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이토의 죽음과 병탄단행

    한국병탄을 위해 일본 정부가 기다리던 ‘적당한 시기’가 드디어 도래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Harbin)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토가 강조하고 ‘대방침’이 명시한 ‘적당한 시기’는 역설적으로 이토 자신의 죽음이 몰고 왔다.

    병탄의 '적당한 시기' 만든 이토의 죽음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꿈꾸었던 이토에게 한국통치의 실패는 커다란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국문제를 끝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정치적 경쟁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국내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에 뛰어 들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은 섬나라가 아니라 국제적 인물로서의 이미지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의 꿈은 여전히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적어도 동양의 이토 히로부미라는 명성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토에게 초대 남만주철도 총재로서 만주경영의 초석을 다진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체신성 대신)의 동양경영 제안은 너무나 달콤했다. “불출세의 위재(偉材)이고 한 세대를 압도하는 성망(聲望)을 지니고 있는” 이토로서, “한국이라는 작은 천지에 국척(跼蹐: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몰라 함)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대에 나가서 당대의 군웅과 세계정세를 의논하여 러시아 및 중국과의 국교를 조절”해야 한다는 고토의 유혹은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토가 고토의 권유를 받아들이자, 고토는 당시 러시아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재무상이면서 동양사무주관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코코프체브(V.N.Kokovtsev)와의 회담을 주선했다. 가츠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도 이토의 여행에 찬동하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동양의 이토' 명성의 꿈...러시아와 만주문제 담판

    이토는 10월 14일 오이소(大磯)를 출발하여 리훙장과 청일전쟁의 종장을 담판한 시모노세키 회담장인 슌파로(春帆樓)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데츠레이마루(鐵嶺丸)에 몸을 싣고 만주로 향했다. 그의 여행은 개인적인 ‘만유(漫遊)’처럼 보였고, 그도 그렇게 강조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만주문제를 러시아와 담판하여 일본의 입지를 굳히려는 목적이 있었다. 출발하기 전 그가 아들 분기치(文吉)에게 한 이야기나, 또는 가츠라 수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뜻을 읽을 수 있다. 이토는 아들에게 “지성은 귀신을 울게 하고, 천지를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이다”라고 훈계하면서, 매사에 성심성의를 다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주 여행에 특별한 사명은 없다. 그러나 중국이나 러시아와 장래 일본의 국제관계는 대단히 어려워 질 것이며, (이를 위해) 쉽지 않은 고심이 필요할 것이다. 하얼빈에서 바로 돌아올지, 중국에 들를지, 또는 유럽까지 갈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여행이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는 출발 직전 가츠라 수상에게 사신을 보내어 “외상(고무라 쥬타로)이 금명간 영국대사를 만나, 영국 정부의 의향을 들어봐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영국정부의 의향’이란 자신과, 러시아의 재무장관인 코코프체브와의 회담을 영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영국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추진하는 코코프체브와의 회담이 단순한 ‘만유’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만주를 달리는 특별열차에서 마지막 詩 읊어

    이토는  만주의 첫 기착지인 다렌(大連)에 18일 첫 발을 디뎠다. 그리고 러시아가 제공한 특별열차로 뤼순(旅順), 라오양(遼陽), 펑텐(奉天), 무순(撫順)을 거쳐 25일 창춘(長春)에 도착했다. 창춘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읊었다.

    萬里平原南滿洲(만리 평원 남만주)
    風光濶遠一天秋(풍광은 광활하고 원대한데 가을이 천하에 걸려 있네)
    當年戰跡留餘憤(지난날 전쟁의 흔적에는 아직도 분노가 남아있고)
    更使行人牽暗愁 (또 다시 여행자에게 어두운 근심으로 다가오네)

    이토는 깊은 학문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계기마다 많은 시를 지었다. 창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광활한 대지를 보면서 지은 이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병탄의 마지막 단계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Harbin) 역두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이토가 강조하고 일본정부가 기다리던 ‘적당한 시기’는 역설적으로 이토 자신의 죽음이 몰고 왔다. 이 ‘적당한 시기’를 맞아, 일본은 병탄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의 작업을 시작했다.

  • ▲ 일본 언론에 최초로 공개된 안중근의 얼굴 스케치.(<東京バック>1910.11.10).<br />스케치에는
    ▲ 일본 언론에 최초로 공개된 안중근의 얼굴 스케치.(<東京バック>1910.11.10).
    스케치에는 "雲知安. 이토 공을 암살한 흉한 운지안의 像. 이는 우리 회사가 특별히 확보한 것"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안중근 또는 안응칠의 이름이 왜 '운지안'으로 바뀌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토의 죽음은 일본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국외적으로는 병탄의 명분을 축적하게 됐고, 국내적으로는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이 강화됐다. 언론계에서는 ‘즉각적 합병’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됐고, 정계에서도 강경조치를 요구했다.

    이토 쓰러지자 일본 여론 '즉각 합병' 들끓어

    세이유카이(政友會)의 중진인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오타케 칸이치(大竹貫一),  <니로쿠(二六)신문>의 후쿠다 와고로(福田和五郞) 편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선문제동지회(朝鮮問題同志會)는 ‘병합’의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면서 강경 여론을 주도했다. 동지회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반도의 종주권을 확보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고식적 정책”에 매달려 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비밀결사와 음모 단을 조직하고, 폭도가 횡행하여 양민을 도탄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 당국에게 “근본적 해결을 위한 실행”을 촉구했다.
     
    이토의 장례식이 끝나자, 우치다 료헤이는 병탄을 성사시키기 위한 마지막 작업을 착수했다. 우치다는 일진회와 함께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도쿄로 불러 그에게 일진회의 이름으로 “합방청원서”를 작성할 것을 의뢰했다. 우치다와 스기야마는 다케다가 작성한 청원서 초안을 야마가타와 가츠라에게 전달하고, 일진회가 이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하면,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병합을 단행하는 형태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신바람난 우치다 "일진회는 합병청원서 올려라"

    스기야마는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따로 방문하여 청원서의 내용을 설명했다. 데라우치는 청원서에 동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행동방안과 대책을 지시한 메모를 스기야마에게 전달했다. 9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 이 메모에는, 일진회로 하여금 합병 청원서를 “총리, 국왕, 통감에게 제출”하게 하고, 청원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국인의 반대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고, 병합 드라마에 “시종 일본은 전연 관여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한국인들 단독으로 처리”한 것으로 하고, 일본 정부는 “태연하게 청원서의 제출을 기다려 처리하되, 장래 열강에 대한 대처 등을 사전에 심사숙고하여 그 대책을 강구”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합방청원서”
    우치다는 “합방청원서”를 지니고 12월 1일 서울로 돌아 왔다. 3파 제휴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이용구, 송병준, 다케다와 협의하여 일진회 단독으로 ‘합방’ 청원을 단행키로 결정했다. 그리고 “합방상주문”과 “합방청원서”를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일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12월 4일 한국의 황제, 총리, 통감에게 제출했다.

    일진회 "일본천황 은덕아래 행복을" 순종에게 합방 청원서
     
    황제에게 보낸 상주문에서 일진회는 한국과 일본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면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고 반드시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 합방은 한국인의 번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 합방이 성취되는 그 날은 한국 황실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시발점이라는 것, 그리고 이천만의 한국 민중이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황제가 합방에 동의할 것을 촉구했다.
     
     총리 이완용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일진회는 '한국이 현재까지 존립할 수 있던 것은 갑신 정변 후 일본이 사심 없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 한국인이 일본 민족의 구성 분자가 될 수 있다면 황실은 물론 온 국민이 자손만대에 걸쳐 축복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총리와 정부의 모든 각료는 ‘이천만 민중의 희망이 성취’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감 소네에게 보낸 청원서에는 일진회는 국민을 대신하여 일본 천황과 통감이 이천만 민중을 잘 보살펴 준 것에 감사한다는 것, 한국인도 일본인과 같이 ‘일등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 천황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통감은 일진회가 이천만 민중을 대표해서 일본 천황에게 간청하는 것이 성취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같은 날 일진회는 “동양 전체의 평화”와 “한국 황실이 영원히 존경받고 숭배 받을 수 있는 기초를 공고히”하며, “우리 인민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복리를 향유”하기 위하여 전개하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에 “이천만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슬프다 일진회야, 너희는 홀로 대한국인이 아닌가?"

    일진회의 합방 성명은 온 국민의 분노를 샀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연일 논설을 게재하여 일진회를 비판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고, 내각을 질타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그 첫 논설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슬프다 너희 일진회야, 너희는 홀로 대한국 인민이 아닌가. 오조약(을사오조약) 때에 불 붓는데 키질을 하였으며, 칠협약(정미7조약) 때에 물 깃는데 바람을 도왔음으로 일진회 석자만 들어도 국민이 이를 갈거늘 오히려 부족하여 이제 또 일종의 괴이한 선언을 지어내는가”(1909, 12, 5). 그러면서 “저 일진회는 한국이 한 치만 남아도 한 치를 멸하고, 한인이 일개만 남아도 일개를 죽이고자 하나니 동포들아 아는가 모르는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고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1909, 12, 8). 반일진회, 반병탄 운동이 나라 방방곡곡으로 번졌다.

    일진회에 선수 빼앗긴 이완용 "질투에 안달나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갈등
    일진회와 ‘병탄’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경쟁하고 있던 이완용도 병탄을 둘러싼 정치 소용돌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반정부운동에서 돌아선 대한협회를 사주하여 국민대연설회를 조직하여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대항케 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일진회가 제창한 합방성명은 한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크게 비난하며 공격”했고, 이어서 통감부와 한국 내각 앞으로 '비합방상서를 제출'하게 했다. 총리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일진회가 제출한 합방천원서를 모두 기각하였다. 물론 이완용이 일진회의 ‘합방’운동에 부정적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일본의 한국병탄을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다는 ‘병합’이라는 ‘대사 결행’의 주도권을 일진회에게 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합’의 주도적 역할을 일진회에 빼앗긴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의 지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정치적 입지의 약화를 의미하고 있었다. <매천야록>은 “완용이 합방론을 스스로 주장하려다가, 일진회에 선수를 빼앗겼으므로 질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집단의 ‘나라를 파는’ 주도권 쟁탈전은 치열했다. 

    이용구, 일본 총리에게 직접 합방청원서 제출

    수차에 걸쳐 제출한 합방 상주문과 건의서가 기각되자, 이용구는 12월 21일 합방을 간청하는 진정서를 일본의 가츠라 총리에게 직접 제출했다. 이 진정서에서 이 용구는 “동양의 평화와 한국인의 안녕을 위해 일본 정부의 즉각적인 합방 단행”을 촉구했다. 비슷한 내용의 진정서를 12월 28일 다수의 일본 중의원 앞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가츠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이 기다리는 ‘적당한 시기’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한국인의 병합요구’가 드디어 성숙되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조치
    1909년 말 이후 한국 내의 정국은 혼미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혼란하면 할수록 병탄을 위한 ‘적당한 시기’가 다가왔다. 일본 국내의 여론과 한국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주시해온 일본정부 당국은 “점차 국면이 성숙”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10년 2월 2일 가츠라 수상은 그동안 이용구와 송병준의 고문으로 실질적으로 일진회를 조정해온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일진회와 관련된 정부의 합병 정책을 알려주고 적절한 조치를 지시했다. 네 개항으로 만들어진 가츠라의 “일한합병처분안(日韓合倂處分案)”이라는 메모에는 “1, 일진회와 기타 단체의 합방 의견서는 적절히 수리하고 합방 반대 의견서는 모두 기각한다. 2, 합방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의 방침과 활동에 관한 것으로서 이에 대한 한국인의 어떠한 형태의 간섭도 용납하지 않는다. 3, 일진회가 오랫동안 친일적 지조를 지켜왔고, 온건하고 통일된 행동을 취해 왔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온 성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4, 위의 3조는 당국의 오해 없이 내훈(內訓)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일진회의 용도가 폐기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도면밀한 일본정부, 러시아-영국에 승인 재확인

    일본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고무라 외상은 2월에 재외공관장들에게 한국병합방침과 시설대강을 통보했다. 4월에 병탄실행의 최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러시아 측에 모토노 대사를 통하여 비밀리에 “한국병합의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러시아정부로부터 “하등의 이론이 없다”는 확답을 받았다. 5월에는 주일 영국대사에게 “병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다다르고 있다고 실행이 가까웠음을 통보했다. 5월 30일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소네 통감을 경질하고, 강경론자인 데라우치 육군대신을 통감으로 겸임 발령했다. 그리고 6월 3일에는 병합 후 한국지배는 초헌법적인 ‘천황대권’에 근거하고, 총독은 천황 직속으로 일체의 정무를 장악한다는 등의 13개 항목으로 구성된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각의에서 확정했다.

    '한국'을 '조선'으로 개칭...황실-양반등 유공자 표창 예산 책정

    같은 6월에 실무 관료를 중심으로 한 병합준비위원회가 설치됐다. 여러 차례의 심의 과정을 거처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조선인의 법적 지위, 황실의 존칭, 황족의 대우, 외국거류지의 처분 등을 포함한 21개항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확정하여 내각에 제출했다. 7월 8일 내각은 병합조약안, 조칙안, 선언안, 병합실행방법세목 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 유공자, 양반에 지급할 금액 및 일체의 선후책에 대한 비용으로 3,000만 엔의 별도 예산을 책정”했다. 송병준이 제시한 1억 엔의 1/3도 못돼는 돈으로 ‘한국을 산’ 결과가 됐다.

    데라우치, 이완용에 최후통고 "거부하면 송병준 총리시킨다"

     중요한 준비가 모두 끝나자 테라우치는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7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정치, 종교, 사회단체의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한편, 병합에 비협조적인 관리는 그 직책에서 해임할 뜻을 밝혔다. 8월 16일 테라우치는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의 뜻을 통보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일본정부는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동안 두 차례의 대전[청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수만의 생명과 수십억의 재산을 희생”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현재의 (보호)제도로서는 한국 황실의 안전과 한국인 전체의 복리를 증진할 수 없기 때문에 두 나라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정치기관을 통일하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병합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송병준으로 하여금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도쿄에 머물러 있던 송병준의 귀국을 지시했다.

  • ▲ '한국병합완성' (<日本及日本>1910.8.29). 병탄과 인연이 깊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토가 저승에서 만났다. 정한론의 창시자인 사이고에게 한국 병탄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토가 조선을 상징하는 닭을 저승에서 선물로 전달하는 그림.
    ▲ '한국병합완성' (<日本及日本>1910.8.29). 병탄과 인연이 깊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토가 저승에서 만났다. 정한론의 창시자인 사이고에게 한국 병탄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토가 조선을 상징하는 닭을 저승에서 선물로 전달하는 그림.


    8월22일 한국내각 즉각 병합안 통과...29일 양국 황제 동시 발표

    데라우치가 이완용에게 제시한 일본의 병합안은 같은 날 한국 내각에서 커다란 저항 없이 통과되었다. 그로부터 6일 뒤인 8월 22일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앞에서 제시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한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는 8조의 병탄조약이 이완용과 테라우치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8월 29일 조서와 함께 두 나라에서 공식으로 공포되었다. 일본 천황은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고, “제국의 안전을 장래에 보장”하고, 한국 내의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고, 민중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한국 황제의 “병합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한편 한국 황제는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온 나라의 모든 민생을 보존”하기 위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믿고 의지해 온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하는 것이니 온 국민은 “일본 제국의 문명과 새 정부에 복종하여 행복을 같이 누리리라”는 유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일본정부는 “한국은 이후 조선이라고 칭”하고,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한다는 칙령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로써 독립 한국의 역사는 중단되었고, 36년의 식민지 통치와 항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치다 료헤이 慶祝詩...매천 황현 詩 남기고 음독자살

    합병이 성사된 8월 29일 우치다 료헤이는 이 날의 기쁨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그림자를
    우러러 보리라.

       다른 한편 병탄의 소식을 전북 남원에서 전해들은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칠언절구 4수를 남기고 음독자살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鳥獸哀鳴海嶽嚬(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큰 산도 찡그리고)
    槿花世界己沈淪(무궁화 이 나라 이젠 망했구나)
    秋燈俺卷懷天古(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를 생각해보니)
    難作人間識字人(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려기만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