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도 하고 산업화도 했어야 한다는 이재명고속도로 건설도 막은 민주화론자들괴 동일선상박정희에 맞선 김문수의 깨끗한 승복은 대단
  • ▲ 산업화 시작의 표상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드러누워 반대하는《선 민주화론》 추종자들. 당시 YS-DJ를 비롯한 야당 전부와 조중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은 우물안 개구리들이었다. ⓒ
    [편집자 주]
    이종권 전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최근 제자들에게 보내는 연작 서신을 본지에 기고했다. 70년대 80년대 강단에 섰던 대다수 교수들이 기본적으로 겪었던 학생들과의 갈등과 고민을 다뤘다. 

    학생들, 특히 이른바《민주화 운동권》학생들은 자신들의 투쟁에 교수들의 동참을 끊임 없이 요구했다. 그들에 동조한 교수들은 1987년 6월 26일 가두시위가 격화되던 와중에《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결성해 운동권과 보조를 맞췄다. 이런 움직임에 가담하지 않는 교수들은 이른바《어용교수》라 불리며 따돌림과 박해를 받았다. 




    민교협 이 생기기 전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념·철학과 다른 노선을 가진 교수들을《어용교수》라며 수강거부를 하거나, 심지어 교수연구실에 팻말을 달고 못을 박아 폐쇄하는 만행과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교수들이 이런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과의 이런 갈등은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겐  모두가 겪어야 할 홍역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희수(喜壽)에 달한 필자가 그런 시련 속에 제자들과 가졌던 치열한 논쟁을 회고하며 쓴 연재는《선 근대화(산업화) 후 민주화》《선 민주화 후 산업화, 또는 병행》중 어느 노선이 옳은 것이냐가 주제였다.

    당시 운동권은 물론, 지금도 좌파들은 후자를 들먹이며 박정희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글은 이재명 후보가《산업화-민주화 병행론》을 꺼내들어 박정희를 은근슬쩍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이 주제다.

    김문수 후보눈 좌파운동권 시절《선 민주화 후 산업화론》 대표주자 중 하나로 격렬한 반(反) 박정희 투쟁을 펼쳤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는《선 근대화(산업화) 후 민주화 론》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는 자세를 보였다.

    문제는 이재명 과 그를지지하고 따르는 수많은 국민들의 생각이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이 논쟁의 결론도 달라질 것이다.

    이종권 교수는 서울공대 항공학과 졸업후 다시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가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중앙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했다. 대표적 저-역서로는《과학문명사》《수리철학》《현대철학의 쟁점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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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또 다시 요동칠 것이다. ⓒ 뉴데일리

    《역사 속의 박정희와 최명길》




    ■ 박정희의 가정이 옳았다

    이제는 역사적 인물이 된 박정희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평가는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근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 대통령 후보가 말한 것처럼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말살한 아주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이 나라 산업화 이끌어 낸 공은 있다” 는 것이다. 

    이 말은 박정희 출생지의 유권자를 상대로 한 말이다.

    박정희에게 아직도 적대감을 품고 있는 호남에서라면, 그는 아마도 “박정희는 산업화를 이끈 공은 있지만 아주 나쁜 인간이었다” 고 말했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박정희에게 공(功)과 더불어 과(過)가 있다는 것은 하나마나 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당연함을 조금이라도 불식하고자 박정희의 과(過)는 30%인 반면, 공(功)은 70%라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수치적인 평가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功)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쿠데타 안 하고 민주적으로 집권해 민주적인 소양을 가지고 인권탄압과 불법적이고 위헌적 장기집권 안 하고, 살림살이 잘하고 나라 부유하게 했으면 모두가 칭송했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박정희가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올렸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민주화》와 그가 필생의 목표로 설정한《근대화》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적어도 민주주의적인 방식의《근대화》는 불가능하다는 박정희의 가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도《근대화》가 가능한데 굳이 독재적 방식을 동원했다면, 박정희가 이룩한 근대화의 공의 점수는 적어도 절반 이하로 깎아내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진영은 자신들이 박정희의 독재를 타도하고《민주화》를 이룩한 첨병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군부 엘리트들에 의한 독재가 종식된 후 이들이 걸어온, 이른바《민주화의 길》을 더듬어 볼 때 박정희의 가정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한국의 근대화 vs 일본의 근대화

    박정희는 그의 독재에 대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렇게 달성하기 어렵지 않은 공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거의 박정희 혼자의 힘으로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의《근대화》는《사무라이 집단에 의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맞먹을 수 있다.

    박정희보다도 두 배나 많은 권력과 정치적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박정희가 이룬 업적의 반이라도 이룰 수 있는 인물은 당시 그의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처음 국가를 경영할 능력은커녕 국가 경영의 개념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박정희는《‘겨우’ 18년에 걸친 독재》를 통해《근대화》의 초석을 놓는 데 성공했다.

    반면,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이른바《민주화》 세력은 승승장구 점차 권력을 늘려가기 시작했으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권력의 성장에 비례해서 성장해 오지 않았다.

    최근 국회의 권력을 장악한 그들의 행태는 그들이 민주주의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더 탐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들게 한다. 

    박정희는 당시 한국의 상황이《국민에 의한 정치》에 의해서는《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있다는 생각에서 독재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른바 민주 진영은 지금껏《국민에 의한 정치》를 간판으로 내걸고 실은《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오히려《민주화》세력에 의해 후퇴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 이상만 추구하고 아무런 이득 챙기지 않은 박정희

    헤겔(Hegel)의 말대로, 어떤 위대한 것도 열정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도 그가 열정을 다해 추구하지 않는 한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 독재는 더럽기는 했지만, 단지 수단에 불과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의 말대로, 정치인에 있어 권력은 필수적인 수단인데 그 권력은 두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권력은 정치인이 정열을 바쳐 추구하는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권력 본능”을 충족시키고 권력투쟁의 전리품을 챙기는 역할도 한다. 

    박정희는 독재 권력을 오로지 자신이 영혼을 바쳐 추구하는《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했다.

    그것을 가지고 권력 본능을 충족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정치인들은《민주화》의 간판을 내건 정치인마저도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닌 권력 본능에 충실하거나 권력투쟁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권력을 추구했다. 

    베버는 그러한 정치인을《직업의 성령(Holy Spirit)》을 배신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정치인으로 묘사했지만 이른바 민주 진영에서도 그러한 정치인이 대다수가 아니었다면 한국의《민주화》는 벌써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이상을 추구했던 박정희는 아무 전리품도 챙기지 않은 채 비명에 갔다.

    하지만, 한국《민주화》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던 그의 가장 강력했던 경쟁자는 엄청난 국민의 혈세를 들여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다졌다는 의심스러운 공로로 노벨상까지 챙기는 영광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행태는 그가 평생 외친《민주화》가 정말로 박정희가 지녔던 것과 같은 정치적 이상 비슷한 것이었는지 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 모택동과 박정희는 완전히 다르다

    여하간 진정한 정치적 이상은 없으며《국민에 의한》정치를 표방하여 권력을 얻은 다음 전리품을 챙기자는 것이 민주 진영 인사들의 진정한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 목표를《국민에 의해》달성하자면, 그 수단은 그들이 대학에 있었을 때 즐겨 사용하던 것, 즉 국민들에게 영합하거나 그들을 선동하는 것 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할진대 60년전의 한국의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박정희의 가정이 옳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를 속으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사람도 겉으로는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하기 위해《공(功)은 70%이지만 30%의 과(過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러한 식의 공과(功過)의 평가를 예를 들어 마오쩌둥 같은 정치인에게는 내릴 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은 중국 국가를 건설한 것이고, 과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홍위병운동 같은 쓸데없는 짓을 막후에서 조종한 것이다.

    그 비율을 따진다면 7:3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러한 식의 평가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과(過)라고 인정되는 독재와 공(功)인《조국근대화》는 마오쩌둥 에 있어 국가건설과 홍위병운동과는 달리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최명길 vs 삼학사

    여기서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의 경우와 비슷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싶다. 

    조선 중기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三學士)는 청(淸)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는 척화론(斥和論)을 끝까지 주장했다.

    결국 청(淸)에 잡혀가 죽음을 당했던 척화파의 강경론자 세 사람이 그들이다.

    반면, 최명길은 조정에서 압도적이었던 주전론(主戰論)에 맞서 청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했고 또 주도했던 인물이다. 

    나는 지금도 병자호란 하면 곧바로 삼학사를 떠올린다.

    그 이유는 물론 호란에 대해 배울 때 선생님이나 교과서가 강조한 인물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명길(崔鳴吉)이라는 재상도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나 알았지만 별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늘 생각해 왔다. 

    우리의 선조들은 삼학사가 죽은 후 남한산성에 현절사(顯節祠)라는 사당까지 지어 이들의 높은 절개를 현창(顯彰)했다.

    반면, 최명길은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괴롭힌 오랑캐와의 가당치 않은 화의를 주장한 용렬한 사대부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최명길에 있어 청(淸)과의 화의는 그도 받아들이고 있던 성리학의 진리에 반하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국가인 조선을 구하는 길이었다.

    삼학사를 비롯한 당시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조선이 멸망하더라도 목숨을 바쳐 진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청과의 화의라는 손을 더럽히는 행위를 무릅쓴 최명길을 거룩한 성리학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삼학사에 대비되는, 재상까지 올랐으면서도 성리학의 진리를 배신한 용렬(庸劣)한 사대부라고 두고두고 비난했다. 

    당시 그래도 국가와 백성을 위한 최명길의 성심(誠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최명길의 공(功)은 70%이고 과(過)는 30%이다라는 식의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명길에 있어 재상으로서의 일차적인 사명은 국가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한 사명을 위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손을 더럽히는 수단마저도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청(淸)과의 화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과의 굴욕적인 화의가 국가를 살리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 외에 다른 수단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손을 더럽히는 수단을 선택한 행위와 국가를 살릴 목적을 달성한 행위를 따로 떼어 놓고 평가할 수는 없다.

    박정희에 있어서도 독재는 더러운 손이었지만 그것은 최명길에 있어 청과의 화의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국가와 백성을 구하는 목적,《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최명길에 대해 청과의 화의와 국가와 백성의 구원을 따로 떼어 놓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박정희에 대해서도 그의 독재와《근대화》라는 목적을 따로 떼어서 평가할 수 없다

    박정희를 평가함에 있어 독재라는 악을 선택하여《근대화》라는 목적을 달성한 행위 전체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 최명길, 박정희, 김문수

    조선의 사대부들은 최명길이 손을 더럽혀 조선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명백히 조선에서 사대부로서 떵떵거리며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명길이 손을 더럽힌 측면만을 가지고 공격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박정희가 손을 더럽혀서 이룩한 근대화가 아니었더라면 오늘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독재를 했다는 사실만을 들어 그를 나쁜 인간으로 비웃으며 그로부터의 혜택은 부정하고 있다.

    도덕이 절대적 선(善)이었던 조선시대 이래 한국 국민들은 나쁜 인간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논외로 하거나 나쁜 인간이 나에게 혜택을 베풀 리가 도대체 없다고 우겨대곤 한다. 

    스스로도 악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무릅써가며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려 한 최명길이나 박정희 같은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한 일을 하려 하면 혜택을 받은 사람들로부터도 결국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그러한 각오로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스스로가 설정한 국가와 백성을 위한 숭고한 길을 온갖 욕을 먹으면서 독재라는 악의 길을 걸어 간 박정희야말로 베버가 말한《비극적 영웅(tragic hero)》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 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 어머니 덕에 잘살면서 어머니 욕하는 아들

    그런데 오늘날에도 박정희의 무덤에 자랑스럽게 침을 뱉겠다는 용렬(庸劣)한 인사들이 적지 않다. 

    평생 숭고한 가치는커녕 눈앞의 이익과 권력 이외에 다른 것은 추구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삶의 궤적이 입증하듯, 그들은 박정희를 평가할 자격조차 없다. 

    몸을 팔아 자식을 출세시킨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이웃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런 어머니 덕에 출세하여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어머니의 헌신보다는 몸을 판 행위를 비난하는 아들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무슨 대단한 도덕적 인간임을 내세우려 하는 한심한 짓이다.

    대선후보가 대구-경북을 찾아 박정희에 내린 평가는 바로 그런 한심한 아들을 떠올리게 한다,
    ▲ 이재명의 정책 노선은 시진핑-푸틴에 우호적이고, 차베스의 집권 플랜을 흉내내고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거를 통해 국회를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사법부도 손아귀에 넣으려는 전략은 히틀러와 차베스를 떠올리게 한다. ⓒ 뉴데일리
이종권 전 중앙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