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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근간은 '합리적 선택'이다. 유한한 재화로 최대의 성과를 내는 선택의 연속이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실용'도 합리적인 경제인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경제를 이끄는 기업 경영 역시 합리적 판단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이다. 우리 기업들은 GDP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한 경제 불모지에서 공격적인 경영으로 여기까지 성장해 왔다.
다시 돌아와서 합리적 선택의 '합리성'은 누가 판단하나. 투자자 본인이 책임을 지고, 기업이라면 경영권을 가진 자가 좌우하는 영역이다. 경영 판단의 결과를 사회 공동체가 책임지지 않듯, 그 판단의 합리성을 타인이 판단하는 건 모순이다.
야당인 국민의힘 마저 전향적으로 돌아선 상법 개정안에는 기업 경영의 합리성을 사회 공동체가 판단하겠다는 노골적인 '인민 재판'의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 물론 그 심리를 자극하는 건 정치고, 이득은 정치권만 보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상법 개정안 처리를 앞둔 민주당은 경제 6단체를 국회로 불러 마지막 들러리로 세웠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지막까지 고민해 달라"는 호소에 '선(先) 입법·후(後) 보완' 입장을 전달했다. 뻔히 보이는 문제를 언제 고치겠다는 건지, 어떻게 손을 보겠다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지난 정부 시절 거부권까지 요구했던 국민의힘 마저 돌아선 것을 두고 재계는 수심이 가득하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때, 현대차가 미국 조지아에 전기차 공장을 세울 때,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 ‘합리적 모험’이 있었기에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험 하나하나가 형사재판 대상이 되는 세상이 다가왔다. 기업 경영은 교도소 담장을 걷는 일이란 얘기는 더는 웃어 넘길 그들만의 한탄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기업인을 교도소 담장 위에 올려 놓고 있다. 매일매일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형국이다.
상법 개정안은 주식회사라는 자본주의 근간을 흔든다. 당연히 글로벌 스탠다드에 위배되는 법이 시행되면 외국 투자 기업들도 한국을 떠나는 걸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되면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까지 고소할 수 있는 구조가 돼 외국계 기업들도 직접적인 소송 리스크를 질 수 밖에 없다. 미국상공회의소(AmCham)가 "한국은 글로벌 경영환경과 거꾸로 가고 있다"며 공식 입장을 낸 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기 위한 당근으로 노란봉투법은 미루고, 배임죄를 완화·폐지하기로 한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선뜻 진위를 믿기 어렵다. 상법을 개정한다면 반드시 배임죄 폐지도 병행하는 게 맞는다. 기업 경영의 합리성을 사정 당국이 판단하는 것은 모순이다.
나중으로 미룰 일이 아니다. 미국은 애초 배임죄 자체가 없고, 독일과 일본도 ‘고의성’이 명백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반면 한국은 배임죄로 기업인을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합리적인 실용은 누구를 위한 경제정책인지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과거 어떤 정부는 '사람'을 앞세웠지만, 결국 '내 사람'만 챙기는 정책이었고, 또 어떤 정부는 공정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모두에게 공정하지 못했다. 새 정부가 임기 초반부터 거대 여당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법안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들만의 이익'을 탐하는 정치 논리를 합리이고 실용이라 우기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안종현 산업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