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된다고 팔았다면 SK하이닉스 영광 지금 없어기간산업에 들이대는 금융논리… 미래 경쟁력 앗아가여천NCC 살리기 나선 한화그룹… 산업논리 지켜내야
  • ▲ 여수 국가산업단지 전경ⓒ뉴데일리DB

    2000년대 용산 전자상가에서 삼성 메모리는 곧 현금이었다. 매일 오전·오후 업데이트 되는 램 시세는 아직 닷컴 버블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중 채권 금리보다 믿을 만한 경제 지표로 통했다. 개당 4만원짜리 256메가 DDR 메모리 20개가 담긴 80만원짜리 박스는 현금 다음으로 선호하는 결제 수단으로 통할 정도였다.

    삼성 메모리가 현금만큼 환금성이 좋았던 까닭은 삼성보다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이 4만원짜리 메모리에 수익성을 담아 5만원에 팔았다면 20년 넘게 이어진 글로벌 메모리 시장 평정은 불가능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수익성이 곧 선(善)인 금융논리를 철저히 경계한 이건희 선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미래를 위한 뼈를 깎는 인내와 투자, 이게 바로 금융논리와 차별화 하는 산업논리의 근간이다.

    국내 3위 에틸렌 생산 업체 여천NCC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 나프타분해설비(NCC)로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을 생산하는 회사로 한국 제조업을 지탱하는 뿌리 기업이다. 회사 경영의 한 축인 DL그룹이 자금 투입을 주저하면서 디폴트 사태에 직면했다. 나머지 지분 절반을 보유한 한화그룹은 각각 1500억원씩 투입할 것을 원하지만, DL 측은 마뜩지 않은 표정이다.

    DL 측은 부랴부랴 자금 수혈 동참 의사를 보였다지만, 이번 사태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돈 안되는 사업은 버린다'는 전형적인 금융논리가 산업계 전반을 잠식한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다. DL그룹 측 고위 관계자는 한화 측과 가진 회의석상에서 "답 없는 회사에 돈을 꽂아 넣을 수 없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자본)논리는 당장의 손실을 줄이고 재무 구조를 개선하지만, 산업논리는 미래 경쟁력과 국가 경제의 체력을 지킨다. 한국 제조업이 금융논리에 잠식되면, 단기 성적표는 좋아질지언정 시장 점유율과 기술 우위는 회복하기 어렵다. 당장의 이익만 쫓는 자본가 정신으론 제조업 근간으로 여기까지 온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될 수 없단 얘기다.

    현재 한국 경제를 이끄는 SK하이닉스만 하더라도 과거 금융논리를 좇았다면 전신인 현대전자 시절 마이크론에 내다 팔았어야 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연간 영업익 10조원을 벌어들인 HMM(옛 현대상선)의 실적도 불과 10여년 전 한진해운의 공중분해 사태에서도 끝끝내 버텨내 얻은 영광이다. 조선업 불황기에 대우조선해양을 한화오션으로 재탄생시켜 K-조선 부흥기를 이끈 한화그룹의 뚝심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불모지에서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투자를 이어온 삼성전자의 도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는 주변국의 하청 공장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국내 10대 그룹 중 기업가치가 가장 크게 상승한 곳이 한화그룹이라고 한다. 13개 상장사 시가총액이 지난해 말 43조5000억원에서 이달 초 120조7000억원으로 177.5% 상승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30.6%)을 5배 이상 상회하는 수치다. 방산과 조선 등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몰라보게 달라진데다, 이 산업들이 한미 통상 교섭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한화오션 거제 조선소를 둘러본 미 해군 장성은 압도적인 생산성과 기술력에 혀를 내둘렀고, 이후 이를 보고 받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사실 조선이 없었으면 (한미)협상이 평행성을 달렸을 것"이라고도 했다. 산업논리로 무장한 기업은 결국 자본논리가 추구하는 수익성은 물론 국가 위상까지 다시 세우는 저력을 지닌 나라 경제의 보배다.

    여천NCC 사태도 단순한 개별 기업 위기가 아니다. 여수산단과 수많은 협력업체, 그리고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 걸린 문제다. 한화는 '석유화학 산업을 버리면 한국 산업의 미래는 없다'는 산업논리를 앞세운다. 조선 산업에서의 경험이 증명하듯, 산업 기반을 지키는 결단은 결국 한국 경제 전체의 버팀목이 된다는 기업가 정신이다. 한화가 던진 이 묵직한 일침이, 금융논리에 매몰된 한국 제조업 전반에 경종이 되길 기대한다.
안종현 산업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