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났다지만 서울대 졸업만 25년 걸려불타는 정의감에 학창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미싱공장 위장 취업해 노동계 현실 직접 체험두 차례 옥살이 후 민중당으로 제도권 진입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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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운동탄압규탄대회 봉쇄농성 85.4.10 부평 1동 성당에서 농성을 이끄는 김문수(학출노동운동가). ⓒ연합뉴스
"혁명의 시대는 갔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아스팔트에서 노동자를 위해 누구보다 거칠게 살아온 그는 이런 말을 남기면서 민주자유당에 들어가 우파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김 후보는 1951년 9월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냈지만 김 후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무렵 아버지가 친척 보증을 잘못 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후보의 정의감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경북고 재학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앞장서 무기정학을 당했다.
김 후보는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졸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제적당하면서 25년 만인 1994년에야 늦깎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대 입학 후 학생운동 조직인 '후진국 사회 연구회'에 가입한 뒤 운동권에 발을 들였다. 연구회 활동을 하며 유신(維新) 독재 타도 운동에 참여했다.
김 후보는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방과 달리 서울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후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로 드레스 미싱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계 현실을 직접 체험하게 됐다. 오전에는 미싱사로 일했고 저녁에는 사람들과 만나 토론하며 바쁜 일과를 보냈다.-
- ▲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그는 1971년 가을 부정부패 척결 전국학생 시위에 연루돼 제적됐다. 1973년 제적이 풀려 학교에 돌아갔으나 1974년에도 연거푸 제적됐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 시절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반정부 시위를 벌인 학생 등 관련자 180여 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김 후보는 두 차례 제적 후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옷에 똑딱이 단춧구멍을 뚫는 '또또사'로 시작했지만, 열관리기능사, 환경관리기사 등 7개 자격증을 취득하며 한일공업(도루코)에 보일러공으로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1978년 김 후보는 한일도루코 노조교육선전부장에 이어 위원장 직무대리까지 맡으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권에 진입했다. 김 후보는 당시 임금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노동운동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흔들리게 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복 차림의 형사에게 끌려간 곳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서 자신의 서울대 선배들이 연루되자 김 후보도 조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이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일주일간 밤낮없이 고문을 당했다. 이후 49일 만에 풀려났다.
1986년엔 5·3 인천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인천항쟁은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벌인 시위다. 김 후보의 회고록에 따르면 수감 당시 '족수승'(손발을 몸 뒤쪽으로 활처럼 묶는 것) 등 각종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갖은 고문에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서 함께 활동한 심상정 전 의원에 대한 정보를 불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 ▲ 민자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문수 경기 부천 소사 지구당위원장등 10개 신임 지구당위원장들을 접견하고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계 전설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김 후보는 1990년 고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과 제도권 정치 진입을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며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도 활동했으나 1992년 51개 지역구 전패 및 정당 존립에 필요한 득표율 2%도 못받아 해산됐다. 그 무렵 김 후보는 소련 등 공산주의 동유럽 등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며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에 회의를 느꼈다.
결국 김 후보는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혁명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남긴 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게 된다.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