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필연’보다 ‘우연의 연속 드라마’란 말이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면 그 말이 실감을 더한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 우연한 만남의 ‘고리’가 공산주의였기에 더욱 역사적 아이러니가 드라마틱하다. 

    이승만이 ‘박정희’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2개월 뒤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나고 얼마 후이다. 국군 속에 들끓던 공산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하면서 ‘숙군’(肅軍)을 진행할 때, 심복 김창룡(金昌龍)으로부터 ‘박정희는 유능하니 살려주자‘는 건의를 받고서였다. 백선엽(白善燁) 장군까지 공식 요청하자 이승만은 서슴없이 OK 했다. 소령 박정희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지만 부하들을 믿고 맡기는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이때 살아난 박정희가 뒷날 그렇게 큰 인물이 될 줄은 세 사람 아무도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 남로당 박정희를 살려주다

    여순반란사건은 제주4.3 폭동 직후에 일어났다. 건국 전야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 총선을 극력 막으라는 소련의 지령을 받은 평양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벌인 동족 집단학살극, 이를 진압하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명령을 받은 여수 국군14연대는 그날로 반란을 감행한다. 건국저지 폭동이 실해하자 기회를 노리던 남북공산당이 준비한 대한민국 파괴, 6.25의 예행연습이었다.  

    국군의 여수-순천 반란과 박정희=지령을 받은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池昌洙) 상사는 국군병사들을 선동하여 즉석에서 장교 20여명을 사살하고 여수를 점령하자, 순천지역 2개중대도 400여명을 학살하며 호응함으로써, 반란군은 광양, 벌교, 구례, 보성, 화순, 곡성 등지까지 전라남도 남부를 장악한다.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북한기를 날리며 ‘해방구’를 남원, 담양, 광주로 북상시키며 9일간 5천여명을 살해하였다. 

    육군본부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송호성(宋虎聲) 사령관 아래 작전-정보 팀은 정보국장 백선엽, 차장 김점곤(金點坤)이었는데 박정희는 군사참모였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해방 이듬해 대구폭동(10.1)에서 친형 박상희(朴相熙)가 경찰 에 사살된 사건이 계기였다. 여운형계의 좌익 박상희는 절친한 남로당 특수부책 이재복(李在福)이 총지휘하는 대구폭동에 협력하다가 숨졌다. 형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박정희에게 이재복은 ‘공산당 선언’등 책자를 주며 포섭했던 것이다. 그는 여순반란때는 무기담당 책임자다. 경북 영일출신 이재복은 일본 교토 동지사대학 신학부를 나와 평양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공산당에 투신, 이일도 등 6개의 이름을 쓰며 대한민국 전복에 나선 폭동 전문가였다.

    김창룡의 박정희 구명운동=미군정이 신생정부 대한민국에 인계해준 국군(국방경비대) 안에는 공산분자들이 득실거렸다. 공산당을 불법화한 미군정에 쫓긴 남로당 청년들이 군부대를 피난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건국전부터 이 문제에 분격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金昌龍) 대위에게 숙군 임무를 맡겼다. 만주 관동군 특무대에서 중국 공산당 잡는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소련의 게페우(GPU)에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38선을 넘어와 국군에 입대, 자신의 주특기를 살린 정보장교로 변신하여 ‘공산당 잡는 백두산 호랑이‘로 이름을 날렸다. 

    남로당 군사조직책 박정희 소령이 체포된 것은 그해 11월11일, 김창룡이 신당동집을 덮쳤을 때 박정희는 지하실에서 45구경 권총의 총 번호를 줄톱으로 뭉개고 있었다. 암상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권총을 빼앗고 결박, 집안을 수색하자 뜻밖에 박정희가 순순이 응하지 않는가. 

    “이보시오, 박소령. 썩은 사상을 버리고 자수하시오”

    김창룡은 진작부터 생각한 바를 제안하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57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특유의 서민적 성품과 묵직한 행동반경으로 후배들의 인망이 두터웠기에 주목하고 있던 김창룡이다.  

    “박소령은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과 군사부총책 이재복의 수하에서 공산당 조직을 상세하게 알고 있을 터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 직접 사람을 죽이거나 국군 물품을 빼돌린 적도 없소. 그러니 나를 믿고 함께 나라를 살립시다. 내가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오”

    김창룡의 설득에 박정희는 우선 남로당 조직계보 명단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경찰 정보와 일치했다. 이를 확인한 김창룡은 그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날부터 지하당원을 검거하는데 박정희를 대동한다. 박정희의 변심을 막으려는 작전이다. 그렇게 열 번을 되풀이 하니 박정희는 남로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김창룡은 마지막으로 백선엽에게 “조사관들이 전부 찬동하니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건의한다. 

    “그래요? 그럼 그들 서명을 모두 받아오시오” 서명을 학보한 백선엽은 박정희를 데려오라고 했다. 양팔을 결박당한 박정희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포승줄을 풀어주자 잠시후 박정희가 엎어지며 입을 열었다.

    “제가 원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잖습니까. 국장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한 번만...부디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이대인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기파랑, 2011) 

    ◉이승만과 김창룡=그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신임국방장관에게 “유능한 대공수사관을 구해보라”고 지시한다. 신성모는 한창 간첩잡기로 날리는 김창룡을 경무대로 데려가 대통령에게 보였다. 김창룡의 관동군 대공공작 경력과 박정희 구명에 대한 건의까지 설명을 들은 이승만의 얼굴이 환해진다.

    “암, 그래야지. 내가 귀관을 보고싶어 한 점이 바로 그 점이야. 이 나라는 반공이 아니면 희망이 없어. 나에게는 귀관 같은 젊고 멸공에 용맹스런 인재가 필요해. 당신은 믿음이 가는구먼. 신 장관, 김창룡 대위를 힘껏 도우시오. 그리고 내가 수시로 불러 대통령의 책무를 함께 완수하도록 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첫 만남으로 대통령과 젊은 장교가 나이와 지위를 떠나 ’멸공‘(滅共)이란 원점에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김창룡은 격주로 이승만을 찾아가 ’대통령 독대(獨對)‘의 특전을 누리며 공산당 잡기에 헌신한다. 이승만도 수시로 김창룡을 불러 별도 정보통으로 활용한다. 반공만이 아니라 갑자기 비대해지는 군부의 통제와 확산되는 부정부패 감시 및 미국의 내정간섭 등 특수 정보관리로 확대되어 갔다. 

    “유일한 구명자”=여순반란사건으로 1948년12월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군법회의가 남산자락(현 퍼시픽 호텔자리)에 설치되었다. 1949년 2월17일 법정에는 이재복을 비롯, 박정희 등 73명의 남로당 죄수들이 가득 앉아 재판을 받는다. 검찰에서는 이재복과 함께 박정희도 사형을 구형했다. 여러날 이어진 군사재판에서 박정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최종심에서는 마침내 ’형집행정지‘ 처분과 동시에 불명예제대로 마무리된다.

    죽음의 지옥 문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정희! 

    김창룡과 백선엽,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똑똑한 공산당 청년장교”를 살려주어 ’반공‘에 써먹자는 결단을 내린 덕분이었다.

    이 조그만 결단은 뒷날 거대한 역사의 인물을 만든 ’순간의 역사적 선택‘이 되었다. 

    작은 키에 빈약한 체구,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빛만 형형한 총각 장교, 그러나 그가 3년 뒤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쿠데타의 유혹에 빠져들 줄이야!
    ▲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장군의 악수. 1955년 11월 이승만이 3군사령부의 군사훈련을 참관하였을때 면담 격려한 군군장성들, 박정희는 제5사단장이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박정희의 ’쿠데타 연습‘ 해프닝

    6.25전쟁이 한창인 피난 수도 부산 1952년 6월 초여름 밤, 부민동 소재 미국대사관에 한국군장성의 검은 지프차가 소리없이 나타났다. 이승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부산 정치파동때, 미국이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음모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알아서 움직였다‘던‘ 이야기이다. 연재 84회에서 소개한 내용중 요점만 더 설명해 보자.  

    이종찬의 쿠데타 음모=1952년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鍾贊:1916~1983)의 쿠데타 음모에 관한 진상은 미국대사 무초와 대리대사 라이트너의 회고담이나, 장면 총리 비서실장 선우종원의 회고록과, [월간조선](1988년 6월호) 등에서 드러나 있으며, 6.25전쟁과 한미관계를 분석한 연구자들의 저술에도 꼭 나온다. 라이트너의 증언은 이러하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종찬)이 지프차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관사(官舍)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참모총장들의 의견도 종합하여 말한다고 했다. 그는 국군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후방이 이렇게 혼란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면서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수의 군인들과 해병대를 동원하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자택 연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혈(流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구속된 40~50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숨어 있는 의원들을 나오게 하여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대가 정권을 장악할 의사는 없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군대를 즉각 물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국의 육군은 유엔군의 지휘를 받고 있으므로 행동하기 전에 미국 정부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 정부는 못 본 척하겠다‘는 말을 나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미국의 개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즉각 워싱턴에 전보를 쳐 이 제안을 수락해 줄 것을 권고했다. 한국에 있던 유엔위원회에도 이를 알렸다. 그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유엔위원회의 호주 대표 프림솔 경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다른 대표들과 상의했을 것이다. 나의 참모들도 이것은 좋은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Oral History Interview with Lightner by Richard McKinzie, Oct. 1973. Truaman Library)

    선우종원은 육본 작전교육국장 이용문(李龍文:1916~1953, 평양출생)이 찾아와 이승만을 측츨할 쿠데타를 제의한 일이 있다고 회고록에 썼는데 이것도 이승만의 계엄령선포 이전의 일이다. 그때 이용문이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양해도 받았으니 이승만은 없애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선우종원 회고록 [격랑80년] 인물연구소, 1998). 과연 밴플리트가 그랬는지 여부는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었다. 

    육군내 평안도 흥사단 인맥의 중심인물이 이용문이오, 장면도 그 측근 선우종원도 평안도 출신이다. 이들이 언제부터 미국 측과 공모했는지는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참에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자”는 목적에 벌써부터 의기투합한 관계였다.

    이들이 쿠데타에 끌린 것은 국군의 전작권을 가진 미군에 대한 신뢰, 이승만을 믿고 활개치는 원용덕에 대한 반감과 개인적인 불만이 더 컸던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성모 국방장관때 정보국장 이용문은 ‘명령불복종’으로 좌천된 일도 있고, 정보비 유용 혐의로 구속까지 되다 보니, 측근 차장 고정훈에게 분통을 터트리곤 했다. “이게 군대야? 청년단이지...이렇게 썩어가지고 공산군과 싸운다고? 언젠가 반드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두고 보라니까...” (고정훈 [촛불처럼 비누처럼] 예지사, 1981)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친밀한 밴플리트 장군에게 툭 터놓고 말한다. 

    “군부내 흥사단 세력이 적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 이종찬 참모총장을 갈아야겠다”

    육본의 반역이란 대통령이 요청한 군부대 부산 파견을 “정치 중립‘을 핑계로 거부한 일, 내통한 적은 공산당이 아니라 미국이다. 이승만은 부산시내 원용덕의 헌병사령부 병력만으로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몰려있었다.

    ◉육본 심야회의 박정희=통수권자의 말을 안듣는 육참총장 등 일당에게 이승만은 ”포살해야 알겠느냐“며 격노한다. 이에 놀란 유재흥 참모차장이 육본 심야회의에 달려갔다. 그 시간 이종찬 총장과 이용문 국장은 참석하지 않았고 박정희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흑판에 박정희가 작성한 ’국군의 정치 중립‘ 선언문이 써있고 ”출동이냐 아니냐“를 두고 격론을 벌이던 장교들은 유재흥을 보자 가부간 결정을 요청한다. 유재흥은 흑판을 가리키며 잘라 말했다. ”우리 군은 어디까지나 중립이다“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박정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고한다. 

    미군을 믿고 ’정치중립‘을 내세웠지만, 전쟁 중에 대통령을 몰아내는 쿠데타가 그리 쉬운 일인가. 이것으로 박정희는 위기에 처한 생명의 은인 이승만 대통령을 구해준 셈이 되었다. 상사 이용문의 쿠데타 반기에 끌려들었던 박정희는 이날 밤으로써 ’쿠데타 연습‘을 마무리한 것이다. 왜 ’연습‘인가? 역사의 아이러니! 이때 미국의 ‘장면 옹립’ 쿠데타 음모에 발을 담갔던 박정희가 9년 뒤에는 5.16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축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 한강을 건넌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 직후 시청앞에서. 박정희 오른쪽 박종규, 왼쪽에 차지철.

    ◆이승만의 후계자는? 역사의 정답=박정희였다!!

    인간 이승만은 자식 복이 없었다. 6대 독자로 태어나 일찍 결혼하여 7대독자를 얻었으나, 미국 유학중 데려간 아들을 전염병에 잃고 말았다. 늘그막에 양자를 물색하다가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입양한다. 하지만 3년만에 4.19 폭발, 이강석이 부모와 함께 자살한다.

    이승만에겐 정치적 후계자도 없었다. 자연스레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이기붕도 양자도 동시에 사라졌다. 영웅의 그늘엔 후계자가 자랄 땅이 없다던가, 

    사실은 이승만이 너무 높고 커서 후계군(群)에 들만한 인물들이 부족했다. 묘하게도 야당 대통령 후보들조차 선거에 출마하면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아들 또래 정치인들은 고작 ‘부통령 자리’ 쟁탈전을 벌이다가 나라까지 망쳤다.

    이승만 하야후 집권한 민주당은 어떤가. 숙원이던 ‘내각책임제’를 해보지만 구파-신파 파벌싸움에 침몰하여 데모 천국, 좌익 소동에 허덕이다가 집권 9개월만에 군사쿠데타를 부르고 말았다. 당시 국민이 애타게 원했고 민주당 구파도 요구했던 ‘강력한 지도력’을 유약한 장면은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윤보선기념사업회, 2012)

    ‘후계자’ 없는 이승만...뜻밖의 ‘국가적 후계자’ 등장

    가정적 후계자도 없고 정치적 후계자도 못 만든 채 눈 감은 이승만에게 ‘국가적 후계자’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승만이 하야한지 1년 만에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감행, 정치적 국가이념과 경제적 사명에서 이승만이 남긴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군부세력이다. 

    ”반공 국시‘와 ’민생고 해결‘을 ’혁명공약‘으로 들고 나온 육군소장 박정희, 민주당 대통령 윤보선조차 “올 것이 왔다”며 군사반란의 ’진압‘을 포기한다. 이승만을 저주하고 민주당을 찬양하던 [사상계] 주간 장준하조차 “진짜 혁명이 일어났다”며 쌍수로 환영했다. “4.19혁명정신을 실천해야 할 민주당이 자유당보다 더한 권력쟁탈과 부정부패에 시간만 낭비했기 때문이다” (장준하 [사상계] 1961년 6훨호 권두언).

    사실 박정희는 1960년 1월부터 쿠데타를 은밀하게 준비했지만,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말미암아 학생 조직이 궐기함으로써 선수를 빼앗기자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의 ’독재‘를 규탄하던 민주당이 소원했던 내각책임제는 “한국에 안맞는 정치”라던 이승만의 주장을 민주당 스스로 입증하는 결과로 파탄나고 말았다.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조직도 계획도 추진못하는 ’무능=불능‘으로 주저앉아버리고 사회전반에서 분출하는 대중의 욕구에 속수무책이다. 더구나 조봉암이후 숨었던 좌익 혁신세력이 ’평화통일‘ 깃발로 학생들의 혁명열기를 부채질하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는 집회가 밤낮으로 이어지던 5월13일까지도 “우왕좌왕 좌고우면”의 방관자가 민주당이다.  

    그 사흘 후 5월16일 새벽, 마침내 3,600명의 육해공군이 한강 다리를 건넜다. 전국민이 대환영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강력한 국가 지도력‘이 드디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덤 속의 이승만도 박수를 쳤을 것이다. 박정희 그가 이승만이 미처 못다 이룬 부자나라를 만들어 줄 자신의 ’국가적 후계자‘임을 선각자의 눈이 몰라볼 수 있겠는가. 
    ▲ 1965년 6월22일 한일국교정상화 협정 조인 기사.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하와이 이승만 전대통령의 귀국을 거부한 직후였다. ⓒ조선DB

    ◆이승만, 박정희 구제 여러번...역사의 손이 대한민국 구하다

    신(神)의 역사(歷史)가 역사(役使)하는 대한민국의 역사 발전! 여순반란사건에서 박정희의 목숨을 살려준 이승만이 그후 계속 ’유능한 인재‘를 구해준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1953년 휴전후 11월25일 ’장군 진급‘때 “공산당 출신은 장성시키면 안된다”는 만류를 뿌리치고 이승만은 박정희 어깨에 ’별‘을 달아준다. ★다음달 12월말 장교단 미국 유학때,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박정희를 선발한다. 겸무대로 장교단이 인사왔을 때 이승만은 손수 장학금 150달러를 쥐어주며 격려하였다. ★유학후 돌아온 박정희를 광주 육군포병학교 교장으로 임용하고, 1955년 6월엔 강원도 인제 소재 제5사단 사단장으로 임명하여 최전방 국방을 맡겼다.

    ’역사‘에도 ’눈‘이 있는가. 이승만의 눈이 10년 앞을 내다본 역사의 눈이다. 

    당시엔 이승만 자신도 몰랐겠지만 “회개한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승만에게 그 보답은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 1978년11월7일 창설한 한미연합사령부 마크, 오른쪽 사진은 창설45주년 기념식에서 케이크를 자르는 한미장성들. 한미연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카터 미대통령을 설득하여 조직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동맹에서 확보 못한 '유사시 주한미군 자동개입'을 박정희가 실현한 것이다.

    ◆박정희 쿠데타...이승만의 엄청난 유산을 받다

    박정희가 민주당으로부터 빼앗은 나라는 민주당 정권이 망쳐놓은 나라였다. 

    휴전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성장률이 1957년 8.7%, 1958년 7.9%로 이때 전후복구는 완성되었고 경제발전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장면 정부가 1960년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다. 하지만 때마침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이 ’차관‘ 중심으로 변하면서 대한원조도 급감하여 1959년 성장률은 2.1%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장면 정권은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으나 이를 돌파할 정책 창조력과 추진력이 결여됨으로써 실업자 사태 등 국가 혼란을 자초한 결과가 박정희의 쿠데타였던 것이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0)

    게다가 장면은 집권 즉시 그해 8월27일 난데없이 국군 10만명 감축부터 발표하였다. 군인들을 즉각 반발한다. 장성들의 부패상에 불만이 폭탄인데 진급마저 정체되고 대우도 형편없는 터에 ’감군‘이라니 대량 실업자가 될 판이다. 불붙은데 휘발유 뿌린 장면, 분격한 장교들은 쿠데타를 벼르는 박정희에게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이석재 회고록).

    이승만이 물려준 유산들...“박정희는 복도 많다”

    갑자기 박정희 정권이 떠안은 ’이승만의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것이었다.

    *자유민주공화국=고종이 일본에게 넘겨준 나라를 다시 찾아 민족사 5천년 최초의 자유민주체제를 만들어주고, 집권12년간 줄기찬 민주주의 교육을 통하여 현대적 ’국민국가‘를 창조해낸 이승만이다. 비록 분단국가이지만 남쪽의 힘을 길러 북쪽 공산체제를 통합할 군사대국이다. .

    **똑똑한 국민 파워=이승만이 의무교육으로 키워낸 3천만 국민들, 그 가운데 특히 두 개의 조직군이 탄생하였다. 부정선거를 보자 궐기한 100만 학도는 이승만도 하야시킨 싱싱한 민주화 세력이고, 또 하나는 미국식 민주군대로 무장한 70만 국군이었다. 여기에 이승만이 집중투자한 유학생 2만여명과, 전후 경제부흥을 위해 실전투쟁한 관료 테크노크라트 및 기술인력이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미동맹=박정희가 물려받은 중에 가장 귀중한 유산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 미군이다. 

    북으로 공산침략을 막고 남으로 일본의 재침을 차단한 한미동맹, 대한민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이란 평가대로 세계 최강국 미국과 유엔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야망도 물거품이다. 

    ****농지개혁과 경제기반 시설=5천년 농노와 같았던 농민들에게 농지개혁으로 경제적 자유권을 부여, 농민해방=인간복원을 통하여 국가의식과 국민정체성을 비로소 확보한 일이다. 게다가 미국과 싸우며 원조자금으로 건설을 강행한 산업철도, 발전소, 중화학공장 등 산업기반이 어느 정도 조성되어 있고, 이승만만이 가능했던 미국의 대규모 대한원조 체제를 구축해놓은 것이다. 특히 농지개혁이 없었다면 뒷날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자유당-민주당 정권의 부패 무능을 타도한 박정희는 참으로 ’복‘도 많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가꿔놓은 엄청난 유산을 토대로 매진하여 세계적 신화 ’신생국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박정희만의 ’복‘이겠는가. 대한민국 국민의 ’복‘이 아니랴.
    ▲ 광화문에 세운 수출 100억 달러 기념탑, 유신선포 5년째 박정희가 총력을 기울인 '수출입국'드라이브로 1977년 12월22일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는 이승만 의 '무역입국'의 꿈을 박정희가 풀어준 것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축복--한 세대에 두 영웅 ’바톤 터치‘!

    동서의 역사가들은 신생 국가의 건국기(Nation-Building Period)를 약 30년, 한 세대(generation)로 잡는다고 한다. 건국 초기 30년간 국가 기반 건설에 실패하게 되면 그 나라는 그대로 허물어지고 만다는 가설을 실증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건국기는 언제인가. 이승만의 건국 1948년부터 계산하여 30년 되는 해는 1978년이다. 즉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는 1979년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부전자전(父傳子傳)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인가. 아니다. 혁명아들의 쌍두마차 그것이다.

    선배 혁명아 이승만은 자신만의 설계도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전략을 풀가동,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파워를 활용하여 Nation-Building의 전방위 과업을 성공시켰다.

    후배 혁명아 박정희는 일본군 출신답게 이승만의 ’반일‘ 프레임을 깨고 ’용일극일‘(用日克日)의 마스터플랜을 과감히 도입한다. 한일국교정상화 강행--’친일굴욕‘이란 국민적 저항을 무릅쓴 박정희는 그 “일본을 이용하여 일본을 이기는 전략”의 성공을 위해 “내무덤에 침을 뱉아라” 외치며 일본자본-기술력을 흡수, 중화학공업 중흥과 ’자주국방‘ 숙원도 풀어내는 선진경제기반 조성에 생명을 내던진 것, 조국 근대화의 제단에 순교한 것이었다. 
    ▲ 원자력의 유산--84세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7월14일 원자로를 설치할 원자력연구소 건립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9월26일(서거1년전) 충남서산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지대지 미사일 '백곰'의 시험발사를 지켜보는 장면. '백곰'의 사거리는 평양에 맞춘 180킬로미터. 오늘의 원전수출과 방산수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한(恨)을 풀어준 박정희, 대한민국의 한을 풀다

    청년 이승만의 꿈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자유통상 '무역입국론'을 [독립정신]에서 주장한대로 건국이후 12년간 미국과 공산당과 싸우며 분투했건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야했다. 그 한을 풀어준 것이 놀랍게도 공산당 출신 대통령 박정희의 ’수출입국‘ 그것이었다. 

    [건국과 부국](建國과 富國)--요절한 엘리트 정치학자 김일영(성균관대 교수)가 쓰고 붙인 책 이름이다.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박정희 부국대통령의 공로를 한마디로 규정한 기가 막힌 역사의 정의--건국혁명에 이은 부국혁명! 그것도 단 1년 간격으로 집권한 두 혁명아의 대한민국 만들기, 건국기 30년 한세대에 나타나 한시대를 뜻대로 누비며 선진극으로 이끈 두 영웅의 바톤 터치‘(Baton-Touch=Baton-Pass)야 말로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독재자들이라고?’ 따지자면 박정희 ‘유신 헌법’은 독재체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유신독재’ 7년이 없었던들 인류사의 기적 대한민국의 신화가 가능했겠는가.

    이승만은 건국선포부터 “독재배격‘을 외쳤고 통치기간 ”미국보다 나은 민주주의“ 실현에 몸부림을 친 것은 역사기록이 증명한다. 무슨 독재자가 국민이 나가란다고 제발로 걸어 나가는가? 

    학자들의 규명대로 이승만 통치는 어린 국민을 ’민주국민‘으로 키우려는 사명감에 몸부림친 선구자적 권위주의였기에 ’못 따라가는 사람들‘이 독재자라 발목 잡았다는 분석이 정확하다. 

    보라, 지금 대한민국에서야말로 이승만-박정희 같은 ’강력한 민주적 지도자‘의 재림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또 다시 드높다. 이것이 과연 독재에 대한 향수라 할 것인가?

    이승만은 29세때 쓴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말한다. “모든 정치체제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감사하라! 찬양하라! 건국기 30년 간에 선진국 기틀을 만들어낸 두 영웅에게 경배하라!

    이것은 개인숭배가 아니다. 대한민국 '기적의 모델'은 세계가 영구히 보존-벤치마킹 해야 할 인간혁명의 기념비, 다시 없는 인류사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되풀이 하거니와, 100년에 한명 나올까말까한 세기적 영웅이 두 명이나 한꺼번에 등장한 것은 역사의 선물, 신의 섭리, 아니 '하나님의 특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화무쌍한 시대적 사명을 알지 못하는 오합지졸의 신사대주의 시대, 다시 도진 ’친중반미‘ 용공놀음을 경계하라! 이승만이 목숨 걸고 세우고 박정희가 생명 바쳐 키운 ’선진 대한민국‘을 민족의 천적들에게 팔아넘길 것인가?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서둘러야한다. 박정희 기념관과 함께, 건국정신, 호국정신, 자유정신, 부국정신, 통일정신, 평화정신을 세계와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대한민국 역사교육 센터로 활용해야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모르는 국민을 대한민국 수호국민으로 거듭니게 무장시켜야 한다. 국가의 정통성과 국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자유도 국가도 떠내려간다. 공산대륙의 시진핑과 패권주의 트럼프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긴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으랴.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고품질 자유민주공화국을 우리 손으로 갈고 닦아 영원한 '인류의 교과서'로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세계문명-인류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대한민국의 의무이다.
인보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