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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출생 100주년을 기해 명지대학에서 학술포럼이 있었다.
    (이 자리(에 가지는 않았다).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논문
    “박정희 모델의 의의와 재평가”가 눈에 띈다.
    논문의 핵심인즉, 박정희 모델 성공의 비결은
    정부-기업-근로자들의 자발적 유인(誘引)을 이끌어낸 점이라 했다.

     흔히 ‘박정희 방식’에 대해선 강제력의 측면만 강조했지,
    자발적 협력의 측면은 도외시해 왔다. 강제력의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그것뿐이었을까?”라는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이 영훈 교수에 의하면 1960년대에 시작된 대외 지향적-수출주도형 산업화, 그리고
    1970년대 시작된 중화학공업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데는
    단순한 강제력만이 아닌, 근대화를 향한 국가-기업-현장 근무자들 3자의 합심(合心)이
    있었다고 한다.
  •  필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이런 비판적-비관적 견해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그 어떤 열기(熱氣)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5, 16 이전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무(無)변화에 식상해 있던
     때와는 달리, 무언가 전례 없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눈코 뜰 사이 없이
    학교 나와 취직하고, 출근하고, 일에 미치고, 바쁘고, 회사 이야기에 여념이 없고,
    해외 마인드를 갖게 되고, 신용장(L/C)이 어떻고 어떻다 하고, 중동엘 나가고,
    서울근교가 개발돼 내 집을 마련하고, 냉장고를 사들이고, 텔레비전을 사고,
    보너스라는 걸 타보고,.. 하며, 마치 서부(西部) 개척이라도 하듯
    매일 매일을 열성적으로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강단(講壇) 지식인 다수는 시종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고 비관적이었다.
    박정희대외지향성은 종속화의 길, 외채망국의 길, 부익부-빈익빈의 길이라 했고,
    박정희 정치는 배제(exclusion) 일변도의 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근대화 관료, 전문가(expertise), 기능인, 기업인, 경영인,
    직장-시장-산업현장-무역현장-작업장 종사자들은
    2교대 3교대로 팽팽 돌아가는 일과를 밟느라 ‘바쁘다 바뻐“ 하며
    "죽으려 해도 죽을 시간이 없다"는 식이었다.

     강단 지식인들은 자유시장주의, 대기업 주도, 차관(借款)경제의 비(非)민족주의적이고
     ‘매판적’인 성격을 질타했지만, 근대화 작업 현장에서는 역사상 처음 접해보는 지구경제권(圈)의 광활한 지평 앞에서 왕성한 '자본주의적' 성취욕을 폭발시키고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고도성장의 성공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비관적 관찰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부-기업-산업현장 종사자들의 열심, 헌신, 부지런함, 의지, 보람, 도전,
    할 수 있다(can do) 정신의 합작(合作)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비판적 지식인들에겐 실망스러운 것일 수 있다.

     언젠가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가 한 말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아 글쎄 대학엘 들어가 보니 교수들마다 하는 소리가
    고속도로도 안 된다, 자동차 산업도 안 된다, 포항제철도 안 된다, 하며 말짱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말만 믿고 열심히 데모만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게 다 되었더라는 것이다.

     얼마 전 1970년대에 신문사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 5~6인의 월례 오찬 모임에서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그 동료는 필자의 대학 같은 과(科) 동문이고, 그 신문사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고 은퇴한, 아주 균형 잡힌 시각의 온건한 신사다.
    그 동료의 말은 그래서 불편부당(不偏不黨)-객관성-정확성에 많이 근접해 있다고 필자는 늘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박정희 근대화 성공했지. 한데 유신은 잘못했어... 유신을 해서 중화학공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있지만...이란 표현은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뜻일 게다.
     
     유신말기 필자의 상황은 어려웠다.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관활 정보과 형사가 찾아오고,
    대문 밖에 나서면 기관원이 차를 가지고 지키고 있다가 신문사에 실어다 놓은 때도 있었다.
    혹시 다른 데로 가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던 어는 날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하던 대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 국문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엉???

     10. 26 사태를 계기로 필자는 ‘박정희 시대’를 조기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결론은, 역사는 한 줄기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박정희 시대’도 그렇게 보기로 했다.
    '박정희 근대화'는 성공 스토리였다. 빛이었다.
    그건 종속의 길이 아니라 종속 탈피의 길이었다.
    정치리더-기업리더-현장 근무자들의 합심(이걸 이영훈 교수는 한국적 전통이라고 했다)의
    성과였다. 이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다며 ‘식민지 종속국’이니 ‘사대매국’이니 하는
    매도는 그만 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도 있다. 정보정치의 과잉탄압으로 국가가 분열되었다.
    그 분열은 지금 더 크게, 더 깊이 벌어졌다. 남미 군사정권들에 비하면 '박정희 시대‘ 탄압은 별것 아니었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시대(플러스 신군부 시대)의 그림자로 인해 좀처럼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고 아파하는
    영혼들이 있는 한, 우리 현대사는 그 뒷자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는 단독 강화(講和)를 한 셈이다.
    10. 26 당시 어머니, 어린 아들, 나 셋이서 아무도 모르게 박 대통령 분향소를 잠깐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 귀(貴) 영가에 대한 미움에서 오늘부로 벗어나려 합니다.
     ‘박정희 근대화’는 적중(的中)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 정치적 수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그의 영혼이 헤아렸기를 소망한다.
      
     지난 현대사에서 자성(自省) 해야 할 바가 있다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일국(一國)주의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넓고 한국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다.
    넓은 안목을 가지고 이 좁은 우물 속에서 제살 깎아먹는 소모전 좀 덜했으면 한다.
    ‘폐쇄적 민족주의’는 북쪽 김가네나 하라 하고,
    우린 보수를 하든 진보를 하든 글로벌하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박정희 100년’에 부치는 한 귀퉁이 소감이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 2017/9/21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