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외부정보 차단하면 내부 변화 불가능"상호주의 논리 빈약… 北에 이득만 줘"국정원, 헌법상 통일 책무 방기 비판 확산시민단체, 헌법소원 등 법적대응 나서
  • ▲ 국가정보원이 17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문구를 새긴 원훈석을 설치해 제막식을 가졌다. ⓒ국정원 제공

    지난 52년 간 한반도 평화통일의 상징이자 북한 내부 변화를 촉진해 온 국가정보원의 대북 방송이 이종석 원장 취임 직후 전면 중단됐다. 국정원의 이번 조치는 헌법 책무를 정면으로 위배한 '반헌법적 이적행위'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북한 주민에게 외부 정보를 제공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헌법이 명시한 평화통일 실현의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국정원의 방송 중단 조치는 북한의 대남 방송 중단에 대한 호응이라기보다는, 북한의 정치적·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북 방송은 북한 주민에게 외부 정보와 자유를 전달하고, 북한 정권에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게 하는 이중 효과가 있었다.

    ◆北, 계기마다 대북방송 중단 요구 … DJ·盧·文도 중단 거부

    1973년 개시된 '희망의 메아리'와 1980년대부터 이어진 '인민의 소리' 등은 남북관계의 부침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된 대북 심리전 수단이었다. 북한은 1972년 '7·4 공동성명', 2004년 남북장성급군사회담,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등 주요 계기마다 남측 방송의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방송 중단 요구를 거부하고 송출을 지속했다. 북한 내부 변화를 유도하고,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책무를 준수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국정원의 이번 조치로 북한 주민들은 그나마 접할 수 있던 몇 안 되던 외부 정보 창구 하나를 상실하게 됐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 산하 북한 전문매체인 '38노스'에 따르면, 올해 초만 해도 하루 415시간에 달했던 전 세계 대북 라디오방송 총송출 시간이 최근 89시간으로 급감했다.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 등 미국 대북 방송들이 조직 개편 등으로 축소된 데 이어, 한국에서마저 국정원이 방송을 중단하면서 전체 방송량이 80% 가까이 감소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주요 대북 방송은 KBS '한민족방송'과 국방부 산하 '자유의 소리' 정도다. 이마저 중단될 경우 BBC 월드서비스와 민간 대북라디오 몇 곳을 제외하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정보의 통로는 사실상 사라진다.

    북한이 경계하는 외부 정보 유입을 차단한 이번 조치는 사실상 김정은 정권을 돕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곽규택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50여 년간 이어져 온 대북 방송을 전면 중단한 것은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시킨 것"이라며 "김정은 정권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미사일도 제재도 아닌 '진실'인데, 이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그 진실을 차단함으로써 김정은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임명장 및 위촉장 수여식에서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종석 취임 10일 만에 대북 방송 '순차 중단'

    국정원은 지난 5일부터 14일까지 라디오 주파수 5개와 TV 방송 1개 등 총 6개의 대북 방송을 순차적으로 중단했다. 국정원 측은 공식 답변은 삼갔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북한이 안 하니까 우리도 안 한다'는 논리가 이번 결정의 근거로 거론된다.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남 심리전 매체 운영을 중단했으니 남한도 상호주의에 따른 '대응 차원'에서 취한 '상응 조치'라는 취지다. 앞서 북한 김정은 정권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정의한 데 이어 2024년 1월에 14개 주파수의 대남 라디오 방송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바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3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대북 방송 중단이 '남북 체제 대결 시대의 종식'을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 22일 오후 10시를 기해 북한이 송출하던 방해 전파 10개의 주파수가 중단됐으며, 이제 2~3개의 주파수만 남아있다. 북한의 이러한 조치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한국 정부는 북한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자국의 필요에 따라 조치를 취했으나, 북한이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대북 전단 살포 금지, 확성기 방송 중지, 금강산 개별 관광 재개 검토 등 대북 유화책을 잇달아 추진하고 있다. 이종석 국정원장도 지난달 25일 취임사에서 "남북 군사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의 돌파구를 열어나가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며 남북 관계 개선을 강조했듯, 이번 국정원의 대북 방송 중단 역시 이러한 유화 정책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이 남측의 이런 선제적 조치에 호응해 실제 관계 개선에 나설지는 불투명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국정원 '상호주의' 논리의 허점 … "北에 정치적·경제적 이득"

    전문가들은 정부의 '상호주의' 논리가 남북 체제와 정보 유입 환경의 현격한 차이를 간과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북한이 운영을 중단한 대남 방송 매체들은 애초부터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접하지도 않는 채널들이었다. 반면 남측이 운영해온 대북 방송은 폐쇄된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사실을 알리는 일방향 구원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은 애당초 우리 국민이 듣지도 않을 선전을 중단한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몰래 청취해오던 진실의 방송을 스스로 꺼버렸다"며 "그 결과 북한 정권의 정보 차단 정책을 우리가 앞장서 도와주는 셈이 됐다"고 꼬집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안보 관료는 "북한은 그동안 우리 대북 방송을 차단하기 위해 막대한 전력을 투입해 방해 전파를 쏴 왔다. 국정원이 이번에 먼저 방송을 중단하자 더는 방해 전파를 쏠 필요가 없어진 것일 뿐"이라며 정부의 '상호주의' 논리를 반박했다. 그는 "대북 방송을 차단하려면 한국에서 보내는 전파만큼 동일한 양의 전력이 소모된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에게 자유와 외부 소식이 전달되는 데 대한 정치적 부담, 심각한 전력난 속에서 방해 전파 송출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느꼈고 우리 측에 대북 방송 중단을 요구해 왔다"며 "결국 국정원은 북한 정권에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동시에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번 결정은 장기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과 북한 인권 증진 목표에 정면으로 역행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38노스는 "북한 노동당은 수십 년간 검열되지 않은 정보 유입과 싸워왔는데, (남측 방송 축소로) 찾아온 행운을 믿기 어려울 것"이라며 최근의 대북 방송 급감을 "북한 정보전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또 "그동안 한 번도 중단된 적 없던 방송들까지 멈춘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향후 한반도 정세가 악화하면, 한국과 미국은 북한 주민과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지난 2016년 12월 14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심판 준비 절차가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경찰이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 ⓒ뉴시스

    ◆전문가들 "반헌법적 조치… 직권남용·이적죄 해당 소지"

    특히 국정원의 이번 결정은 헌법이 명시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 기조를 정면으로 뒤집은 반헌법적 조치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북한 정권의 변화와 개혁을 촉진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기반한 평화적 통일을 달성해야 할 헌법적 의무가 있음을 천명한다.

    그런데 대북 방송 중단은 이러한 의무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앞서 국정원은 과거에도 대북 방송 유지가 헌법 4조 이행에 부합한다며 북한의 중단 요구를 막아냈던 바 있다. 이번 결정은 그때와 정반대로 헌법 정신을 거스르는 퇴행이라는 것이다.

    한 안보 전문가는 "국가의 정보기관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헌법적 책무를 저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결정은 직권남용은 물론, 경우에 따라 이적행위에 해당할 소지도 충분하다"며 "현행 '내란 특검'의 논리대로라면 군이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작전조차 이적죄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인데, 관련 책임자들은 정권 교체 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은 향후 북한이 대남방송을 재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북 방송을 선제적으로 재개하지는 않을 방침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의 기존 대북 심리전 방송 담당 조직도 앞으로 안보 위협 탐지와 조기 경보, 국가 이익 현안에 대한 글로벌 공감대 확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발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이 대남 방송을 재개할 가능성이 극히 낮은 현실을 고려하면 국정원 심리전 조직은 사실상 해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한변), 올바른북한인권법과통일을위한시민모임,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등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의 이번 조치가 평화통일 추구권을 비롯한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적 행위라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국정원의 이번 결정은 향후 법적 책임 공방 등 국내 정치적 논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조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