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전기 고문에도 열지 못한 김문수의 입노동자·약자·서민 위해선 거침없는 행보보수 불모지 부천에서 진보 아성 꺾고 3선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금배지도 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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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가족들의 모임인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행사에 참석해 '양심수 전원 석방'을 외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운동권의 전설에서 우파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꽃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절자'라는 비난을 견뎌야 했고, 소장파 국회의원으로서 설움도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 대한 변하지 않는 애국심 하나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김 후보는 두 차례의 투옥과 모진 고문에도 운동권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맞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져도 그의 입을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춧가루 물 먹이기, 전기 고문도 행해졌지만 동료의 행방을 두고는 입을 굳게 닫았다.
이후 2년 6개월의 투옥 생활이 시작됐다. 김문수라는 이름 대신 '1125'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은 변혁의 시기를 겪었다. 김 후보의 삶도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고 자본주의로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사회주의로 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 대신 현실 정치에 뛰어든 김 후보가 1994년 민주자유당(민자당) 부천시 소사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부천의 낡은 아파트로 둥지를 옮겼다. 그리고 2년 뒤 있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준비에 돌입했다. 지역 연고도 없는 데다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김 후보는 이른 아침 약수터로 출근해 늦은 밤까지 소사구 구석구석을 누비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하루도 쉬지 않았던 그의 손에는 늘 수첩이 들려 있었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민원이나 불합리한 문제들을 까먹지 않기 위함이었다.
김 후보가 매일 소사구 곳곳을 돌고 또 도는 사이 15대 총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김 후보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가 부지런히 2년을 보냈더라도 기성 정치인의 아성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사구 현역 국회의원은 부천 명문가의 토박이이자 부천의 땅 부자로 유명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박규식 의원이었다. 제1야당인 국민회의 후보도 막강했다. 제22대 국회 최고령 현역인 박지원 의원이 당시 소사구에서 출격을 대기하고 있었다. 박지원 의원은 당시 DJ의 막강한 신임을 얻고 있는 대변인 신분이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3등을 면치 못했다. 지난 2년간 경청한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지옥철, 대통령도 같이 타봅시다'라는 파격적인 공약도 내놨지만 단번에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박규식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박지원 의원과 일대일 구도가 됐다. 그럼에도 김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부천시는 대대로 민주당 의원들이 당선된 곳인 만큼 민자당도 그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의 진심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선거를 사흘 남겨두고 판세는 조금씩 흔들렸다. 그렇게 김 후보는 불과 1600여 표 차이로 박지원 의원을 꺾고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 ▲ 2004년 2월 26일 한나라당 공천심사에서 박주천,박명환의원이 배제되자 박주천의원 지지자들이 김문수 위원장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심의 힘을 당선으로 입증한 김 후보는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총선에서 주민들에게 약속한 '지옥철 해결'을 이뤄내야 했다. 아무도 김 후보에게 공약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선거 때만 반짝 진심인 척하는 기성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평소 행실부터 남달랐다. 이에 한동안 국회에 등원할 때마다 입구에서 제지를 당해 관등성명을 대야 하는 일화도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국회 경비대의 물음에 "저 김문수 의원이라고…. 의원회관 갑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다름 아닌 그가 타던 '아반떼' 차량 때문이었다. 김 후보의 차량을 방문 차량으로 오인했던 것. 대다수 국회의원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지만 김 후보는 소형 승용차를 고집했다. 이마저도 당선 후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국회의원의 상징인 금배지마저 떼버렸다. 1996년 겨울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계기가 됐다.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이던 김 후보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그는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서 노동유연성 확대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의 큰 방향성에 동의했다. 그러나 설득과 타협의 과정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선 통렬히 반성했다. 노동자들이 김 후보를 향해 던지는 욕설과 멱살잡이를 묵묵히 견딘 것도 이런 차원에서였다. 결국 그는 1997년 3월 국정감사 기간 중 대정부질문에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1998년에는 주민과의 약속을 마침내 지켜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고든 덕이었다. 철도청을 찾아가고 지방자치단체를 거듭 설득했다. 동료 국회의원들이 모이는 자리에만 가면 경인 지옥철 문제를 꺼내 들었다. 기나긴 노력 끝에 건설부 장관으로부터 2배 정도의 선로용량 증가가 가능한 복복선 약속을 받아냈다.-
- ▲ 한나라당 김문수의원이 5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식아동 지원 예산을 위해 싸우다 '김결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밥 굶는 아이들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게 무슨 민생국회인가"라며 추가경정예산 막판 조율을 위해 3당 원내총무가 모여 있는 곳을 기습 방문해 항의하는 등 국민과 약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공천심사위원장을 제안받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전달 사건으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부정부패와 거리가 먼 인물이 필요했다. 철저하게 깨끗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개혁 공천이 요구됐고, 김 후보를 내세워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김 후보는 자신의 소임을 해냈다. 기존의 관행을 뒤엎고 공심위 구성에서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였고, '쪽지 공천'을 원천 차단했다. 자신에게 공심위원장을 제안한 최병렬 대표도 탈락시켰다. 선배·동료 의원 27명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김 후보는 자신만의 소신 정치로 보수 불모지 부천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지역 주민들 입에서 "당이 아닌 김문수를 지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그에게 배신자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우파 진영에서는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김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응원하는 국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결심한 김 후보는 노동운동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늘 약자를 최우선으로 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은 예나 지금이나 그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는 3선 의원이 돼서도 변하지 않았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던 2006년 그는 부천시 소사구를 넘어 경기도 전체로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다.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