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언론 풍파 함께 한 선배이자 동지 영전에
-
-
- ▲ 고 최서영 KBS 상무이사. ⓒ 연합뉴스
최서영(崔瑞泳) 언론 선배께서 회천(回天) 하셨다.
지난해 (2024)~올해 사이 대학 2~3년 선배들이 일시에 약속이나 한 듯 앞서거나 뒤서거니 떠나셨다.
거기도 동기가 있나.
노재봉(전 국무총리·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김동익(전 중앙일보 주필·사장) 김영수(전 MBC 사장) 신동호(전 스포츠조선 사장) 선배.
이제 최서영 선배까지 가셨으니 우리 기수 앞에는 아무도 안 계시다.
그만큼 한 세상, 한 시대, 한 세대가 지났다는 뜻이리라.
그게 임진왜란 직후던가, 병자호란 직후던가.
아니다.
6.25 직후였다.
전후(戰後)의 한국은 그야말로 최빈국이자 황폐 그것이었다.
그러나 청춘은 있었다.
젊은 지성은 있었다.
젊음의 고뇌도 있었다.
1956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구 출신 한영환 군을 만났다.
훗날 중앙대학교 대학원장.
그와 함께 동아리에 가담했다.
최 선배가 올드 멤버로 계셨다.
생전 처음 정치사상이라는 걸 접했다.
어느 날 저녁 가회동에 있는 한영환 군 하숙방을 찾았다.
그 옆에 최 선배 방이 있었다.
셋이서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박한 정치-문학도 최 선배.
학부 4년생이었는데, 이미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셨다.
최 선배의《참여문학》강의에 새내기 필자는 완전 뿅 갔다.
어떻게 저렇게 아는 게 많을까?
2년 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훗날 어마어마한 사고를 친《정문회》란 이름의 남의 동아리에 슬쩍 한번 가봤다.
거기서《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노재봉 선배와《참여문학》을 강조하는 최서영 선배가 정면충돌하는 광경을 봤다.
필자가 놀란 것 - 그것은 그분들의《유식한 너무나 유식한》지적(知的) 수준이었다.
동기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군은 그래도 나보단 나았다.
감히(?) 자작시를《경상도 억양으로》읊었으니.
야코가 팍 죽었다.
슬쩍 빠져 도망쳤다.
그로부터 10년?
사고를 왕창 치고 돌아왔다.
최 선배는 그동안 경향신문, 조선일보를 거쳐 한국 언론계의 별처럼 빛났다.
예리한 관찰, 세련된 문체, 날카로운 촌평 등, 아, 기자란, 언론이란, 저렇게 하는 거구나!
3공→유신→10.26→신군부가 들어섰다.
KBS의 PD란 이가 느닷없이 전화를 해왔다.
“류 아무개 씨?《새 시대가 오고 있다》란 토크쇼를 하는데《한 말씀》하라” 는 거였다.
신군부 등장을 지지하는 하명(下命) 프로 같았다.
안 나가겠다고 잘랐다.
그랬더니 반응이 고약했다.
“그럼《거절》하더라 보고할 게요.”
공갈이었다.
KBS 상무로 가 계신 최 선배한테 전화를 넣었다.
오랜만의 대화 재개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다름 아니오라, 어떤 PD인지 못됐던데요.”
최 선배는 허허 웃으셨다.
“알았어, 알았어.”
민주화가 왔다.
극좌 풍조에 나름대로 싸웠다.
조선일보 구(舊) 사원들의 송년 모임에 최 선배와 김영수 선배가 오셨다.
“계~~속 파이팅!”
그로부터 또 한 15년?
전화를 받았다.
“저 한영환 씨 손자인데요.”
“오 최서영 할아버님 가셨구나.”
최 선배님, 이제 쉬세요.
한영환 누님께 장가가시던 날 생각납니다.
제가 대구까지 갔던 것 기억하시죠?

류근일 뉴데일리 논설고문 / 전 조선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