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주도 서대문구의회 "전시행정" 운운하며 운영비 전액 삭감"물 많이 마셔 예산 낭비" 지적까지…감독·선수들 망연자실서울시 예산으로 임시 운영…추경 무산 땐 팀 해체될 수도창단 1년 만에 전승 4관왕…"어떤 성과를 더 보여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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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출범 1년여 만에 국내 실업 여자농구 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올해 운영 예산이 전액 삭감되며 존폐 기로에 섰다.
"운동선수한테 물을 많이 마신다고 예산 낭비라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정말 울컥했어요"
박찬숙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 감독의 전언이다. 올해로 63세. 단단한 체격에 짧은 머리, 그의 말투는 여전히 프로 선수로 활약하던 한창 때의 절도가 있었지만 인터뷰 중 감정이 복받쳤는지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다.
그는 지난 2023년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단 1년 만에 국내 실업 여자농구 사상 처음으로 전승 4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태백시장배와 김천대회, 종별선수권, 전국체전까지 연이은 우승을 달성하면서 농구단의 위상을 세워 나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예산 전체 삭감'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올해 구의회에서 예산 낭비라며 전액을 삭감하더라고요.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박 감독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묻어났다.
"그 얘길 들은 날 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이 친구들 데리고 왔잖아요. 약속했거든요. 한 번은 너희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런데 그게 정치 때문에 깨질 줄은 몰랐어요"
박찬숙. 1980년대 한국 여자농구계의 아이콘. 1979년 세계청소년선수권 은메달,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그는 당시 국내 여자농구를 대표하던 대들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팀은 예산 삭감 논란과 함께 여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됐다.-
- ▲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출신 박찬숙 감독. 그의 눈앞에서 훈련 중인 선수들은 지금 생존을 걸고 코트에 선다.
◆ 리그 전승한 농구단에…"물 많이 마시는 것도 예산 낭비" 지적
서대문구 여자농구단의 운영 예산은 지난해 12월 구의회 심의에서 전액 삭감됐다. 삭감된 금액은 총 8억4000만 원. 구의회는 이 예산이 "전시성 행정"이며 "낭비성 항목이 많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부 의원은 "운동선수가 왜 물을 그렇게 많이 마시냐"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그 말을 듣고 정말 참담했다"며 "선수에게 물은 생명인데 그조차 예산 낭비로 치부된다면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민체육진흥법에 따르면 상시 근무 인원이 1000명 이상인 공공기관은 한 종목 이상의 운동경기부를 설치·운영해야 한다. 서대문구청도 이에 따라 실업팀 창단을 추진했고 2023년 3월 여자농구단을 출범시켰다.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서울 25개 자치구 중 유일한 여성 단체 구단이다. 전국적으로도 실업팀 중 단체 구단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개인 종목을 택한다. 선수 수가 적을수록 운영비가 덜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 단체 종목 선수들은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면 사실상 운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한 선수는 "서대문구청 농구단이 좋은 성적을 내면 우리 종목에도 실업팀이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청은 예산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단체 종목인 농구 택한 이유에 대해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지역 상징성과 응원 효과가 큰 단체 스포츠의 장점을 살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창단 이후 농구단은 전국대회 4관왕 성과를 거뒀고 지역 서포터즈 회원 350여 명이 자발적으로 응원단에 가입하는 등 지역 내 응집 효과도 확인됐다.
구청은 "방송과 언론 보도를 통해 구청 명칭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SNS 응원 영상이나 팬클럽 활동 등 파급 효과도 적지 않다"며 "실제로 기사화 건수 등을 감안하면 투입된 예산 이상의 홍보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밝혔다.-
- ▲ 지난달 29일, 서대문구청 농구단은 사천시청과의 경기에서 이기며 태백시장배 전국실업농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서대문구청
◆ "예산 낭비"는 표면적 이유…실체는 '정쟁의 불똥'
농구단 예산 삭감의 배경에는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는 시각이 크다.
당초 예산안은 지난해 12월 17일, 김양희 의장을 포함한 여야 3당 원내대표 간 최종 합의에 따라 계수조정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사흘 뒤인 20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다수인 구의회에서 기존 합의안을 뒤엎고 수정안을 기습 발의해 처리했다.
서대문구는 이에 대해 "지역 국회의원의 개입으로 특정 예산이 정치적으로 보복당했다"고 주장하며 재의를 요구했지만 구의회는 이를 상정조차 하지 않아 결국 준예산 체제로 2025년을 맞게 됐다.
여야 합의로 계수조정까지 마쳤던 예산안이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단독 수정으로 뒤집힌 셈이다. 삭감 대상에는 직원 기숙사 매입비, 홍제천 문화체험관 조성 예산 등 6개 사업이 포함됐고 농구단 운영비도 그중 하나였다.
구청은 당시 상황을 두고 "민선8기 주요 정책이 높은 주민 호응을 얻고 있음에도 당론을 앞세워 민생과 무관하다는 이유로 예산이 날치기 삭감됐다"고 반발했다.
박찬숙 감독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예산 논란이 아닌 '선수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본다.
그는 "스포츠가 정치색을 타는 순간 경기장은 더는 경기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올림픽이나 월드컵 볼 때 빨간 정당이면 응원하고, 파란 정당이면 야유하나요? 스포츠에 정치색이 어디 있냐고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찬숙 감독은 "농구단이 좋은 성적을 내자 주민들도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고 구청장과 국민의힘 구의원들도 직접 응원을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구의원들은 단 한 번도 현장에 온 적이 없다"며 "경기 한번 보지도 않고선 예산 낭비라며 잘라버리더라"고 했다.-
- ▲ 김나리 선수가 훈련을 하고 있다. 김 선수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서대문구청 농구단 유니폼은 그의 생애 첫 계약서자 꿈의 실현이었다.
◆ 추경 통과 안 되면 '예산 0원'…농구단 "묵묵히 연습만 할 뿐"
현재 농구단 운영은 서울시의 지원 예산으로 유지되고 있다. 당초 연말까지 쓰기로 한 예산을 앞당겨 쓰고 있는 만큼 추경이 통과되지 않으면 하반기 운영이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박 감독은 "선수들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제가 무너지면 안 돼요. 이 아이들에겐 이 팀이 유일한 기회인 경우가 많거든요.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죠"고 덧붙였다
선수들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단한 김나림(22) 선수에게 실업팀 유니폼은 생애 첫 계약서였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 순간만 기다렸어요"라며 "그런데 내가 열심히 해 이룬 꿈이 누군가에겐 예산 낭비로 보인다는 말이 너무 슬펐어요"라고 말했다.
창단 멤버이자 주장을 맡고 있는 윤나리(36) 선수는 "삭감 소식 처음 들었을 땐 장난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루 종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는 "한국 여자 농구 역사에서 엄청난 기록을 보여주는 중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윤 선수는 “그래도 연습은 멈출 수 없으니까 묵묵히 코트에 나간다”고 했다. 자칫 팀 분위기가 흔들릴까 걱정돼 일부러 괜찮은 척을 하며 훈련을 이어간다고 했다.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올 하반기 전국체전과 대통령기 실업농구대회를 앞두고 있다. 특히 전국체전은 서대문구청이 아닌 서울시 대표 자격으로 출전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만큼 전국 대회에서도 이들의 활약을 기대하는 시선이 많다.
박 감독은 "지금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코트 위에서 보여주는 거니까요"라고 했다.
현재 서대문구청은 구의회에 농구단 운영비가 포함된 추경 예산안을 다시 제출한 상태다. 이번엔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농구단 막내인 김 선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래도 연습은 계속하고 경기에선 더 잘하려고 해요. 결국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농구뿐이니까요. 다만 지금도 연승 이어가며 리그 우승도 하고 있어서 뭘 더 보여주면 좋을 지는 막막하네요"

김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