔을 텐데 현재 미국이 수습에 나서는 기류를 보면 압박용이라기보다 우발적 성격이 크다"고 짚었다.

    ◆호주·싱가포르·칠레는 비자 쿼터 확보 … 韓만 뒤처져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비자 제도 개선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H-1B는 연간 8만5000명(일반 쿼터 6만5000개, 석사 이상 쿼터 2만 개) 한정 추첨제로 취득률이 약 10%에 불과하고, L-1·E-2 비자도 요건이 까다롭다.

    반면 호주(1만500명), 싱가포르(5400명), 칠레(1400명)는 미 FTA 협상 과정에서 전용 쿼터를 확보했다. 한국은 2012년부터 한국 동반자법(PWKA)을 통해 연 1만5000명 규모의 E-4 비자 신설을 추진했지만, 최근 10년간 로비 자금 550만 달러를 쓰고도 입법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 조현 외교부 장관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 "투자 부담 커 합의문 불발 … 비자 선결과제"

    이와 관련해 조현 외교부 장관은 전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문이 나오지 않은 배경과 관련해 "미국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투자 부문에 있어서 국민의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저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난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대규모 투자 요청이 있었고 또 우리도 화답했다"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비자 문제가 선결과제라는 것을 미 측에 강조하고 구체적인 협의 방안을 협의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 7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유사 사례 방지를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및 관련 기업과 공조하에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비자 체계 점검·개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