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통미봉남 본격화… 韓, 미북협상서 소외 우려美, 北 전략핵 폐기 초점… 韓, 전술핵 폐기 절실트럼프의 '역키신저 전략'… 韓 패싱 우려 고조'전략적 모호성' 늪에 빠진 韓… 美 신뢰 회복 시급
-
-
- ▲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백악관이 29일(한국시간) '김정은과 대화에 문을 열어 두고 있다'고 밝히자, 북한 김여정이 '비핵화 외'라는 전제를 달고 사실상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정체됐던 한반도 정세가 다시 움직일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되면서 과거 문재인 정부 때 벌어졌던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재현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최근 북한은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추구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다시금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주적인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분리하는 이른바 '역(逆)키신저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북 간 이해관계가 맞물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이재명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여전히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자칫 한국이 협상 과정에서 소외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김여정, 北 '비핵화 外' 협상 가능성 시사 … 통미봉남 강조
김여정은 29일 담화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는 미국 백악관 당국자의 발언을 언급하며, 비핵화 이외의 목적을 위한 협상에 응할 의사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김여정은 현재 북한의 지정학적 환경이 2018년 싱가포르 회담이나 2019년 하노이 회담 당시와는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북미 접촉은 미국의 '희망'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달라진 지정학적 환경과 불가역적 핵보유국 지위에 대한 인정을 대화의 전제로 제시했다. 이는 북한이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강화로 대북 제재를 우회하면서 여유를 확보한 만큼, 대화 재개가 급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앞서 28일 담화에서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나 제안이 나오든 관심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며 북한이 1990년대 초부터 유지해 온 '통미봉남' 기조를 재확인했다. 북한은 장기적으로 한국을 무력으로 흡수·통합하는 '적화통일'의 전략적 포석으로 통미봉남을 추진해 왔다. 핵무력을 완성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 약화를 유도하고, 한국을 군사적·정치적·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목적에서다. 표면적으로는 '민족 공조'를 내세우지만 이는 실제로 남측의 군사 대비태세를 약화시키고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 판문점 선언에 따른 9·19 남북군사합의다. 이 합의는 표면적으로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자는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북한이 한국의 군사적 대응능력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의 직접적인 협상 구도를 조성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실제로 북한은 합의를 근거로 남측의 군사활동을 제한하면서도, 합의 효력이 정지된 2024년 6월까지 약 3600회가량 이를 일방적으로 위반했다. 위반 사례 대부분은 해안포 포문 개방, 포사격, 미사일 발사, GP(감시초소) 총격, 무인기 침투 등 반복적이고 고의적인 행위였다. 이처럼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은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하고 한반도 적화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국가안보에 심각한 도전으로 평가된다.-
- ▲ 북한은 지난 2024년 4월 22일 김정은의 지도로 600mm 초대형 방사포병 부대들을 국가 핵무기 종합관리체계인 핵방아쇠 체계 안에서 운용하는 훈련을 처음으로 진행했다고 조선중앙TV가 2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캡쳐/뉴시스
◆ 한미 간 북핵 시각차 … 美는 전략핵, 韓은 전술핵 폐기가 관건
한국이 미북 협상에서 배제될 경우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한미 간 입장차로 인해 한미 확장억제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은 국가방위전략(NDS)과 미사일방어전략에서 일관되게 미 본토에 대한 전략적 공격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의 전술핵 폐기 등을 포함한 전면적 비핵화보다는 본토 안전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전략핵 폐기를 우선시한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은 한반도 전역을 타격할 수 있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인 북한의 전술핵무기까지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술핵을 그대로 두고 전략핵만 제거하는 이른바 '스몰딜'이 성사되면, 미국은 본토 안전을 확보하며 북한과 전략적 거래를 할 수 있지만 한국은 북한의 핵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이 전면 핵 공격이 아니라 제한적 핵도발을 감행할 경우, 미국이 자국에 대한 핵 보복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을 보호할지는 불확실하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한국 내 신뢰를 저하시켜 한미 연대를 약화시키는 '디커플링'(decoupling)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이 미북 협상 과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을 높인다.
-
- ▲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27일(현지 시간) 스코틀랜드 턴베리의 트럼프 턴베리 골프장에서 무역 합의에 도달한 후 악수하고 있다. 미국과 EU가 '상호관세 15%'를 골자로 한 무역 합의를 타결했다. ⓒAP/뉴시스
◆트럼프 2기 행정부 '中 견제용 逆키신저 전략' 가능성
이러한 한미 간 북핵 입장차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역(逆) 키신저 전략'과 결합하면, 한국이 배제된 채 북한의 전략핵 폐기와 미북 관계정상화를 맞바꾸는 '스몰딜'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과거 냉전 시기에 미국은 주적인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 손잡고 미·중 국교를 정상화한 바 있다. 현재는 미국의 주적이 중국으로 바뀌었고, 러시아와 북한은 중국의 사실상 유일한 전략적 우방으로 남아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해 중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압박하려는 '역 키신저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시진핑 3기 중국 정부가 미국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면서 미국은 동아시아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랜다우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18일 도쿄에서 열린 한미 외교차관 회의에서 한국 정부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확대 적용하는 등의 '동맹 현대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나아가 미국은 한반도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원시어터'(One Theater) 개념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 전략적 타협을 통해 북한을 중국 진영에서 분리하려 시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대북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 본토를 위협하는 전략핵 폐기를 조건으로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것을 중국 견제의 중요한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는 전략적으로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미국 영향권에 두겠다는 전략적인 큰 그림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면서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전략핵만 폐기시키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북한을 중국 진영에서 이탈시켜 중국 압박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라고 분석했다.-
- ▲ 김은진(왼쪽), 권오혁 촛불행동 공동대표가 2025년 1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주한미대사 공개면담 요구 기자회견에서 최상목 당시 권한대행 지지 철회와 내정간섭 중단을 촉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 미국 내 불신 심화
이재명 정부가 사실상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내세우는 '실용외교'는 한미 간 신뢰를 더 약화할 우려가 있다. 미국이 한국은 호주·일본·필리핀 등 다른 동맹국과 달리 대중 견제 참여에 소극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한국이 미북 협상에서 배제될 우려를 높이고 있다. 최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의 방한이 갑자기 취소된 사례나, 한미 간 관세 협상 교착 상태 역시 이 같은 신뢰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화당 소속 브라이언 매스트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24일(현지시간)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배를 모두 떠받치려 하고, 우리가 더 큰 강조와 초점을 두고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균형·견제 역할을 넘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중국)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 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볼 것이고, 미국은 이를 모욕(slight)으로 여길 것"이라며 사실상 한국에 전략적 명확성을 요구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형인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의 반미적인 SNS 글 논란 등 정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부 인사들이 미국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점도 한미 간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발표한 9.19 군사합의 복원 공약,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한미 연합연습 조정 검토 발언,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의 대북 방송을 중단 조치 등이 미국 내 불신을 더 심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익명을 요청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이재명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중국 견제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국 패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며 "현 정부는 실질적 대비 없이 '설마' 하는 안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회색 코뿔소' 이론이 지적하듯 충분히 예견된 위기를 방치하는 형국이다.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가치를 과신하지 말고 미국의 중국 견제 요청에 분명한 행동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