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유화책 정조준한 남북 대화 조건 제시헌법 개정·한미훈련·작계 5022 폐지 요구北, 한미 관계 흔들어 제재 해제 → 대규모 경협李 대통령 "동결·축소·비핵화로 대화 조성"
  • ▲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국가정보원 대북 방송 중단, 대북 확성기 철거, 대북 전단 살포 금지, 북한 개별 관광 검토 등 대북 유화책을 펼쳤지만, 북한은 이러한 유화 기조를 악용해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의 근간을 흔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21일 공개된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책적 방향은 한반도 비핵화"라며 "1단계는 핵·미사일 동결, 2단계는 축소, 3단계는 비핵화"라는 단계적 해법을 제시했다. 또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면서 적극적 남북 대화를 통해 핵 동결·축소·폐기까지 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 주목한다. 북한도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를 내세우며 주한미군의 전략자산 전개나 미국의 핵우산 제공 문제까지 협상 의제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번 발언이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유화적 접근인 동시에, 한미 공조 하에서 북한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포석으로도 해석된다고 지적한다.




    ◆北, 남북 대화 조건 제시 … 헌법 개정과 한미훈련·NCG·작계 5022 폐지

    이 대통령의 유화책과 달리 북한은 김정은의 동생인 김여정을 내세워 강경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김여정을 통해 남북 대화 재개 방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 출범 54일 만인 지난 7월 28일 '조한(남북)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를 내고 남북 관계 개선과 한미동맹 강화 기조가 양립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김여정은 "한미동맹에 대한 맹신과 우리와의 대결 기도는 이전 정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 폐지와 통일부 해체를 에둘러 요구했다. 

    김여정은 또 그다음 날인 29일 '조미 사이의 접촉은 미국의 희망일 뿐이다'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는 미국 백악관 당국자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비핵화 이외의 목적을 위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면서 2018년 싱가포르 회담이나 2019년 하노이 회담 당시와 달라진 북한의 지정학적 환경과 불가역적 핵 보유국 지위에 대한 인정을 대화의 전제로 제시했다.

    김여정은 지난 19일 외무성 주요 국장들과의 협의회에서 '리재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위인이 아니다'라고 이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남북 대화 재개 방법을 제시했다.

    특히 이번에는 대북 '주적'(主敵) 인식 철폐, 한미 연합훈련 폐지, 한미 핵협의그룹(NCG) 철폐, 한미 연합작전계획(작계·OPLAN) 5022 폐지 등 더욱 자세한 조건을 내밀었다.

    이와 관련해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리재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위인이 아니다'라는 평가의 의도와 관련해 "'아니다'라며 단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는 표현을 통해 역으로 남북 관계 단절 흐름을 바꿀 방법의 '힌트'를 암시했다"며 "일단 김여정 담화에서 나타난 일관된 주장은 '한국의 정권은 보수든 진보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인데, 전날 보도에서 그 핵심은 '흡수통일'과 '한미동맹'임을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즉, 김여정은 이 대통령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자신들의 '조건'은 헌법 제3조(영토)와 제4조(자유민주 기본질서 평화통일) 개정, 대북 주적 인식·한미연합훈련·NCG·작계 5022 폐지임을 환기했다는 것이다.
    ▲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 시간) 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의 앨먼도프-리처드슨 합동군사기지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AP/뉴시스

    ◆北 '제재 해제 전략' 추진 … 미북 수교로 대규모 경협 유치 노골화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중재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가능성이 높아지자, 군사 지원을 대가로 받아온 러시아의 경제 지원이 중단될 위기를 우려하고 있다. 이에 이재명 정부의 유화 기조와 트럼프 대통령 개인 성향을 악용해 유엔 제재와 한·미 독자 제재 해제를 얻어내면 부가적으로 남측으로부터 대규모 경제 지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3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이어 2024년 2월 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북남경제협력법'(2005년)과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2010년) 등 남북 경협 관련 법률과 110여 건의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폐지함으로써 남측과의 경제 교류 단절 의지를 제도적으로 확정한 바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북 전문가는 "김대중·노무현 시절의 남북 관계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에는 북핵 개발 초기라 쌀, 비료, 현금 지원이 의미가 컸다"며 "북한은 남북합의서에 '우리 민족끼리'를 금과옥조처럼 새겨 넣었고 그게 모든 남북 관계의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민족끼리'를 포기하면서 북한이 얻고자 하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어 "돈이나 식량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므로 북한이 굳이 한국을 압박할 필요가 없다. 남북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지원은 들어오기 마련"이라며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더 큰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직 안보 관료는 "정부가 북한에 돈이나 물자를 지원하려고 해도 대북 제재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북한은 미·북 관계 전체 판을 크게 흔들려고 한다"며 "과거에는 굶어 죽는 상황이 많았으니 쌀과 비료, 돈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러시아라는 '뒷배'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이 끊길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은 여전히 쌀과 비료, 돈을 얻고 싶어 하지만, 이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유엔 제재를 풀고 핵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며 "미북 관계 정상화가 되려면 제재 해제가 전제 조건인데 북한이 더 바라는 건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이화영 전 경기도평화부지사가 2024년 10월 2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남북·미북 관계 개선→대북 제재 해제→李 대통령 '사법리스크' 돌파

    정치권 일각에서는 남북 관계 개선과 미북 수교를 통해 대북 지원이 활성화할 경우 이 대통령이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으로 제기된 사법리스크를 돌파할 기회를 잡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미북 관계가 개선되면 제재가 해제돼 북한에 돈이나 물자를 지원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지정학적 분위기가 변했는데 왜 옛날 잣대로 문제 삼느냐'며 정치적 방어 논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은 김성태 당시 쌍방울 회장이 2019년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대통령의 방북 비용(300만 달러)과 스마트팜 대북 지원 사업비(500만 달러)로 총 800만 달러를 북한 측에 대납했다는 의혹이다. 쌍방울 임직원들은 자금 밀반출을 인정했고, 재판부는 김 전 회장이 총대납한 800만 달러 중 700만 달러는 북한 측으로부터 영수증을 받은 사실도 인정했다.

    이 사건을 비롯한 이 대통령의 형사 사건 재판 5건은 대통령 취임 이후 재판 일정이 연기되거나 조정됐다. 대북 송금 과정에 관여한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8개월이 확정됐다. 김 전 회장은 1심에서 외국환거래법 위반, 뇌물공여,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2심(항소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이 대통령의 개인 사건을 맡았던 변호인 12명이 대통령실·정부·국회 요직에 임명됐다. 우선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 '혜경궁 김 씨' 사건, 공직선거법 사건 등을 변호했던 이태형 변호사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쌍방울 사건을 맡았던 김희수 변호사와 이장형 변호사는 각각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과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에 기용됐다. 또 공직선거법 재판을 담당했던 이찬진·위대훈 변호사는 국정기획위원회로, 대장동 개발 의혹 및 위증교사 사건을 변호했던 조원철 변호사는 법제처장으로 발탁됐다. 이밖에 전치영 공직기강비서관, 조상호 행정관 등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요직에도 변호인 출신들이 중용됐다.

    이에 대해 야권은 대통령이 변호인 출신을 요직에 다수 기용한 것은 '사법 방탄' 성격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대통령실은 "법률 자문 경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며 능력과 자질을 우선해 인선이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