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게…온갖 조롱·모독 속 18년간의 고독이 갖는 무게감을100년의 고독 그 이상이었을 것500년 가난·질곡 끊어낸 근대화 위한 위대한 고독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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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보도. 교수연구실에 대못질하는 것을 넘어 시위 중에 수업한다고 강의실에 화염병을 투척하기도 했다.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전체주의, 극단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의 몰인간성》을 느낄 수 있다. 종교가 다르다고 참수하는 탈레반의 행동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민주화란 명분만 있으면 폭력도 정당화 되는가.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종권 전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제자들에게 보내는 연작 서신을 연재한다. 70년대 80년대 강단에 섰던 대다수 교수들이 기본적으로 겪었던 학생들과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고 있다.
학생들, 특히 이른바《민주화 운동권》학생들은 자신들의 투쟁에 교수들의 동참을 끊임 없이 요구했다. 그들에 동조한 교수들은 1987년 6월 26일 가두시위가 격화되던 와중에《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결성해 운동권과 보조를 맞췄다. 이런 움직임에 가담하지 않는 교수들은 이른바《어용교수》라 불리며 따돌림과 박해를 받았다.
민교협 이 생기기 전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념·철학과 다른 노선을 가진 교수들을《어용교수》라며 수강거부를 하거나, 심지어 교수연구실에 팻말을 달고 못을 박아 폐쇄하는 만행과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교수들이 이런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과의 이런 갈등은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겐 모두가 겪어야 할 홍역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이 연재는 희수(喜壽)에 달한 필자가 그런 시련 속에 제자들과 가졌던 치열한 논쟁을 회고하며 쓰는 마지막 강의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의 탄생·성장·발전·미래에 대한 중요한 의제(아젠다)가 담겨 있다. 2030 청년들에게도 좋은 논점과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권 교수는 서울공대 항공학과 졸업후 다시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가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중앙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했다. 대표적 저-역서로는《과학문명사》《수리철학》《현대철학의 쟁점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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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의 저자는 이강호(필명). 본명은 김용철. 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으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한차례 복역도 한 운동권 출신.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며 이른바《사회변혁》이란 이름의 혁명운동에 몸을 담갔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박정희야말로 근대화를 이룬 진정한 진보 정치가"라고 평했다. 박정희로 상징 되는 독재체제를 뒤집어 엎겠다는 이른바《민주화 운동가》의 진솔하고 용기있는 자기 고백서다. ⓒ 출판사 기파랑
《민주화를 외쳤고, 외치고 있는 친애하는 제자에게 (제4신)》
일본의 근대화는《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 집단이 한 것》이지만, 한국의 근대화는《오직 박정희 혼자의 힘으로 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는 박정희 혼자 자신의 손을 더럽혀가면서 이룬 것인데, 왕의 길은 다르다고 한 누구의 말처럼《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라면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사양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박정희는《자신의 영혼을 바친 근대화가 독재와 같은 더러운 일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가운데는 나도 포함된다)《아름다운 민주주의를 버리고 근대화와 같은 천박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 분개》했으며, 따라서 박정희의 근대화를 조롱하는 한편으로 독재 타도 와 민주화 를 외쳤다.
그에 따라 박정희 는《고독하게 사실상 혈혈단신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없었다.
여기서 나는《박정희의 또 다른 위대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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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의 명제가《근대화》인 반면, 김영삼-김대중의 명제는《민주주의》였다. 근대화-산업화를 향한 박정희의 모든 명제를 그들은 무조건 100% 반대했다. 《민주주의=독재반대》외치며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에 드러누웠다. YS와 DJ는《민주주의만 하면 근대화-산업화는 저절로 된다》고 믿는 허접한 철학과 가치관의 소유자들이었다. 14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하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한다"는 수준 낮은 역사인식과 가치관을 내놓았다. 금융실명제 도입 등 업적도 있지만, [좌파의 숙주] 노릇 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는 실책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제정치에 무지한 YS의 좌충우돌 치기 어린 언행은 미국을 불편하게 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발언으로 일본의 심기를 무대뽀로 건드려,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 행안부 대통령기록관 사진
■ 박정희의 또 다른 위대함
나는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이 1980년대 폭풍노도의 시절 등교하자마자 학과 사무실에 모여 열띤 토론과 논쟁을 벌인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네들의 얼굴은 엄청난 진리를 갖게 되어 자부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지금은 자네들은 학교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동료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일단 졸업하여 대학 문을 나서자마자 자네들과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네 주변 사람들 가운데 자네들 생각이 옳다고 동조하는 사람이 자네들뿐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자네들은 고독감을 느낄 것이고 자네들 생각도 흔들리게 될 것이다.
자네들이 대학시절 철석같이 믿은 것이 정말로 진리인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내 대학 시절 자신만만했던, 그리고 자네들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고 생각 했던 진리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행태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하지 않기 위해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쫓아다니게 될 것인데, 그때는《자네들끼리의 열정적인 토론이 실은 지적인 수음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박정희는 근대화에 대해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고사하고, 주변에 온통 자신을 욕하는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에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박정희의 라이벌인 한 정치인이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을 때 박정희가 고독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한 바 있다.
한창 인기 절정이던 그 정치인은 그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치인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때야 왜 대통령 자리가 사람을 고독하게 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평생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 정치인은 퇴임 후 다시 대통령이 되면 하겠느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아무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5년이면 지치는 것이다.
박정희는 18년간이나 버텼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예외적인 권력욕》이 아니면《예외적인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를 비롯하여 박정희에 반대한 모든 사람들은 전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조선 이래 500년 이상 가난에 찌들어온 나라와 백성이 거의 단숨에 가난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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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이 뛰어내렸다고 하는 부엉이 바위 전경. ⓒ 연합뉴스
■ 박정희 덕분에 영화 누리며 욕하는 자격?
나는 박정희가 18년간이나 거의 모든 한국인의 조롱과 욕을 들어가면서도 고독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이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은《여하간 박정희가 손을 더럽혀가면서 만들어낸 과실을 자네들 같은 운동권은 마음껏 누리면서도》동시에《박정희는 손을 더럽힌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마음껏 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들을 보면, 몸을 팔아 자신을 출세시킨 엄마를 몸을 팔았다고 욕하는 아들 생각이 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일을 알아주지 않아 고독했지만, 그 경쟁자들은 박정희에 의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기는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민주화라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엄청난 갈채를 충분한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정치에서 위대한 성과는 갈채가 아닌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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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회찬이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아파트 현장 사진. ⓒ 연합뉴스
■ 노무현의 고독과 자살
하여간 노무현 이라는 정치인은 주변의 갈채를 받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노무현 은 아마도 운동권으로부터 정치를 배웠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아름다운 일만 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도 한강 의 소년과 같은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박정희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정치에는 가치 있는 목적이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정치인이 되려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대로《설사 주변으로부터 아름답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더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노무현 에 대한 운동권의 어떤 요구 가운데는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해 노무현 은 운동권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책임 있는 정치인의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는 당연히 운동권의 갈채를 상실하고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고독해지는 것이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고독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한동안 운동권의 갈채에 젖어 온 노무현 으로서는 박정희처럼 고독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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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벅원순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곳 입구에서 경찰이 기자들에게 브리핑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노무현 죽자 재빨리 이용하는 운동권의 위선
그것은 노무현 뒤에 노무현 과 같은 선택을 한 몇몇 정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그들의 출세에도 지지자들의 갈채가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이상 손을 더럽히지 않기는 쉽지 않으며, 그 사실이 발각되면 이제 박정희가 받은 조롱과 모욕 속에서 갈채 대신에 고독을 감수해야 할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갈채 속에서만 살아온 그들로서는 박정희 정도의 고독은 아니더라도 고독을 견딜 자신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선택을 한 것이다.
여하간 노무현 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 불미스러운 일로 위기에 빠진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운동권의 자세를 확인하자, 결국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노무현 의 죽음은 무책임하게 위선만 떠는 운동권과 같은 자세로는 더 이상 책임 있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런대로 책임감을 지닌 정치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물론 그가 죽기 직전, 그가 이미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던 운동권들은 노무현 의 죽음을 재빨리 그들의 적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챙기는 데 성공했는데, 그러한 약삭빠름은 여하간 박정희와 같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 정치인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현실 정치인이 된 운동권으로서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편에서 계속》

이종권 전 중앙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