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로 호감 쌓고 투자 유도…'로맨스 스캠'피해자 3명에 11억 뜯어…20대 남성 징역형해외 본거지에 못 잡는다…침묵 부르는 낙인전문가 "국제 공조 없인 검거도 회수도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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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에서 이성에게 호감을 산 뒤 돈을 뜯어내는 신종 사기, 이른바 '로맨스 스캠'의 수법이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해외에 거점을 둔 채 감정을 미끼로 금전을 요구하는 국제적·조직적 범죄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최근 SNS로 연인 관계를 맺고 투자 명목으로 거액을 뜯어내는 로맨스 스캠에 가담한 20대 남성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사랑이라 믿었던 관계에 속아 경제적 손실은 물론 정신적 충격까지 겪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수법을 '감정 기반 금융 사기'로 분류한다. 범죄가 국경을 넘나드는 만큼 국제 공조 없이는 실질적인 대응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 '사랑꾼 사기' 어떻게 작동했나…11억 뜯고 징역 4년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강민호)는 이달 11일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민모씨(25)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민씨는 라오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국제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해 피해자 3명으로부터 총 11억 원 상당의 금전과 가상화폐를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에 따르면 민씨는 2024년 3월부터 9월까지 자금관리책으로 활동했다. 본인 명의 계좌와 비밀번호를 조직원에게 제공해 범행에 이용되도록 했다. 돈이 입금된 대포계좌가 지급정지되면 계좌 명의자에게 연락해 이를 해제하는 역할도 했다. 돈세탁과 자금 유통을 담당한 하부 조직원으로서 범행에 가담한 셈이다.

    이들 조직은 이른바 로맨스 스캠 수법을 활용해 범행을 저질렀다. 로맨스 스캠은 로맨스(Romance·연애)와 스캠(Scam·사기)의 합성어로, 연애 감정을 가장해 금전을 갈취하는 온라인 금융 사기다. 

    라오스에 있는 조직원들은 가짜 SNS 계정으로 한국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친밀감을 쌓았다. 이후 "인터넷 사이트 계정으로 코인을 송금해 자신의 지시에 따라 달러에 투자하면 100%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대출 이자를 갚아야만 인출이 가능하다"는 등의 거짓말을 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피해자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세금',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재차 입금을 요구했다. 피해금은 계좌 분산 이체나 가상화폐 환전 등으로 세탁돼 조직적으로 관리됐다. 이번 사건은 로맨스 스캠과 보이스피싱이 결합된 국제적·조직적 신종 금융 범죄였다.

    법원은 "지능적인 조직 범죄로 사회적 폐해가 크고 피해자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낳았다"며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려 라오스로 출국한 후 범행에 가담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 서울동부지법. ⓒ정혜영 기자

    ◆ 치밀한 국제 사기, 입 닫는 피해자…로맨스 스캠의 그늘

    이번 사건의 핵심은 범죄가 라오스를 거점으로 한 해외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실제 동남아 전역에 퍼져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들은 현지에 사무실을 차리고, 한국어에 능통한 인력을 동원해 국내 피해자들을 노린다. 이에 국내 수사기관만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필리핀 등 해외 본거지를 추적하기 어렵다. 실질적인 검거도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피해자들이 '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이유로 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많아 수사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난항을 겪는다. 

    사회적 낙인 역시 피해자들에게 큰 부담이다. '왜 그런 말을 믿었느냐', '처음부터 수상하지 않았느냐'는 반응은 2차 가해로 이어진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감정도 주고 돈도 잃은 채 입을 닫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제 공조가 이뤄지면서 해외 조직도 하나둘 덜미를 잡히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6월 태국 파타야에서 이뤄진 대규모 검거다.

    경찰청은 지난 6월 태국 파타야에서 한·태 합동 작전을 통해 로맨스 스캠 조직원 19명을 검거했다. 이어 16일에는 추가 수사를 위해 공동조사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이들 조직원은 파타야의 풀빌라 단지를 범행 거점으로 삼고 수십 대의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설치해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태국 이민 당국과 협조해 검거된 조직원 전원을 국내로 송환할 예정이다.

    ◆ 피해 회복은 사각지대…전문가 "국제 공조 없인 검거 한계"

    피해자들은 금전 보상을 받지 못하면 사실상 피해 회복이 어려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법원은 피해자들이 낸 배상명령 신청을 모두 각하했다. "공동범행 구조상 피고인의 책임 범위를 형사 재판에서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국제 공조 수사 없이는 로맨스 스캠 범인의 검거와 피해 회복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국제 공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신병 확보도, 자금 회수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로맨스 스캠은 대부분 해외 조직이 주도하고 국외에서 범행이 이뤄지는 만큼 가해자 검거부터 범죄 수익 추적, 계좌 동결까지 모든 수사 단계에서 국경을 넘는 협력이 필요하다.

    로맨스 스캠에 대응할 법적 장치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등에 따라 금융회사에 계좌 입출금 금지를 요청하면 즉시 지급이 정지된다. 전자금융거래법이 적용돼 처벌 수위도 높은 편이다. 반면 로맨스 스캠은 일반 사기로 다뤄져 처벌 수위가 비교적 낮다.

    이런 한계를 보완하려는 입법 논의는 이어졌지만,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련 개정안 10건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들 법안은 로맨스 스캠, 리딩방, 인터넷 도박 등 신종 사기 수법을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포함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 대응을 유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조성과 실시간 신고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교수는 "로맨스 스캠 범죄는 피해자가 수치심 때문에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며 "실시간 신고 시스템 구축과 시민 예방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