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한미연합훈련 폐지·주한미군 철수 요구'核보유국 인정' 조건부 미북 대화 가능성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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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김정은이 2022년 8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를 주재하며 코로나19 사태 종식을 선언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김정은의 친동생인 김여정은 토론자로 나서 공개 연설을 통해 남측에 의해 코로나19가 북에 유입됐다고 주장하며 강력한 보복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중앙TV 캡처/뉴시스
북한 김여정이 14일 "국경선에 배치한 확성기들을 철거한 적이 없으며 또한 철거할 의향도 없다"며 '북한이 한국의 대북 확성기 철거에 대남 확성기 일부 철거로 호응했다'는 우리 군과 정부의 발표를 정면 부인했다.
김여정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담화를 발표하고 이재명 대통령을 겨냥해 "한국 대통령은 자기들이 대북 확성기들을 먼저 철거하자 우리도 일부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불필요하고 비용 드는 확성기' 철거와 같은 상호 간 조치가 남북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발언했다"며 "사실부터 밝힌다면 무근거한 일방적 억측이고 여론조작 놀음"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국가정보원과 군의 심리전 수단이자 북한 주민들의 정보 창구였던 대북 방송을 북한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비방 방송'으로 규정하며 "6월에 비방 방송을 우리가 먼저 중단하니까 그쪽도 중단했다. 이렇게 상호 조치를 통해서 남북 간에 대화와 소통이 조금씩 열려가기를 바라고,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 되는 관계로 전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의 대북 확성기 철거와 대북 심리전 방송 중단, 한미연합훈련(UFS) 연기·축소 조치를 "허망한 개꿈"으로 규정하며 "우리의 국법에는 마땅히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적대적인 위협세력으로 표현되고 영구 고착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즉, '적대적 2국가론'의 헌법화를 예고한 것이다.
아울러 오는 15일 미·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미북 정상외교 재개 관측에 표면적으로는 "우리는 미국과 마주앉을 일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김여정은 "미국이 낡은 시대의 사고방식에만 집착한다면"이라고 조건부 여지를 남겼다. 이어 "한국은 자국 헌법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통일하려는 망상을 명문화 해놓고, 우리에 대한 핵 선제타격에 초점을 맞춘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조작해 정례적인 모의판을 벌이고 있다. 각종 침략적 성격의 전쟁연습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잠꼬대 같은 비핵화를 염불처럼 외우며 우리 헌법을 정면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한 발표를 '기만'으로 규정했다. 이성준 합참 공보실장은 14일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에 "군은 관측한 사실을 설명했고, 북한이 발표하는 의도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항상 사실이 아닌 내용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이 무엇을 발표했든지 의도가 있다. 거기에 쉽게 동화되거나 사실로 믿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은 적대국을 상대로 확성기를 철거할 이유가 없으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연합훈련 폐지를 전제로 대화하겠다고 명쾌한 메시지를 발신했지만, 정부는 희망적 사고에 빠져 이를 호응으로 오독하며 계속 오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전직 안보 관료는 "북한을 냉철한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전 세계적인 신냉전 구도 속에서 한반도에서만 화해·협력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라며 "과거 남북 관계 개선은 미중·미러가 화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가능했다. 지금 북한은 북중러 협력 속에 외부로부터 식량·의약품·현금을 조달하고, 제재도 무력화된 상태라 남측에 손을 내밀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김여정은 한미연합훈련 폐지, 주한미군 철수, 북한 비핵화 목표 폐기와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대화 재개의 조건을 에둘러 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번 담화는 한미 군사훈련 중단, 흡수통일론 배제, 선제타격론의 한미 핵협의그룹 해체 등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성격"이라며 "북한이 남측의 선제 조치를 폄하하면서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관심의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전직 안보 관료는 "북한이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국정원 폐지를 '3대 장애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폐지를 요구해 왔다"며 "국가보안법은 이미 무력화됐고, 국정원은 대공수사권 폐지와 심리전 중단으로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 북한의 남은 핵심 목표는 주한미군 철수"라고 분석했다. 이어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축소나 조정은 의미 없다며 '폐지'를 요구하고 있으니 주한미군 철수 약속이 있어야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분석은 김여정이 한국을 '가장 위협적인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헌법화까지 예고한 배경과도 맞물린다. 북한이 연례 한미연합훈련을 계속하는 한 한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하며, 이를 중단·폐지하지 않는 한 관계 개선은 없다는 입장을 굳혔기 때문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주한미군 철수를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북한의 입장에서는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진다.
한 대북 전문가는 "지금까지 북한은 이 요구를 경제적 지원 등을 받아내기 위한 단순 협상 카드로 썼지만, 이제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는 실제 달성이 가능하다고 보고 실현 의지를 담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은 이를 '흔들리는 이빨'로 보고 지금이라면 쉽게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반대로 요지부동이라고 판단되면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고 분석했다.
대북 전문가는 또 "대외적으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는 '핵보유국 인정'을 조건으로 회담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다"며 "북한 비핵화는 논외이며, 핵보유국 인정만이 미국의 핵압박을 막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북정책의 실효성을 위해서는 북한이 변화할 이유를 체감하게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직 안보 관료는 "과거 쌀·비료 부족, 전염병 창궐, 군수품 부족 등 위기 상황이 있을 때 남측과의 대화가 성사됐지만, 지금은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대북 제재를 대부분 우회하면서 그 필요성이 없다"며 "북한은 개방·외부문화 유입을 리스크로 보고 현 체제 수성을 택하고 있다. 바로 이럴 때 '내재적 접근법'을 활용해 북한의 대남 전략을 분석해야 하는데, 희망적 사고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