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사법 족쇄 벗어났지만삼성전자 유례 없는 위기 직면경영공백 끊어내야 할 때는 지금
  •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2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혐의'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데일리DB

    7월 1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동.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법원 앞은 취재진과 카메라 등으로 북적였다. 비에 젖은 카메라를 닦아내는 촬영기자들의 손길은 분주했고, 정장 차림의 삼성 관계자들은 젖은 바닥을 바삐 오갔다. 이날 예정된 상고심 선고 공판에 이재용 회장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최종 판결에 대한 사회 안팎의 관심을 생각하면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1시 15분 공판을 앞둔 제2 법정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변호인단과 기자 등은 물론 소란을 피우는 사람까지 등장하며 그야말로 난장을 연상케 했다. 법원의 청원 경찰은 몇 번이나 나서 소리를 낮춰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뒤이어 30분경, 몇 건의 형사재판에 대한 선고 후 이재용 회장의 불법승계 의혹과 관련한 사건의 선고가 시작됐다. “2025도2805 피고인 이재용 외 13명. 상고인 검사.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법정 안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웅성이는 소리가 쏟아졌다. 햇수로 10년간 발목을 잡던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전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의혹 사건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이 회장이 안정적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각종 부정거래와 회계부정을 저질렀다는 검찰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일부는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이며, 수집된 물증의 경우에도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있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등의 고법 판단도 그대로 인정됐다.

    이번 무죄 판결로 이재용 회장은 그간의 길고긴 사법 리스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2016년 11월 13일, 그가 참고인 신분으로 첫 검찰 조사를 받은 지 3168일 만이다. 이번 판결은 삼성에도 상징적이다. 더는 재판 출석과 사법적 제약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다. 실제 이 회장은 부당합병 사건 재판으로만 102차례 법원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동안 이 회장은 재판에 출석하는 와중에도 해외 출장을 강행하는가 하면 미래 먹거리 발굴에 나서는 등 고군분투해왔다. 다만 제약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이 삼성전자는 유례없는 위기에 휩싸였다. 대들보인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평가에 직면했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및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에서도 주도권을 놓친 탓에 인공지능(AI) 붐의 수혜를 거의 입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반도체 사업 부문의 영업이익이 SK하이닉스에 처음으로 추월당했고, 올해 1분기에는 D램 점유율에서도 1위 자리를 넘겨줬다. 

    모바일, TV, 가전 등을 담당하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지난해부터 AI 기능을 내세운 갤럭시 S 시리즈가 흥행하며 모바일경험(MX) 사업부가 선전하고 있지만 애플, 중국기업 등과의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發) 관세전쟁의 효과가 본격화하면서 수익성 감소, 수요 둔화 등이 나타나고 있다. 모든 것을 리더십 부재와 관련짓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영향이 없다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1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삼성의 발목을 잡았던 사법 리스크는 이제 완전히 마무리됐다. 그러나 삼성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국내외 경영환경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하다는 점에서다. 더이상 사법 리스크라는 핑곗거리가 사라진 만큼 이 회장은 진짜 경영 실력을 회사 안팎에 보여줘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위기를 전면에서 돌파하고 과거의 영광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 속담에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폭우가 내리고 나면, 물러졌던 땅이 오히려 단단해진다는 뜻이다. 며칠째 이어진 폭우처럼 삼성은 지난 수년간 거센 사법 리스크의 빗줄기를 맞았다. 이제 막 비는 그쳤다. 실제 신기하게도 전날 이재용 회장의 무죄 확정 판결 이후 잠깐이나마 빗줄기가 잦아들기도 했다. 이제 젖은 땅을 딛고 다시 서는 것은 삼성의 몫이다. 위기가 더 단단한 삼성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