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국 베트남 역사관 오독 우려게릴라전 베트남전, 단순화 위험'사과 외교', 트럼프 기조와 엇박자
  • ▲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AP·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피해 문제에 대해 '사과'를 언급한 사실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 뒤늦게 공개됐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서는 베트남 정부가 이미 '과거사를 덮고 미래 협력에 집중한다'는 외교 원칙을 고수해 왔고, 미국도 베트남전에 대한 공식 사과를 철저히 배제해 온 만큼 불필요한 논란과 외교적 부담을 자초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베트남전이 미국의 역사적 아픈 기억이자 사실상 유일한 패전인데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구호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한미 정상 간 외교적 협상과 분위기에 미칠 파장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5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19일 국무회의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받을 때 베트남에서도 우리나라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인도적 차원에서 베트남 쪽을 많이 받아준다든지 베트남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자"고 제안했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 태어난 '라이따이한'(한국인 남자와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문제에 대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조태열 외교부 장관에게 "우리는 항상 일본에 '사과하라' '보상하라' 요구하는데 우리가 베트남에 공식적으로 '가해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당시 조 장관은 "이전 정부에서도 사과 의사를 표시했는데 베트남 정부에서 거절했다"며 "'한국-베트남 관계는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지 과거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베트남 정부 입장"이라고 답했다.
    ▲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전국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베트남전 참전 사과 원치 않는 '승전국' 베트남

    베트남 정부는 우리나라와 1992년 수교 후 '과거는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는 원칙 아래 한국 정부를 비롯한 옛 전쟁 당사국에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 요구를 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등 역대 한국 대통령은 과거사 유감 표명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는 필요 없지만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한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저서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에서 베트남 정부가 과거사 논의를 거부하며 '과거는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베트남 중부의 피해 마을에서 인도적 지원 사업을 직접 지휘했다. 이를 바탕으로 베트남 국민 상당수가 한국군에 의한 양민 피해를 미국 주도의 냉전 구도 속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경험은 베트남 정부의 과거사 접근 방식과 한국 사회 내 다양한 인식 간의 온도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베트남 정부가 과거사 사과 요구에 소극적인 것은 자신들이 피해국이면서도 '패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반영한 외교적 판단으로 풀이된다.

    베트남전 이후 베트남은 미국과 한국 등 자유 진영을 상대로 승리한 당사국이자 통일을 이룬 국가다. 1975년 사이공 함락과 베트남 공산화는 명백히 북베트남이 승전국이고, 남베트남과 미국, 그 동맹국인 한국은 패전국으로 기록됐다.

    전후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중시하는 이유로, 승전국이라는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외교가의 해석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과거사 언급이 오히려 외교적 무리수로 지적되고 있다. 승전국 베트남이 과거 문제로 집착하기보다는 미래 지향 협력을 더 중시하는 외교적 기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 베트남전쟁 중 종군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베트남 현지에서 생활하는 참전 군인들의 모습과 위문공연 현장, 귀국 당시의 모습이 담겨있다. ⓒ전쟁기념관 오픈 아카이브

    ◆게릴라전·냉전 구도 속 베트남전, '역사적 단순화'는 위험

    외교가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발언이 베트남전의 역사적 복합성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일방적 가해자 프레임'에 치우쳤다고 지적한다.

    베트남전은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한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식민지배나 학살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비극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게릴라전의 특성상 민간인과 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1968년 하미마을 사건 등 대표적 민간인 피해 사례에서도 베트남 정부가 희생자 135명 중 일부만을 '열사'로 인정했다. 그만큼 해당 마을이 남베트남 해방전선(베트콩)의 거점 지역이었고, 주민 다수가 낮에는 농부, 밤에는 유격대로 활동하는 이중적 생활을 했던 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민간인 피해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한국군의 잘못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군도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비극이 발생했지만, 일방적인 학살자와 희생자의 구도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전장이었다.

    베트남전 기간 북베트남·베트콩 측의 잔혹 행위도 존재했고, 전쟁 후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한 남베트남 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숙청과 탄압도 역사에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파병이 불가피했다는 현실론,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자유 진영의 싸움이었다는 가치관, 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희생에 대한 도의적 책임론까지 폭넓은 견해가 공존한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헌신한 참전 용사들 입장에서나 국민 정서상 우리가 가해자라는 규정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1970년대까지 반공 애국 이념의 일환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영웅이 됐고,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성장한 세대도 많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민감한 역사 문제를 언급할 때는 국내외 정서를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2025년 1월 9일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국장에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는 장례식 순서를 살펴보고 있다. ⓒAP/뉴시스

    ◆'사과 투어' 논란 재연하나 …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 엇박자 우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공개된 이 대통령의 베트남전 과거사 발언은 시기적·전략적으로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기조는 '힘에 의한 평화'와 국익 우선의 거래적 외교로 요약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 그 지지 기반인 MAGA 진영은 자국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거나 역사 문제에 있어 반성적인 태도에 부정적이다.

    과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 중 해외 순방에서 미국의 과거 잘못에 유감이나 사과 의사를 재차 표명하자 미국 보수 진영은 이를 '사과 투어'(apology tour)라고 칭하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특히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당시 오바마의 '사과 외교'에 대해 "미국은 전 세계에 대해 사과할 것이 없다"며 "오바마는 미국을 약하게 만든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공화당 지도부도 '오바마의 사과는 연합전선을 약화하고 적국에 신호를 준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내세우는 '실용외교'는 국익과 현실에 철저히 입각해야 하는데, 과거사 이슈를 재점화하는 것은 한미 통상·안보 협상을 앞둔 현 시점에서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현재 한국의 국방비 증액,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대중 견제를 위한 '동맹 현대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여론전과 압박 전술을 총동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미국이 껄끄러워 하는 과거사를 부각하면 오히려 한미 간 협상 본질에 대한 초점이 분산되거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청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베트남전 관련 책임 문제는 이미 암묵적 성의 표명과 지원 협력이 꾸준히 이어져 온 사안으로, 이번처럼 대통령이 공식 사과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면 오히려 국익과 외교 지렛대를 약화할 우려가 있다"면서 "외교 메시지의 시기와 맥락, 양국의 역사적 입장 차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할 신중함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