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필리핀·일본, 농산물 시장 빗장 연 미국관세율 낮추려 줄줄이 '백기투항'한 아시아 국가들아태 주요국 식탁 위 점유율 올리기 '심혈'韓美 무역 합의서 소고기·쌀 시장 개방 쟁점될 듯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처=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 주요 3개국과 잇따라 무역 협정을 타결했다. 세 나라가 받아든 최종 관세율은 15~19%다. 이들 국가는 관세율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미국이 요구한 비(非)관세 장벽 철폐를 비롯해 각종 시장 개방에 합의했다. 미국으로서는 농산물 수출 확대 혹은 농산물 시장 개방 등 수출 시장 확대에 성공한 협상이라는 평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상호관세 시행일을 열흘 앞두고 막바지 협상에 공을 들이고 있는 한국도 미국산 소고기 월령 제한 폐지 등 농축산물 수입 개방 조치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

    22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과의 무역 협상 완료 소식을 발표하며 일본산 수입품에 대한 상호 관세율이 15%로 설정됐다고 밝혔다. 당초 예고했던 관세율 25%에서 10%P 낮춘 수준이다. 

    협상 내용을 보면, 일본은 미국산 쇠고기, 옥수수, 유제품 수입 확대를 다시 약속했다. 일본은 이미 2019년 미·일 무역합의를 통해 농산물 시장 일부를 개방했으나, 이번 합의로 그 범위를 더 넓힌 셈이다.

    또 미국과 일본은 △데이터 이동 자유화 △인공지능(AI) 규범 정립 △반도체 협력 등 디지털 경제 동반자 관계를 발표했다.

    미국은 일본의 디지털 협력 수용을 환영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농·축산물 없는 디지털은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처럼 최근 미국이 체결한 무역 합의에는 전통적으로 민감한 품목인 미국산 소고기, 옥수수, 콩, 유제품 등이 각각의 협상 테이블에 빠짐없이 올라왔다.

    겉으로는 디지털 무역, 공급망, 안보 협력 등 첨단 산업 중심의 경제 협력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농업이라는 핵심 이익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입장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이른바 '농산물 개방형 포괄 협상'이 이제 한국의 코 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 오른쪽)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출처=APⓒ뉴시스

    이날 공개된 인도네시아와의 무역 합의 세부 내용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확인됐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와 희토류·니켈 등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확대하는 대신, 미국산 축산물과 콩, 옥수수 등 주요 농산물의 검역 장벽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인도네시아와의 무역 합의 세부 내용을 발표하며 "인도네시아는 미국과의 교역에서 99% 이상의 제품에 대해 관세를 '0'으로 낮추고 미국에 대한 모든 비관세 장벽을 없앨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국 농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공급망 참여를 위해선 농업 개방이 필요하다"며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인도네시아는 농산물 등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선적 전 검사와 인증 요건을 철폐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산 농산물 수입 규제 완화 외에도 디지털·자동차·의약품 등 부문에서 미국 기업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대부분 들어주는 등 사실상 '백기투항'을 택했다. 미국이 당초 매겼던 32%의 고율관세를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최종적으로 13%P 낮춘 19%의 관세율을 받아들었다.

    필리핀 역시 AI, 사이버보안, 반도체 협력 등을 내세운 무역합의를 체결했지만, 실제 미국이 얻은 것은 농산물 수출 확대다. 필리핀은 미국산 소고기, 돼지고기, 유제품, 사료용 곡물 등에 대한 수입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특히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필리핀 정부가 의미 있는 수준의 농업시장 개방을 약속했다"고 강조하며 사실상 농산물 시장 확보가 협상의 결정적 성과임을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협정 타결에 따라 필리핀은 미국과 자유 무역을 실시하며 관세율을 0%로 낮추게 된다"고 밝혔다. 필리핀의 관세율은 19%다.
    ▲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연합뉴스

    이처럼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주요 국가들과 체결한 양자 무역 합의에서 농산물 개방이 공통 분모로 등장한 것은 한국에도 분명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한국은 소고기 시장을 미국에 일정 부분 개방했지만, 검역·비관세 장벽을 통해 시장을 부분적으로 방어해왔다. 그러나 향후 미국과의 새로운 통상 협상, 또는 공급망·디지털·방위산업 분야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려는 한국이 미국의 전면적 시장 개방 요구를 피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미국은 소고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수입 확대 대상은 △유제품 △콩 △옥수수 △가금류 △가공식품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 "한국과의 동맹을 경제적 실익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이같은 입장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디지털 협력, 공급망 재편, 안보 파트너십 등을 외치고 있지만, 그들의 진짜 목표는 아태 주요국 식탁 위 점유율을 늘리는 것이라는 점이 앞선 협상 결과에서 나타났다.

    아직 농산물 개방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있는 셈인 한국이 어떠한 전략으로 합의에 임할 것인지 택해야 할 시점이다.
김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