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진작가 한승원의 소설 <초의(草衣)>가 서점가에 선보인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킨 초의선사(1786~1866년)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다. 초의선사가 살았던 조선시대 말기, 이 땅에는 차(茶)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세 명의 위인이 살았다. <목민심서>라는 유명한 저서로 더 잘 알려진 대학자 정약용, 서예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가 그분들이다.
    존경하는 스승으로, 절친한 친구로, 평생을 사귄 세 사람. 가장 나이가 많은 정약용의 호는 다 알다시피 ‘다산(茶山)’이었다. 또 ‘추사(秋史)’ 혹은 ‘완당(阮堂)’으로 불린 김정희에게도 ‘다로(茶老)’라는 호가 따로 있었다. 그만큼 이들이 차를 즐겼고, 차를 통해 삶의 이치까지 터득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차는 중국 당나라 때의 학자 육우(陸羽)를 출발점으로 삼는 모양이다. 서기 804년에 타계한 그는 생전에 3권짜리 <다경(茶經)>이란 책을 저술함으로서 다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다신(茶神)’으로 추앙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16세기 후반에 다도가 붐을 이루었다. 도요토미의 집권기 20년 동안을 ‘모모야마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호화롭기 짝이 없는 성곽과 저택, 절, 신사가 줄지어 세워졌다. 또 이 같은 건축물의 내부를 사치스럽게 꾸미느라 그림, 풍속화, 도예, 칠기, 염직도 발달했다.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하드웨어를 설치하고 나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졌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일본식 다도였다. 다도가 붐을 이루다보니 도자기로 만든 찻잔의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을 때, 기를 쓰고 우리의 도공들을 붙잡아 간 까닭이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일본 다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년)이다. 그는 이전까지 일본에서 행해지던 다도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차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에게 발탁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그전까지는 넓은 장소에서 권위와 격식에만 치중한 다도가 있었다. 이름 붙여 ‘서원차(書院茶)의 세계’라고 했다. 센노리큐는 이것을 과감히 뜯어 고쳤다. 다실의 크기를 축소하고, 흙벽과 나무 기둥 등을 그냥 내버려둔 자연 그대로의 공간으로 꾸몄다. 이를 두고 ‘와비차(詫び茶)의 세계’라고 일컫는다.
    센노리큐가 지은 다실은 넓이가 다다미 넉 장 반 이하였다. 대략 다다미 두 장이 1 평가량이니까 3평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다실로 들어가는 문은 가로(=너비)가 66센티미터, 세로(=높이)가 69센티미터에 불과하여 흡사 개구멍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게 만든 까닭이야 있었다.
    좁디좁은 다실로 들어가 앉으려면 우선 자세를 낮추고 몸을 움츠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격식이나 허례허식을 버리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감을 뜻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공간’에서 오로지 한 잔의 차에만 몰입하자는 심미적(審美的)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센노리큐에 의해 상류 사회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일본의 다도. 그것을 ‘와비차’라고 칭할 때의 ‘와비’라는 말은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키워드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한(恨)’이라는 말을 꼭 집어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수월하지 않듯이, ‘와비’ 또한 일본인들조차 쉬 해설하기를 주저한다.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고작 이 정도가 아닐까?

    “가난함이나 부족함 가운데에서 마음의 충족을 끌어내는 일본인의 미의식. 실의에 빠진 생활 속에서도 세속을 벗어난 서글프고 한적한 삶에서 아취를 느끼고, 탈속(脫俗)에까지 승화된다면 그것이 곧 모자람의 미의식이다. 모든 것을 버린 가운데에서 인간의 본질을 붙잡으려는 정신, 그것이 와비다.”(히라이 히사시 平井久志)

    그러나 세상사란 참 묘하다. 모자람의 미의식을 바탕으로, 몸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예절을 깨우치는 다도를 크게 일으킨 장본인이, 끝내는 ‘다 채우고도 넘치는 욕심’ 탓으로 죽음을 맞았으니 말이다. 센노리큐는 최고 권력자의 다도 선생으로 우대 받는 사이에 권력에 맛들이고 돈에 맛들였다. 그의 입안에서 감미로운 차의 맛은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움을 사 자결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권력자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아부꾼들에 의해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이런 경우를 우리는 바로 우리 주변에서 여태 목격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경>의 다음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기는 게 좋으리라 여겨진다.

    “차는 행실이 한결같고 정성되며 검소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알맞다.”

    사족 한 마디, 다도처럼 일본에서는 길 ‘도(道)’를 붙이는 게 흔하다. 스포츠에서의 유도나 검도는 우리가 태권도라 하는 것처럼 똑같다. 서양의 기사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일본 특유의 무사도도 있다. 그런데 예컨대 꽃꽂이는 보통 ‘이케바나(生け花)’라고 하지만 거기에까지 구도(求道)의 뜻을 담아 가도(한자로는 華道 또는 花道)라며 길 ‘도’를 붙이는 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향을 피우며 즐기던 것까지 예전에는 고도(香道)라고 했다니 일본인들로서야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보다. 우리가 예술의 의미를 담아 서예라고 부르는 데 비해 그네들은 이 역시 서도(書道)라고 하는 것도 이채롭다.


    * 모모야마(挑山)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16세기 후반의 약 20년 동안이다. 미술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권력자로 떠올랐던 시기까지를 포함하여 아즈치(安土) 모모야마시대라고 부르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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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