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두 마리 토끼(성장과 분배)를 다 잡았다.
  •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나라

    세계은행이 1965-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9년 사이 한국을 이끌었던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과 국가 엘리트에게 우리는 고생했다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D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D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貧富격차 심해지지 않았다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소득의 균형분배면에선 거의 선진국 수준이었다. 이 기간에 上位, 下位를 불문하고, 국민소득은 다 같이 올라갔다. 너가 잘 되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해진 게 아니고 너나 나나 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통계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고도성장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공격하는 이들의 무식을 폭로한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모든 국민들의 소득이 비교적 골고루 올라가는 경로를 걸었다. 1975년 세계은행의 조사에서도 한국은 전체 조사대상 국가 66개국중 소득의 평등도 순위가 14위였고, 42개 개발도상국중에선 6위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이라 南美式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D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중 소득 하위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특권을 혐오한 권력자

    박정희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엔 시가 한 편 실렸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책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박정희 의장을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역임)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 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의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동정심이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한 중요한 심리적 요인이었다. 

    아래 글은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ㆍ동자부 장관 에세이집》에 실린 朴忠勳(박충훈) 前 국무총리의 회고이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타고난 손재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배우겠다는 向學熱(향학열) 또한 세계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날짜가 확실치 않은데 어느 날 九老工團(구로공단) 作業場(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朴正熙 대통령은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少女(소녀)가 제 옆에 大統領(대통령)이 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少女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제서야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 번 입어 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朴 대통령은 군인이면서 다정다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없이 시행됐다. 工團(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夜勤(야근)을 마치고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어떤 졸업장과도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졸업장을 주도록 하라 엄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心情(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 소녀가 얼만큼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직장에서도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인가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女工과 대통령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순시에서 노동청을 방문하고 이런 말을 한다.
    다음은 속기록으로 작성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직공인데, 그렇다면 그게 상당히 조명시설이 잘 돼 있고, 그 아주 정밀하고도 작은 이런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면 저쪽 한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한 가지 간단한 예지만 그런 정도라도 거기에 기업주라든지 거기에 무슨 책임자가 다닐 때 여기는 이런 작업을 하는 어떤 사람한테는 좀더 전기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그 간단한 착안입니다. 

    이것을 안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 가보면 직공들이 머리가 또 요즘 히피마냥 이만큼 길게 하고 있는데 '왜 자네 머리 안 깎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게 일하고 가면 뭐 이발소 가고 할 시간이 없다, 그런 것은 기업주들이 조금만 더하면 그런 사람들한테는 하루에 시간 1시간쯤 정 못하면, 가서 이발하고 오라고 이런 정도로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이발사를 데리고 와서 할 수 있고, 조금 전에 기업주가 사용하는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나 이런 사람을 자기 가족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켜야 능률이 오르고 생산이 늘고 이러지 그런 정신 안 가진 기업체는 나는 절대 성공 못 한다고 봐요.

    오늘의 기업가들, 기업윤리, 기업정신, 경영개선 등 여러 가지 구호는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일은 사람이 하는 거고 종업원들이나 직공들이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이 참 그건 자기를 사용하는 고용주가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주고, 뭐 할 수 있는 데까지 어느 정도 기업주가 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도 있겠지.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해줄 수는 없겠지만 기업주의 형편으로서는 할 수도 있고 능력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해 주고 성의를 다한다, 이거로써 거기 있는 종업원들도 참 이 공장이 내 공장이다, 내 일이다, 그런 생각 밑에 능률이 오르고 하지 않겠나.

    요즈음 국가 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돼서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규제한다, 혹 일부 기업가들은 노동쟁의가 나오기만 하면 정부가 눌러버린다며 문제없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물론 노동자들도 그 어떤 부당한 너무 억지 과격한 노동쟁의 같은 것은 정부가 앞으로 상당히 규제해야 되겠지만 기업주들도 이런 것을 빙자해 가지고 거기에 있는 종업원들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환경의 개선이라든지 또는 노동자 권익 이런 것을 무시한다든지 태만하다든지 이런 것 역시 정부로서는 더 우선해서 철저히 단속해야 될 줄 압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