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의병과 자위단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의 근대적 민중저항은 ‘폐정개혁’과 함께 ‘반외세’를 주장한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을사강제조약(1905)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의병항쟁을 본격적

    2009-11-12 한상일
  • 14. 병탄의 건널목 (2): 정미7조약

    고종의 양위식 다음 날인 21일부터 23일 사이에 통감부와 일본 외무성은 바삐 움직였다.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는 새로운 협약을 만들기 위한 많은 전문이 오갔다. 이토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근거로 하야시 외상과 협의하여 작성한 새로운 조약의 안을 24일 이완용 총리에게 전

    2009-11-04 한상일
  • 13. 병탄의 건널목 (1) 고종의 양위

    일본 강경론자들, 이토의 점진정책 비판을사강제조약이 병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의 첫 단계였다면, 고종의 양위와 이어서 강제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병탄의 기반을 완수한 단계라 할 수 있다.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통감부를 이끌었다. 원

    2009-10-29 한상일
  • 12. 병탄의 주구 '일진회'

    한국병탄은 일본의 숙원사업이었다. 일본이 이 숙원사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진회와 같이 병탄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한국인 동조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또는 상당한 대가를 치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2009-10-20 한상일
  • 11.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포석

    일본정부-한국통감부-대륙낭인의 "병탄 작전"일본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츠라 다로-데라우치 마사다케-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하야시 곤스케-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스기야마 시게마루-

    2009-10-14 한상일
  • 10. 이토의 '한국 지배' 전술

    한국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06년 1월 30일 저녁, 이토는 주요일간지의 주필들을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초청했다. 메이지시대를 통틀어 이토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언론과 공존했던 정치인도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언론계

    2009-10-07 한상일
  • 9. '통감' 이토 히로부미

    1906년 2월 1일 한국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하고, 28일 시모노세키에서 군함[和泉]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통감부에 모습을 드러냈고, 9일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부

    2009-09-28 한상일
  • 8. 이토, 조정에 300만원 뿌려..."대궐은 총칼의 숲"

    군사협력 의무화 <한일의정서> 강요강대국으로부터 한국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에게 남은 과제는 한국을 요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적 노력과 달리, 한국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행위는 군사력을 앞세운 억압과 위협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야시 곤스케

    2009-09-22 한상일
  • 7. "러시아 품속의 한국을 빼앗자" 인천 러함대 기습

    20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었다. 한반도의 주도권 장악을 놓고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 불꽃 튀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19세기를 마감하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중국’의

    2009-09-18 한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