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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2018년 2월 9일 오후 전용기를 통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김 부부장은 마중 나온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환담 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KTX 승차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고 대북확성기 방송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전임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6월 북한의 '오물·쓰레기 풍선' 살포에 대한 대응조치로 재개한 대북 심리전을 1년여 만에 다시 불능으로 만드는 결정을 내린 것인데,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가뜩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 이재명 대통령의 통화가 만 사흘이 지나서야 이뤄지고,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 사실을 대외에 알리지 않으면서 한미 관계에 대한 기류에 우려가 나오는 상황. 이런 터에 우리 정부의 북한에 대한 빠른 유화적 조치가 미국과의 관계를 외려 더 냉각시키지 않겠느냐는 걱정이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초반, 한미 관계 전반에 대한 기류를 점검해 본다.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 재소환된 '김여정 하명법' 논란
13일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대통령실은 전단 살포 금지 등의 조치가 남북 간 우발적 충돌 위험을 줄이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설명하면서 북한의 최근 도발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이른바 '김여정 하명법'으로 불린 대북전단 금지 조치를 연상케 한다. 국내외에서 표현의 자유와 북한 주민 알권리 침해 논란이 다시 불거진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정부와 의회, 탈북민이 제기한 경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른바 '김여정 하명법'은 2020년 말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개정된 '남북 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을 일컫는 별칭이다. 당시 김정은의 친동생인 김여정이 "쓰레기들의 광대놀음(대북전단 살포)을 저지시킬 법이라도 만들라"라고 압박하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신속히 법률 개정을 추진한 배경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법률 개정으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을 향해 전단을 날리거나 확성기 방송을 하는 행위가 전면 금지됐고 위반 시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 ▲ 미국 연방 국회의사당 외경. ⓒAP/뉴시스
◆美 정부 "북한 주민 알 권리 침해 우려"
2020년 12월 해당 법안 통과 직후 미 국무부는 "우리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며 "글로벌 차원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 수호를 지지한다"는 원칙을 표명했다. 이는 한국의 전단 금지 조치가 북한 주민에 대한 정보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우려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북한 내 인권 상황에 깊이 우려한다"며 "북한에 대한 정보 유입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북한 주민에게 외부 정보를 전달하는 노력이 한미 양국의 인권 증진 공통 가치에 부합한다고 판단, 대한민국 정부의 전단 차단 조치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꾸준히 내비쳐 왔다.
◆美 의회 "한국 민주주의 가치 훼손"
당시 미 의회도 초당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간사인 마이클 맥콜 의원(공화당)은 법안 통과 직후 성명을 통해 "수백만 북한 주민에게 가해지는 극악한 고립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맥콜 의원은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 민주 가치"라며 "한반도의 밝은 미래는 북한이 남한처럼 되는 데 달려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미 하원의 초당적 조직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크리스 스미스 의원은 2020년 12월 '김여정 하명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에 앞서 성명을 내고 "한국이 시민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형사 처벌하려는 제안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다"며 "비정상적"(insane)이라는 강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그러면서 "한국 민주당 의원들이 이 법안이 민주주의 원칙과 인권에 얼마나 해로운지 깨닫고 방향을 전환하기를 바란다. 만약 그들이 이 법을 통과시킨다면 미 국무부가 대한민국의 민주적 가치 헌신을 연례 인권보고서와 국제 종교 자유 보고서에서 비판적으로 재평가할 것을 촉구한다. 매우 안타깝게도 한국이 감시 대상 국가(watch list)에 올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스미스 의원은 2021년 한국의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 청문회에서도 "표현의 자유 침해는 국제인권규약(ICCPR) 위반"이라고 규정하며 해당 법안이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권 중 하나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외부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 ▲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오른쪽 두 번째) 및 공동 대회장 등 참석자들이 2022년 9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9회 북한자유주간 개막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시스
◆국제 북한인권 전문가들 "北 정권에 잘못된 신호 줄 것" 경고
미국의 대표적인 북한인권 운동가인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와 로버트 킹 전 미 북한인권특사 등 국제 인권사회도 일제히 우려를 표하면서 대북 정보 유입의 중요성과 표현의 자유 옹호를 강조했다.
숄티 대표는 대북전단 풍선을 "북한 주민을 위한 진실과 희망의 핵미사일"이라고 부르며 문재인 정부 시절 제정된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북한 정권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나는 북한 정권이 그 금지 조치를 이용해 김정은이 국제 무대에서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고 대한민국을 무릎 꿇게 만들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대북전단 금지가 북한 주민의 인권과 알 권리를 희생시켜 가면서 오히려 김정은 정권에 선전의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미 북한인권특사를 지낸 킹 전 특사는 2020년 12월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기고에서 한국이 김여정 담화에 성급히 응하는 "빠른 굴복"(quick capitulation)은 평양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남북 협상력만 약화할 뿐이라며 강한 경고 메시지를 나타냈다.
킹 전 특사는 "전단 살포를 금지해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킨다고 해도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결과로 한미 관계가 약화할 수 있는데, 이는 두 나라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킹 전 특사는 김여정의 탈북민에 대한 극도로 비난적인 발언과 대북 전단에 대한 과격한 반응 자체가 전단의 효과를 방증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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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 확성기 방송이 중단된 12일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우리군 초소 앞으로 대북 확성기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대북 전단·확성기 방송, 북한 체제에 왜 위협적인가
대북 전단과 확성기 방송은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북한 주민과 군인들에게 외부 세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사용해 온 대표적인 심리전 수단이다.
대북 전단은 한국의 발전상과 북한 정권의 인권 탄압, 김정은 일가의 비리 등 북한 내부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정보를 담은 '삐라' 형태로 북한으로 보내졌다.
주로 군사분계선(DMZ) 일대에서 이뤄지는 확성기 방송은 탈북민 증언, 한국의 경제·문화 발전상, 뉴스와 K팝 같은 문화 콘텐츠 등을 통해 북한군의 사기를 저하하고 주민들에게 북한 정권의 실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심리전 수단은 북한 정권의 민감한 반응을 유발하며 남북 관계의 긴장 지표로 간주돼 왔다. 실제로 북한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 시작된 확성기 심리전 방송을 중단시키고자 2004년 남북 회담에서 강하게 요구해 중단을 이끌어냈고,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상호 확성기 방송 중단에 합의했다.
김정일·김정은 정권이 그토록 전단과 방송 중단에 집착한 것은 이러한 외부 정보 유입이 북한 군인과 주민들의 내부 동요를 일으키고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오후 2시 군 당국에 선제적인 대북 확성기 방송 중지를 지시했다. 이번 조치는 이미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 "9·19 군사합의를 복원하고, 대북 전단과 오물풍선, 대북·대남 방송을 상호 중단해 접경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겠다"고 밝힌 공약의 일환이다.
통일부도 2023년 9월 헌법재판소가 대북전단금지법의 '표현의 자유 침해'를 지적한 이후 시민단체의 전단 살포 문제에 신중히 접근해 왔다. 그러나 최근 대통령실과의 정책 교감에 따라 적극적으로 전단 살포 중단을 요청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꿨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9일 브리핑에서 "지난 2일 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가 통일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27일, 5월 8일에 이어 세 번째로 전단을 살포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이는 한반도 상황에 긴장을 조성하고 접경 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전단 살포 중지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 ▲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합참)을 방문해 영상회의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탈북민들 "삐라는 북한 주민 희망의 창"
정부의 방침과 달리 탈북민들과 국제 북한인권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대북 전단과 확성기 방송의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서 외부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평가다.
대북 전단을 읽고 북한의 실상을 알게 돼 탈북을 결심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90년대에 탈북한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990년 강원도 철원 북한지역에서 6·25 전쟁이 북침이 아닌 남침으로 발발됐다는 내용의 대북전단을 보고 탈북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배운 역사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체제 선전의 거짓을 인식하게 됐다. 탈북 후에도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전달하는 대북 풍선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군과 국가대표 귀순 이끈 대북 확성기 방송
2017년에는 최소 2명의 북한군 병사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듣고 귀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로 귀순한 한 북한군 병사는 합동신문에서 "남측 확성기 방송을 통해 탈북자들이 전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오래전부터 동경했고 그 때문에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2014년 황해남도 배천군에서 망명한 북한 4·25체육단 복싱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한설송 씨도 과거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삐라 내용이 남조선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전단 내용을 읽으면서 북한 정권의 교육에 의심을 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대북 전단의 정보가 김 씨 일가에 대한 세뇌 교육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충격이자 희망'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소리'(VOA) 보도에 따르면, 북한 공병 군단 출신 탈북 작가 엄영남 씨는 대북 확성기 방송은 북한 군인들이 "남한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하는 강력한 무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군인들이 신뢰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김정은을 안 믿고 남한을 더 선호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래서 넘어온 사람도 있다. 북한 정권 입장에선 심각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남북 군인들의 상황 등을 비교하는 유튜브 채널 '북시탈'을 운영하며 북한군 병사들의 실상을 담은 단편영화 '두 병사'를 제작한 정하늘 씨는 "북한 정부가 (확성기 방송을) 그렇게 강력하게 거부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엄청난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계속 지속적으로 쭉 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표현의 자유·한미 신뢰 놓고 시험대 오른 이재명표 대북정책
이재명 정부는 이번 조치가 남북 간 우발적 충돌 위험을 줄이고 북한의 보복성 소음방송에 따른 접경 지역 주민의 소음·불안 등 실질적 피해를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일부 접경 지역 주민들은 "조용한 일상을 되찾았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북한 주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와 한미동맹 신뢰를 동시에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재명 정부가 선택한 '북한 달래기'가 향후 남북 관계와 국제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