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의 성공 비결은 "優秀마을 優先지원" 원칙.
  •   
    새마을 깃발은 내려질 수 없다!
    세로운 나라, 새로운 한국인을 만든 새마을 운동 이야기.
    새마을 운동의 성공 비결은 "優秀마을 優先지원" 원칙.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고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였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새마을 운동의 성공 비결은 "優秀마을 優先지원" 원칙   
    
   시멘트와 철골을 마을이 공동 관리 
   
   유신시대에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은 3대 사업은 중화학공업 건설, 새마을 운동, 中東건설 시장 진출이다. 중화학공업건설은 朴대통령과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이 주도했고, 중동건설은 기업이, 새마을 운동은 농민지도자들, 특히 여성들이 주도했다.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던 농촌을 바꾸어놓았다. 그 힘은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였다. 우리 민족사상 농민이 수동적 백성의식을 떨쳐버리고 역사 창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백성을 국민으로 만든 셈이다. 
   새마을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정부가 전국 농촌마을에 나눠준 시멘트와 철골이었다. 1971-78년간 지원된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약84톤)이었고 철골은 마을당 2.6톤이었다. 1974년 時價로 환산하면 마을당 연간 250만원이다. 그 뒤의 정권이 했던 식으로 정부가 이런 지원을 개별 농가 앞으로 했더라면 국민정신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협동체제를 만들어 공동작업으로 農路, 하천둑, 마을회관 등 마을의 공동재산을 건설하고 개선하는 일에 나섰다.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朴振煥 박사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강의했더니 “물자지원에 따른 부정에는 어떻게 대처했나”라고 묻더라고 한다. 
   “시멘트와 철골은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훔치기 어렵다.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같은 양이 지급되었고, 이것을 마을주민들이 잘 알고 부정을 감시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시멘트와 철골은 국내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했다. 
   시멘트과 철골은 주로 농촌마을의 길과 둑을 정비하는 데 쓰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넓히거나 포장하고 꼬불꼬불한 마을 안길을 바로 하고 넓혔다. 動力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길 정비는 농촌의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었다.
   1971년부터 8년간 넓혀지고 바로된 마을 진입로와 마을 안길이 전국적으로 8만5851킬로미터였다. 마을당 2601미터다. 길을 넓히자니 작은 하천에 놓인 징검다리나 통나무다리도 콘크리트 교량으로 바꿔야 했다. 1971년부터 5년간 새마을사업으로 건설한 이런 작은 다리들이 전국에 6만5000개, 마을당 두 개였다. 마을주민들 중에는 군 복무중 다리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 제대장병들이 많아 이들의 지휘하에 공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홍수 때 잘 무너지던 하천의 둑도 보강되거나 물이 잘 흐르도록 직선으로 바꾸어주었다. 
   마을안길을 직선화하고 넓히는 과정에서 흙 돌 나뭇가지로 된 담을 헐고 시멘트 담을 쌓는 일이 이어졌다. 길가에 돌출한 農家도 헐어야 했으나 정부가 보상해주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기금을 모아 보상했다. 이렇게 하여 마을안길과 농가마당까지 자동차와 동력경운기가 다니게 되니 농업의 기계화가 확산되었다. 1970년엔 두 세 마을당 한 대 정도이던 경운기가 1975년에는 마을당 2~3대로 늘어나고 1980년대엔 마을당 20대로 急增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여성들의 역할
  
   이런 농촌개조사업을 정부가 보상을 해주면서 주도했더라면 엄청난 재정지출이 따랐을 것이다. 1970년대에 토지소유자가 새마을사업을 위해 자기 땅을 희사한 것이 마을당 1700평이었다. 이런 利他的인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마을의 공동이익사업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마을의 간접자본을 축적해간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의 양성과 교육에 운동의 成敗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里長외에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두 명씩 추대하되 보수를 주지 않도록 했다. 보수를 받지 않는 지도자라야 좋은 사람이 추대되고 마을사람들도 잘 따라준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1971년부터 8년간 새마을사업을 위해 투입된 마을주민들의 무보수 노동일수는 매년 평균 1인당 8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놓고 회의를 하는 마을회관도 마을마다 서게 되었다. 주로 겨울철 밤에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전등불 아래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둑을 쌓는 일을 의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 원자력 발전이 시작되면서 농촌 電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마을 속으로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이 전국 농촌의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농민들은 민주주의를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보다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自助사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었다(朴振煥이 쓴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근대화와 새마을운동’).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여성들의 발언권과 참여가 높아졌다. 삶의 현장에서 농촌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이들이 주부이고 어머니들이었다. 여성들이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등장하는 곳이 점점 많아졌다. 1960년대부터 여공들이 섬유, 신발공업쪽으로 진출하더니 1970년대엔 드디어 농촌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새마을운동은 여성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 양성된 농촌의 지도자群은 그 뒤 농협과 지방자치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草家가 사라지다
  
   볏짚으로 이어진 초가지붕은 해마다 갈아입혀야 했다. 겨울철이 되면 이 일이 아주 큰 행사였다. 1970년에 전국 250만 농가의 약80%가 초가집이었다. 마을 안길을 정비하여 농가 마당까지 화물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게 되니 시멘트 기와 슬레이트로 초가지붕을 바꾸는 농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때 쯤 되면 초가지붕을 갈아입히는 작업을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농촌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草家 지붕들이 알룩달룩한 원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가장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였다. 
   농촌아궁이도 19공탄용으로 개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산에서 땔감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朴대통령의 강력한 入山금지 조치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도시에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가정용 연료가 가스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19공탄 수요가 줄어 농가로 퍼져갔다.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농촌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가시적 변화였다. 
   우물에 의존하던 농민생활도 개혁되었다.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간이상수도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계곡의 맑은 물을 저수탱크로 끌어왔다가 파이프로 이 물을 개별 농가에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비위생적인 食水로 인해 발생하던 전염병이 많이 줄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늘었다. 
   朴 대통령은 이 무렵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새마을운동성공사례 발표 때 “농촌에서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어디에 있는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라는 보고를 들었다. 朴대통령은 읍면단위로 보건진료소를 만들고 여기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견습의사와 간호원 한 사람씩을 배치하도록 했다. 
   1964년 우리나라 농민들 가운데 전등불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약12%였다.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農村電化사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에 가면 농민들의 98%가 전등불 아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를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의 약80%는 장기저리의 융자금으로 충당토록 했다.
   
   優秀마을 優先지원 정책이 성공의 비결
  
   1973년 6월11일 경제기획원이 주관한 월간경제동향보고에서 관례대로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 발표가 있었다. 朴대통령은 충북괴산군에서 온 朴周植 새마을지도자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을 끝내놓고 점심을 같이 드는 기분이 어떻더냐"고 묻기도 했다. 朴씨가 "옆마을에서 먼저 새마을 운동을 벌여 달라지는 것을 보고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朴대통령은 옆자리에 있던 金玄玉 내부장관에게 지시했다. 
   "金장관 朴 지도자 말을 잘 들었지요. 우수부락 우선지원의 원칙은 절대 수정하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 요인 중 첫째로 꼽히는 것이 "우수부락 우선지원"의 원칙이다. 가난한 마을 우선 지원이 아니었다. 잘하는 마을을 지원하니 못하는 마을도 분발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고, 시장경제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새마을 운동 시작 단계에서부터 朴대통령이 중시한 것은 지도자 양성 교육이었다. 1971년말에 朴대통령은 농림부 장관에게 새마을 교육의 지침을 내렸다. 
   "1년 사이엔 3만5000명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식의 조잡한 계획으로써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농촌개발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잘 선발하여 한번에 20~30명이라도 좋으니 2~3주 동안 오직 정신계발에만 치중하는 교육계획을 세워보라. 그와 같은 교육 분위기는 마치 참선하는 것과 비슷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교육장에 투입될 강사진으로 교수 종교인 명단이 올라오자 지워버렸다.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를 발굴하여 새마을 지도자로 하여금 발표하게 하고 그에 관한 토론을 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거요."
   朴대통령은 지식인의 공허한 관렴론보다는 새마을 운동 현장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農協대학 교수로 있던 金準씨가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의 원장으로 발탁되었다. 1972년1월부터 시작된 새마을 교육은 1973년부터는 수원의 농민회관을 교육장으로 빌려 쓰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새마을 교육을 위해서 법을 새로 만들거나 건물을 짓지 않고, 있는 건물과 인력을 이용하게 했다. 朴대통령이 지시한 성공사례 발표와 이에 대한 분임토의는 가장 선진된 실무교육이었다. 분임토의의 주제를 보면 "어떻게 하면 주민들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가 압도적으로 많아다. 
   새마을운동에 소극적인 사람들은 너무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 그리고 노년층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참여도가 높은 쪽은 마을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중년층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많은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인습의 굴레를 벗어난 여성들의 열정적인 새마을만들기 참여가 새마을운동을 全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고위공무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되었고 농촌새마을 운동이 도시, 공장새마을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마을마다 경쟁을 붙이고 교육으로 지도자群을 양성하고 무엇보다 여성들의 참여를 불러낸 덕분에 성공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성취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맞은 1998년에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새마을운동이 최대 성취로 뽑혔다. 응답자의 약 46%가 새마을 운동을 1등으로 꼽았고 37%는 서울올림픽을, 32%는 광주민주화운동, 16%는 4.19학생혁명을 꼽았다. 당시 각종 새마을운동 단체에 가입한 회원은 전국에 약 230만 명, 그 가운데 약 80%가 여성이라고 했다. 이 단체 회원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하는 경우는 수재나 화재 또는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큰 사고를 당했을 때이다. 이들은 몸으로 때우는 실천적인 봉사를 주로 하고 있어 사건과 비정상을 좋아하는 언론으로부터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 제5공화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의 총수로 임명함으로써 새마을 하면 관변단체라는 선입감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여당에선 선거 때만다 새마을 운동 조직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대통령은 이를 막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퇴임한 뒤에도 새마을 운동은 살아야 하며 그럴려면 정치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인간을 도와주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고기를 던져주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낚시법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새마을 운동은 농민들에게 낚시법을 가르쳐주는 식이었고 김영삼의 농어촌 구조개선은 농민들에게 그냥 물고기를 던져주는 식이었다. 물고기를 공짜로 받은 사람은 우선은 배를 채우겠지만 하루만 지나면 또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낚시법을 배운 사람은 하루는 고생을 하겠지만 영원히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 
  
   부록: 경북 청도권의 여성 새마을 지도자 곽영화 手記에서 발췌
  
   <전에는 저를 비웃고 헐뜯는 사람들이 지금은 태산 꼭대기에 올려 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곽영화를 지도자로 세워 가지고 새마을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80호가 살고 있으면서 他姓(타성)은 불과 몇 집 안되고 전주 李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으면서 양반만을 철저하게 내세우는 아주 깊은 산꼴짜기의 답답한 고을입니다. 
   항상 一家끼리만 뭉쳐서 살아온 탓인지 남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집안 간에는 절로 의뢰심이 지배해 왔으면서 自助(자조)란 전혀 모르고, 협동을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공부를 해서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전부 도시로 나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들뿐이었으니 도저히 그 속에서는 나의 체통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마을 사람들이 늦게야 잠에서 깨어난 듯이 새마을 사업을 하자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날로 간부급을 뽑고 기존 어머니회를 바탕으로 해서 회원을 모아 보았습니다. 전체 회원은 36명이 되었습니다. 
   節米(절미) 저축으로 하루에 쌀 세 주먹씩을 저축한 것 가지고 1년 통계를 해보니 4만3천원이었습니다. 1970년도까지 계속한 것을 보니까 25만8천원이며 백미가 31말 9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염원이자 어머니들의 보람인 교량 공사를 하자고 의논을 했지요.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속히 하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어머니 회원들은 리어카에 자갈을 실어 나르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시작한 지 한 달도 못가서 완전 개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어머니 회원들은 자신이 생겼는지 이동구판장 사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풍각 시장에까지 가려면 십리길을 가야 하고 장에 다녀오면 그 날은 일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비조합 회원 60명을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1인당 1백원씩을 출자해서 6천원을 모아 가지고 생활필수품 중 비누, 미원, 성냥 등 손쉬운 것을 사다가 회원의 가정으로 돌려가면서 팔기로 했지요. 1년 동안을 팔아 통계를 내보니 원리금 2만4천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원들은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물건도 더욱 많이 사다가 팔게 되니 이익금도 많이 남게 되더군요. 1974년도까지 원리금 통계를 내보니 15만5천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깐 우리 마을에도 본격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회의 때마다 내 가정에서 몸소 실천하고 체험했던 것을 이야기도 해주고 협동과 단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충실하게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節米저축금 10만원과 부락 자체부담 95만원을 들여서 도합 백1백5만원으로 전기가설 공사를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전깃불을 켜게 되었고, 전화도 동시에 끌어들였습니다. 지금은 전화 있는 집이 일곱 집이나 되고 텔레비전 안테나가 집집마다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량건물 7동을 헐어버리고 새 집으로 다시 지었으며 초가 지붕도 전부 슬레이트나 기와로 단장을 했습니다. 안 길을 넓히는 데에는 서로가 자기 골목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골목에는 한 아저씨가 반대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못 고치고 있습니다만 머지 않아서 그분도 뉘우치고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마을 창고와 구판장을 짓는 데는 군청으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보조받고 나머지는 자체부담에, 어머니회 기금을 보태서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 작업장으로 사용하던 동답 4백 평을 개간해서 뽕나무 1천2백 본을 심어서 누에 소득 15만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당산제를 지내느라고 많은 물질을 허비했는데 지금은 당산제를 철폐했습니다. 감히 기초 자립마을도 생각을 못했었는데 지금은 우수 자립마을로 선정이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1백60만원의 자부담으로 폭 5m 길이가 1천2백m인 산업도로 공사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고추 건조실과 도정공장, 또 마을회관 상수도 설치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을 근처에 타지에서 술집 색시가 들어와서 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들이 자꾸만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집에 와 술주정을 하면서 아내들을 못살게 한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일렀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내 돈 가지고 술 먹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하면서 자기 남편 없으면 그만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에 어머니 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다음에는 근처에 있는 다섯 마을 어머니들을 찾아서 의견을 이야기했더니 협조해 준다고 하면서 쾌히 응낙을 하더군요. 그래서 다섯 마을 어머니들과 함께 술집에 갔습니다. 색시되는 사람한테 좋은 말로 타이르면서 우리 새마을에 협조 좀 해 달라고 어머니들의 뜻을 이야기했더니 색시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 떠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잘 사는 마을, 거짓과 허영이 없는 마을로서 협동하고 단합하여 알찬 마을 다듬기에 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새마을 여성 지도자로서 성실하게 일해 왔으며 푸른 녹색의 장원이 되기 위해서 내 전체를 바치며 힘 있게 살아 왔습니다. 마을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놓아도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것도 없어도 정신만 바로 살면 다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습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