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증원 본회의 처리 코앞 일단 정지"여당 손대려는 대법원, 법치 최후 보루 ""업무 과중? 급격 증원 땐 재판 더 늦어져""사법 역량 대법원 쏠려 … 1·2심 더 시급""여당서만 16명 증원, 최고법원 위상 흔들"
-
-
- ▲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5월 1일 오후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정원을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 처리가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일시 정지됐다.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시간이 대법원 최후의 균형을 지켜낼 마지막 방어선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법관 증원은 '상고심 심리 충실화'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법조계에서는 단순 증원만으로는 근본적 문제 해결이 어렵고 오히려 재판 지연, 최고법원으로서의 위상 훼손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특히 여당 주도로 급격히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법관 구성이 특정 정파에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논란을 키우고 있다.
여야 이견으로 지난 12일 본회의 일정이 연기된 가운데 법조계는 "지금이야말로 신중하게 재검토할 마지막 기회"라며 정치적 중립성과 사법부 독립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 ▲ 지난 5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제1차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박범계 위원장이 회의를 개의하고 있다. ⓒ뉴시스
◆ "대법관 업무 과중, 증원만이 답 아냐 … 오히려 재판 지연 우려"
대선 직후인 지난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대법관 정원을 3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법 공포 후 1년 차부터 매년 4명씩 4년에 걸쳐 총 16명을 단계적으로 증원하는 방식이다.
대법관 업무가 과중해 상고심 심리가 충실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개정안 의결의 주된 이유였다. 매년 4만 건 안팎의 상고 사건이 접수되고 대법관 1인당 약 3600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있어 사실상 모든 사건을 충분히 심리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상고 사건의 70% 이상이 별도의 심리 없이 기각되는 '심리불속행'으로 종결돼 당사자들은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단순 증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전원합의체 운영 방안 없이 대법관 수만 늘릴 경우 오히려 재판 지연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논의되는 개정안대로 대법관이 급격히 증원되면 전원합의체 회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져 재판 지연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증원이 필요하다면 한 정부당 4명 정도씩 점진적으로 늘려가되 전원합의체 운영 방안부터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신임 대법관 임명 절차 자체가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우려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실제 인사청문회나 대통령 임명 절차가 정치적 사정으로 지연되는 경우가 반복됐다"며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잦은 청문회와 임명 지연 등으로 인한 혼란과 재판 공백이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 ▲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5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위해 입정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법 역량 대법원 집중, 적절치 않아 … 하급심 강화 먼저"
대법관 정원을 늘릴 경우 사법 역량이 대법원에 과도하게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기준으로 대법관 1명이 증원되면 전속 재판연구관 2명, 비서관 1명, 실무관 3명, 비서 1명 등 최소 7명의 인력이 함께 증원된다. 대법관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사법 자원이 대법원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지난 12일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 실무를 이끌었던 김선수(64·사법연수원 17기) 전 대법관도 법률신문에 기고문을 올려 "대법원에 장관급인 대법관을 지나치게 많이 배치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인력 활용 방안인가 하는 점에서도 의문"이라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법조계 일선에서 의뢰인을 대면하는 변호사들도 분쟁을 재판으로 해결해야 하는 국민 입장에선 1심에서 재판 결과에 승복하고 분쟁을 종결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데 공감한다. 재판에 드는 사회적 비용과 사법 자원 효율 측면에서도 동일한 평가가 나온다. 이에 법조계에서는 하급심 법관 증원과 심리 충실화가 사법개혁의 선결 과제로 꼽힌다고 보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지낸 이헌 법무법인 홍익 변호사는 "그동안 하급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여전히 하급심 판사 인력이 부족해 문제가 되고 있다"며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보다 먼저 1심·2심 법관을 충실히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법관 증원은 국가 백년대계에 관한 사안인 만큼 충분한 논의와 공감대 속에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며 "이를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임기 내에 현 정원의 두 배까지 무리하게 늘리려는 접근은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
- ▲ 지난 5월 19일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중유세에서 방탄유리가 설치된 연단 위에서 지지호소를 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與 주도 대법관 증원, 사법 신뢰 크게 해칠 위험"
평범한 국민이 법정 문턱을 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1심과 2심을 거쳐 끝내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갔다면 그 재판은 인생의 중대한 고비이자 삶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일대사라 할 수 있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이 모든 권력과 개인 위에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법 앞의 평등, 권력 분립, 적법 절차 준수 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가 여기에 담긴다. 법은 공정한 규범으로서 기능해야 하고 권력 행사 역시 반드시 법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국민이 '법의 지배'를 체감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법원이 최종적 정의의 보루로서 신뢰받는 기관이어야 한다. 대법원의 위상은 국가 공동체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국민의 법 감정과 직결된다.
그동안 대법관 증원 방안이 여러 차례 추진됐으나 번번이 난항을 겪은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최고법원으로서의 대법원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이번 증원 과정에서는 대법관 임명 시기와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가 맞물리면서 정당성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최후의 정의를 기대하던 국민이 대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사회는 결국 범죄나 좌절로 내몰릴 위험이 커진다.
차 교수는 "대법관 16명 전체를 이재명 대통령이 모두 임명하겠다는 것은 퇴임 후 형사재판 절차를 대비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까지 불러올 수 있다"고 꼬집었다.
또 일각에서 이러한 정책 추진을 '국민의 뜻'으로 포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시기별 특정 여론에 의해 민주주의가 왜곡될 수 있다"며 "나치 독일 사례에서도 보듯 '국민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사법부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반드시 함께 실현돼야 하며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서는 구조는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박서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