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업계도 '고양이 방울' 못 달아 … 눈치만 보는 '천수답'보스턴컨설팅 보고서 산업부 제출 불구 조기 정권교체 영향 논의 못해설비 구조조정은 곧 인력 감축 … 노동 친화 이재명 정부 쉽지 않아산업용 전기 인하 어렵고, 특정 업종 공정거래법 특례 요청도 부담통합시 사실상 '폭탄 떠안기' … 혹시 올 '알래스카의 여름' 기대감도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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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이미지는 ChatGPT(OpenAI)의 이미지 생성 기능을 통해 제작됐습니다.
2024년 국내 100대 기업 생산액 기준 IT·전자(370조원)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석유화학산업(312조원. 자동차 303조원, 건설 123조원 순)의 구조 개편이라는 배가 결국 '산'으로 가는 모양새다.
업계 자율에 맡기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서로 셈법만 복잡해진다. 정유사가 보유하고 있거나 자체 업스트림(CFU. 초경질원유 정제 설비)을 갖춘 NCC 업체의 경우 강 건너 불구경이다. 특히 업스트림 설비를 갖추지 못해 원료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한 업체와의 설비통합은 언젠가 터질 '폭탄 떠안기'에 불과해 자율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적극 나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최적의 구조 개편을 위해서는 업체 간 정보 공유가 절실하지만, 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면 공정거래법상 공동행위 위반(담합) 리스크가 크다. 이재명 대통령의 전라남도 방문 당시 여수 석화 업계 대표들과 대화가 이뤄졌지만, 전기요금과 관련해서는 '불가능하다'는 답을, 공정거래법 특례 적용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모든 정책이 그렇듯 지금은 맞고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정부도, 업계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누가 어떤 식으로 방울을 달지에 대해서는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게다가 설비통합이나 구조조정은 반드시 인력 감축을 수반하지만, '노동 친화'를 강조하는 李 정부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만큼 단순 고용 창출은 적지만 전후방 고용 유발 인원은 40만여명(고무 및 플라스틱제조업종 21만3000명, 기타 화학 제품 제조업 17만명, 화학섬유 제조업 1만2000명, 석유정제업종 1만1000명)에 달한다. NCC(나프타크레킹센터) 구조조정이 화학 산업 생태계 전반은 물론, 지역경제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폭탄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에 의뢰한 용역보고서가 이미 지난 3월 산업부에 제출됐지만, 아직 정부의 구체적 실행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달 초 국회 국회미래산업포럼에서 '석유화학 구조조정을 통한 산업재편'을 주제로 한 포럼을 열고 의견을 공유한 게 전부다.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제출된 보고서가 '봉인됐다', '내용 관련 함구령이 내려졌다', '업계와 정부 제출 자료가 서로 다르다', '포럼에서 공개된 일부 내용은 그동안 나왔던 것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전 정권에서 추진된 만큼, 새로 출범한 李 정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등 말만 무성하다.
앞서 李 대통령은 '석유화학산업 관련 특별법 제정'은 물론, 여수화학산업 단지를 '친환경 스페셜티 화학 산업 거점'으로 개편하겠다고 후보 시절부터 공약한 바 있다. 정부 역시 지난해 석유화학 사업재편 지원책은 물론, 올 상반기 후속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었지만, 탄핵 정국 이후 동력이 약화됐다. 이미 1년이 한참 넘는 소중한 시간을, 또 마지막 골든타임일지 모르는 시간을 날려 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와 기업이 어떠한 대책을 내놓더라도 글로벌 시장은 이미 일개 대한민국의 움직임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상 '돌파구'가 없다.
석유화학산업의 불황은 명확하다. 설비 확충과 증설로 공급은 많은데, 수요가 좀처럼 따라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선 중국(세계 최대 소비국)과 가깝다는 이점 하나로 '규모의 경제' 실현을 통해 수익을 내왔던 한국 석화산업이 중국의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시장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실제 2023년 기준 에틸렌, 폴리프로필렌, 에틸렌글리콜 등 중국의 주요 석유화학제품 자급률은 100%를 달성했으며, 잉여물량에 대한 수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러-우 전쟁으로 제재받는 러시아산 원유가 싼값에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는 상황까지 겹쳤다.
또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전기자 확산 등의 영향으로 석유제품 수요 감소에 대응, 석유화학산업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 실제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S-OIL)이 9조원이 넘는 거액을 투입해 추진하는 '샤힌프로젝트'는 기존 '정유사→석유화학사'로 이어지는 공급망을 파괴, 원유에서 바로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뽑아낸다. 기존 NCC를 통해 생산하는 에틸렌 가격 대비 1/3 수준에 그친다. 이번 국회 첫 포럼에서 에쓰-오일의 샤힌프로젝트가 공멸의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기술 혁신을 통해 시장에 값싼 제품이 쏟아지는데... 이를 앞두고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는 것 자체가 경쟁법 상 공동행위 위반 '담합'일 수 있다.
아울러 전세계 나라와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의 움직임 역시 큰 위협이다. 이미 석유산업의 부활은 물론 셰일가스를 기반으로 하는 ECC(에탄크레커) 설비로 에틸렌에 있어서 세계 최저 수준의 원가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배럴당 70달러 국제유가 기준, 한국의 NCC 기반 에틸렌 생산 단가는 t당 750~790달러, 중국은 680~710달러지만 미국 ECC는 350달러다.
우리나라 석화산업은 한 때 반도체보다 큰 수출액을 기록하며 경제성장의 큰 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만들면 팔리던 시기에 앞뒤 따지지 않은 신증설 경쟁은 이제 부담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특히 매년 정기보수와 2~3년만에 이뤄지는 대보수 진행 과정에서 디보틀네킹(Debottlenecking. 설비개선)과 리뱀핑(revamping. 설비 교체)을 통해 최대 10~15%까지 매번 생산량을 정부 몰래 늘려왔던 것도 문제다. 사실상 증설 수준인데도 산업부에 생산량 증가 신고하지 않았고, 정부 역시 뒷짐을 지고 바라보기만 했다. 작금의 석화산업 위기에 있어 업계와 정부가 공범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국내 9대 석화업체 중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곳은 정유 4사와 직간접적 연결 고리가 없는 LG화학, 롯데케미칼(여수공장), 대한유화다. LG화학이 쿠웨이트에 매각을 추진 중이지만 지지부진한 여수 NO.2 NCC의 경우 GS칼텍스가 경계를 넘어 NCC 투자에 나설 때 협상을 했어야 했다.
과거 우리나라 석화기업의 신증설은 일본 석화 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일본은 NCC 규모를 절반 가까이 줄이고 스페셜티(고부가제품)로 눈을 돌렸다. 지금도 240만t 규모의 추가 설비 감축을 추진 중이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이다.
현재 상황이 지속되면 3년 뒤 50%의 석화기업이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은, 3년 내 50% 이상의 생산량을 줄여야 한다는 뜻과 같다. 팔리지도 않는 설비를 가지고 깊은 고민을 필요가 없다. 어설픈 설비통합은 인수기업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는 것과 같다. 혹시나 올 '알래스카의 여름' 기대감에 서로 눈치만 보고 가동률 조정으로 버티기는 한계가 있다. 일본처럼 설비 폐쇄 등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최정엽 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