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사 팔고 천막당사서 공천 쇄신 이명박, 민생 강조하며 중도층 표심 확보이준석, '2030 남성 청년' 외연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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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한나라당 현판을 직접 천막당사로 나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국민의힘이 끝없는 추락으로 존폐 위기에 몰렸다.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대선 패배와 같은 연이은 악재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계속되는 내홍으로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탄핵 탄성파와 탄핵 반탄파 간 세력 대결은 '촌극'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당 역사를 돌이켜 보면 '위기에도 기회가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보수·우파를 자임한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위기 때마다 극적인 반전을 꾀하며 수권 정당의 면모를 과시한 바 있다.
정당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국민의힘이 과거의 쇄신 경험을 토대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의힘은 지금 혁신 의지가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결국, 과거의 경험을 통해 오늘과 미래를 보는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박근혜, 중진·기득권 물갈이로 위기 돌파
2004년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대선에서 패하고 '차떼기(불법 대선 자금 사건) 정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당이 풍비박산 직전에 몰린 때였다.
혼란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된 당시 박근혜 의원은, 약 420억 원으로 평가받던 서울 여의도 당사를 국가에 헌납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 600억 원대에 달하는 천안연수원도 국고로 귀속시켰다. 불법 대선 자금 전액을 책임지고 갚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조치였다.
그리고 이어진 84일 간의 '천막당사' 생활은 지금도 쇄신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정신으로 한나라당은 국민에게 절박함을 호소했다. 당내 중진과 기득권을 쥔 인사들을 대거 물갈이하는 '공천 쇄신'도 이때 이뤄졌다. 나경원, 유승민, 주호영, 최경환 등이 이때 배지를 달았다.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121석을 얻어 제2당 지위를 유지했다. "50석도 힘들 것"이라던 관측이 나오던 때 나름 선방한 결과였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함으로써 보수·우파 세력은 재도약의 중대한 분기점을 마련했다.-
- ▲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이명박, 중도층 표심 잡아 대선 승리
과거 박근혜 대표는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명박 서울시장과 경쟁 구도에 있었다. 둘은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선에서 맞붙었지만, 결국 이 시장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승리했다.
이명박 청와대에서 대변인을 지낸 김희정 국민의힘 의원은 당시 둘의 관계에 대해 "둘 다 인재를 섭외하는 데 경쟁적이었다"며 "지금처럼 누구를 지목해 '너 나가' 이런 식의 인적 쇄신이 아니라 더 괜찮은 사람을 섭외하기 위한 경쟁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이런 경쟁이 '외연 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한나라당이 2008년 총선에서 수도권 지역을 압도적으로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전국적으로 출마할 수 있는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며 "중도층의 지지를 받아 전국 정당으로 거듭났던 때였다"고 부연했다.
'TK(대구·경북) 정당' '도로 영남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중도층 지지 확보다. 지난 대선 이후로 지금까지 '윤석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의힘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중도층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수도권과 청년층도 등을 돌렸다. 국민의힘이 고립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선거에서든 중도층의 표심이 중요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도층 표심 확보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시장 때의 성과를 강조하며 민생 경제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한 것이다.
김 의원은 "청계천 복원, 서울 버스 중앙차로 도입 등의 가시적인 성과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도 먹혀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준석, '보수 꼰대' 이미지 탈피
지금은 국민의힘과 척을 진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보수·우파 진영 내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그가 국민의힘 대표로 뽑힐 당시 36세였다. 역대 최연소 대표라는 타이틀 자체로 상징성이 있었다.
이 대표 취임 전까지 보수 정당은 '늙은 꼰대'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가 2030세대 남성 청년층의 지지를 대폭 확장하면서 국민의힘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한 여론조사는 제20대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당선의 가장 큰 기여자로 이 대표를 꼽기도 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이 대표를 선택한 응답자는 34.8%였는데, 윤 전 대통령은 24.1%,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은 4.7%였다.
이러한 혁신 사례가 있음에도 국민의힘의 쇄신 가능성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인적 쇄신을 할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쇄신을 할 만한 타이밍이 아니다"라며 "무엇보다 지금 당 지도부나 당권파는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영남 쪽 의원인데 다음 총선에서 공천만 받으면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 국민의힘은 과거처럼 어떤 전략적인 마인드도 없고 절박함도 없어 보인다"며 "박 전 대통령이 천막당사로 갔던 이유는 그만큼 절박함이 있었던 얘기다. 그때는 말끝마다 '죽을 죄를 지었다'고 했다. 지금은 '계엄은 정당했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이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