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6.25 ⑭  

    6월 30일에 3군총사령관 겸 육참총장에 정일권을 임명했다.
    정일권은 1917년생으로 당시 34세,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대위 계급으로 간도 헌병대장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는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에 입대한 후에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지냈다. 6.25 남침 당시에는 미참모대학으로 유학을 가 있다가 급거 귀국한 상태다.

    채병덕은 경남지구 평성군 사령관 직을 줘서 장병을 모집, 편성하는 책임을 맡겼지만 신성모 국방장관 경질은 보류했다. 미국대사 무초가 경질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지만 미국 주도의 유엔군 산하에 한국군이 포함되어야할 상황이다. 새 국방장관으로 기용하려던 이범석이 반미(反美) 성향이 있다고 판단한 무초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네 책임이 커.」
    내가 집무실에서 새 한국군 육참총장이 된 정일권에게 말했다. 집무실 안에는 조병옥과 비서관들이 둘러서 있었고 분위기는 어두웠다.

    「예, 각하.」
    정일권도 막중한 책임을 느낀 듯 목소리까지 굳어져 있다. 내가 말을 이었다.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를 받게 될 테지만 자네는 주관을 갖도록 하게.」

    이제 정일권은 시선만 주었고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곳은 대한민국 영토고 자네는 대한민국 국군사령관이야. 그러니 내 명령도 받아야 되네.」
    「예, 각하.」

    정일권이 선뜻 대답했지만 이것은 유엔군 체제를 무시한 행동이 될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도와주는 유엔군 입장에서 보면 배신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전쟁을 유엔군 작전대로 진행 되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유엔군은 틀림없이 정치적 결정에 따라 전쟁을 이끌 것이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일지라도 정치적인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미리 그것을 정일권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명령을 받으라는 선에서 끝냈다.

    나는 다시 대전에서 목포를 거쳐 경비정을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7월 1일 새벽에 출발해서 목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 내 일행은 우리 부부와 공보 처장 이철원, 황규면, 그리고 경무대서장 김장홍까지 다섯이었다.

    「김일성은 2년 전부터 전쟁준비를 했어.」
    500톤급 경비정이었지만 풍랑이 심해서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내가 선실에서 혼잣소리처럼 말했더니 이철원이 대답했다.

    「각하, 김일성은 평화통일 제의를 하면서 인민군을 대거 38선 부근으로 남진시켜 놓았습니다.」
    또 정적에 덮여졌다.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프란체스카의 얼굴로 하얗게 굳어져 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대한민국을 세우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침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없었다면 남한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김구가 또 임정 남한주석이 되어서 북한과 공존 했겠는가?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훗날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잘잘못은 조금 덮여질지 몰라도 결과는 명명백백해질 테니까. 20시간 가깝게 풍랑에 시달렸던 경비정 두 척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2일 오전 11시경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이번에도 두 경비정 함장인 주철규 소령과 김남교 소령, 그리고 50여명의 승무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대들이 날 무사히 이곳까지 데려다주었으니 그 신세를 공산군을 격퇴시키고 통일 하는 것으로 갚겠네. 고맙네.」
    경비정 장병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