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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선동·세뇌, 한총련·전교조 세대에 먹혔다 … [참을 수 없는 시샘] 이용해서

[나는 왜 이렇게 작은가] 식 [비교]의 [기분 나쁨]
[정신적 프롤레타리아트] 부추겨 [심리적 내전(內戰)] 유발
거대한 추락과 붕괴, 누가 막나

류근일 뉴데일리 논설고문 / 전 조선일보 주필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24.04.27 21:42 | 수정 2024.04.28 08:44

[류근일 칼럼: '시샘의 정서'가 '시샘의 정치' 만든다]

▲ 이재명당은 50.56%의 정당득표율로 입법부를 장악했다. [시샘의 정서]를 교묘히 이용하는 [시샘의 정치]를 이용한 결과다. ⓒ나무위키 그래픽 캡처

[시샘의 정치] 가 예수 죽였다

2024년의 4.10 총선 때의 한국 유권자들.
그들은 빌라도 로마 총독이
"바라바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물었을 때
"바라바를 풀어주라" 
라고 답했다.
왜 그랬을까?

이 의문에, 
<그들이 예수를 건네준 것은 시샘(envy) 때문이었다>란 책의 저자 안젤름 하게돔제롬 네이리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예수의 치솟는 명성에 대한
기득권 엘리트 들의 [시샘의 정치] 때문이었다."

■ 기성 사회에 대한 막연한 반발

[시샘의 정치] 는,
오늘의 한국 정치 갈등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시샘의 정서] 는,
★상대적 박탈감 ★질투 ★상실감 ★반발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시샘의 정서] 는,
단순한 경제적 개념으로 환원(還元)할 수 없다.
경제보다 더 총체적인 의미의 존재감 같은 것이다.

저들과 비교해 볼 때
[나는 왜 이렇게 작은가] 하는 [비교] [기분 나쁨] 이다.

누구에 대한 [기분 나쁨] 일까?
부르주아에 대한 재산상의 열패감이라기보다는,
기성 사회 [끗발] 들과 [일류 엘리트] 에 대한 [정신적 반발] 같은 것이다.

예수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갈리리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수의 존재와 그의 기적을 알렸다.
그에 대한 찬사와 예찬이 하늘을 찔렀다.

기성 엘리트 들에겐
그건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빌라도 와 민중의 마음을
다시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
온갖 ★선동 ★회유 ★가짜 뉴스 퍼뜨리기 를 다했을 것이다.

■ "내가 이렇게 기분 나쁜 이유는?"

오늘의 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 온갖 명성과 기득권을 다 누려온 운동권 엘리트들로서는,
그 엘리트 됨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윤석열·한동훈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마침 그들에겐
선동과 세뇌에 놀아나는 불만층이 착실히 축적되어 있다.
21세기 한국의 [정신적 프롤레타리아트] 라 할
한총련·전교조 세대 가 그들이다.

그들은 유년 시절부터
부모들 성화에 쫓겨 [혀 빠지게] 학원엘 다녔다.
헐레벌떡 대학엘 들어갔다.
군대 나가고 취직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를 지나 선진국으로 갈수록
한국 사회의 경쟁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계층 간 차이도 더 굳어졌다.
★초엘리트 ★평균적 엘리트 ★뒤처진 엘리트
★ 대기업 특권 노조 ★비정규직 ★8학군
★강북 ★강남 ★수도권
어쩌고 하는 것들이,
치열을 극한 [심리적 내전(內戰)] 을 유발했다.

"내가 이렇게 기분 나쁜 이유?
그건 저 초엘리트들과 아류 엘리트들의 엘리트 지위 독점 때문이다.
대표적인 상징이 윤석열·한동훈·국민의힘 같은 보수·수구·꼴통·꼰대
들이란 식이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 라고 소리치던
2000년 전 유대 땅이나 오늘의 한국 땅 저변엔,
그런 [참을 수 없는 시샘] 이 짙게 배어있을지 모른다.

■ 망하기 전엔 망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쌍스러운 욕쟁이 ★뇌물·배임 혐의자
★부동산 도둑 ★문서위조범
★곳간 털어 나눠 먹자는 선동꾼
들을 뽑아줘?

망하기 전엔 망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거대한 추락 붕괴 를 누가 무슨 수로 막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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