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주도로 대법관 현행 14명→30명 증원 법안소위 통과법원행정처장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사실상 마비"친정부 인사, 집권 세력의 독주 합법화 악순환 가능성"명분 있어도 숙의 거쳐 野와 합일점 모색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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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제1차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박범계 위원장이 회의를 개의하고 있다.ⓒ뉴시스
이재명 대통령 취임 첫날인 4일 더불어민주당이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법조계는 당혹감 속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선 전 무더기로 발의된 사법부 개혁 법안들이 취임과 동시에 본격적인 처리 단계에 돌입하면서 사법부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이 격화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자원부국이던 베네수엘라를 철저히 망가뜨린 독재자 차베스가 지난 2004년 20명이었던 대법관을 32명으로 늘리고 자신의 지지자로 빈 자리를 채워 장기 독재의 발판을 마련한 것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취임 첫날 대법관 증원법 통과시킨 민주…"전원합의체 사실상 마비"
4일 정치계에 따르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날 법안심사1소위를 열고 김용민·장경태 민주당 의원의 법안을 병합·심사한 '법원조직법 개정안 대안'을 여당 주도로 처리했다. 국민의힘은 "일방적 표결", "의회 독재"라고 반발하며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소위를 통과한 법안에는 대법관 수를 1년에 4명씩 4년 간 단계적으로 증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대법관 정원이 현재 14명인 점을 감안하면 최종적으로 '30명'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병합 심사 대상이었던 김 의원과 장 의원의 법안은 대법관 수를 각각 30명·10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는 민주당이 대선 승리를 발판으로 사법부 개편에 본격 착수했음을 시사한다. 대선 전 중도층 이탈을 우려해 신중했던 당의 행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민주당은 "대법관 1인당 연간 약 5000건을 처리해야 할 정도로 업무가 과중하다"고 주장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이 대통령의 선거법위반 파기환송 판결 직후 이런 법안이 쏟아진 것에 대해 의도가 뻔하다는 반응이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파기환송심 직후 이런 법안이 발의됐다는 것은 의도가 뻔하다"면서도 "대법관 수를 늘리면 개개인의 권한은 줄겠지만 그렇다고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볼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역시 대법관 증원이 상고심 체계를 크게 바꾸는 일이라는 점에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지난달 14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전원합의체가 사실상 마비돼 버리기 때문에 전합의 충실한 심리를 통한 권리구제 기능 또한 마비될 수밖에 없다"며 "치밀한 조사 없이 일률적으로 대법관 수만 증원하면 국민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란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 ▲ 이재명 대통령 내외와 우원식 국회의장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차베스, 대법관 20→32명 증원…마두로도 18년 장기 독재
법조계에서는 베네수엘라와 엘살바도르의 사례를 들면서 국회 다수 의석을 장악한 행정부가 입법권을 활용해 사법부까지 장악하고 사법부에 포진한 친정부 인사들이 판결로 집권 세력의 독재를 합법화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란 우려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미국식 양당제가 자리 잡으면서 중남미 민주주의 선도국으로 평가받던 베네수엘라가 중국·러시아·북한에 못지않은 독재국가로 변모한 데에는 '정권의 대법원 장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9년 집권한 군부 출신 좌파 지도자 우고 차베스는 집권 직후 국민투표를 통해 이른바 '제헌(헌법 제정) 의회'를 만들어 기존 국회를 무력화시켰다. 제헌의회에 입성한 친정부 인사들을 앞세워 '사법 개혁'이란 이름으로 기존 대법원을 무력화했다.
이미 여당이 다수를 차지한 국회가 대법관을 선출하도록 해서 친정부 인사로 대법원(공식명 '최고법원')을 채웠다. 2004년에는 대법관 수를 기존 20명에서 32명으로 12명 늘렸다. 늘어난 12명 전원은 정권 입맛에 맞는 대법관으로 뽑았다. 이후 9년간 대법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어떤 판결도 내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013년 차베스 전 대통령 사망 후 12년째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마두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올해 1월 6년 임기를 또다시 시작하면서 18년 장기 집권의 길을 닦아 놓은 상태다.
"제국주의 국가의 제재가 모든 경제난의 원인"이라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온 그는 극심한 반정부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동시에 입법부, 사법부, 선관위, 군, 경찰과 검찰 등 주요 집단 의사결정권자를 자신의 '충성파'로 채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마두로 철권통치'의 기반으로 여겨진다. 실제 베네수엘라 선관위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인기몰이를 하던 야권 주요 정치인들의 출마에 제동을 거는가 하면 대법원은 부정개표 논란을 일으킨 선관위 행정에 잘못이 없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흐름은 엘살바도르에서도 똑같은 양상으로 관찰된다. 강력한 갱단·부정부패 척결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부켈레 대통령은 헌법의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에도 지난해 대선에 출마, 85%대 득표율로 재선했다.
부켈레 대통령은 2021년 총선에서의 여권 압승을 발판으로 자기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당시 엘살바도르 국회는 여권 측 인사를 대법관으로 대거 추천한 데 이어 야권 성향의 검찰총장을 축출하면서 '정부 거수기' 역할을 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뿐만 아니라 대법원 헌법재판부는 '6개월 이상 대통령으로 재임한 사람은 10년 이내에 다시 출마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을 "임기 만료 6개월 전 휴직하면 재선은 가능하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려 부켈레 대통령에게 연임을 가능토록 했다.
법조계에서는 민주당이 여당의 지위를 가진 만큼, 이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법과 국가 시스템까지 무리하게 뜯어 고치려는 것을 자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 시스템에서 사법부가 최후의 보루인 만큼, 정당성과 명분을 갖춘 일이라면 호흡을 길게 갖고 야당과 숙의를 거쳐 합일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조계 한 인사는 "취임 첫날 대법관을 증원하는 법안을 처리하는 건 대통령이 되면 이미 시작된 재판을 안 받겠다고 하는 '이재명 무죄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과정"이라면서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하지만 대통령이 임명하는 만큼 '친여 성향' 대법원이 구성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송학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