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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복 / 전 국회의원,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8월15일은 ‘광복절(光復節)’로 각인(刻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광복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국어사전>들은 ‘광복’의 의미를 “외국에 의한 점령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국어사전>의 정의(定義)에 따른다면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매우 혼란스러운 단어가 된다. 
  
1945년8월15일은 우리나라가 35년간 계속되었던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解放)’된 날인 것이 맞다. 그러나, 1945년의 이날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을 뿐 동시적(同時的)으로 “나라와 주권을 찾는 날”이 되지는 못했다. ‘독립’을 이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성취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15일이었다. 
  
우리는 매년 8월15일을 ‘광복절’로 경축한다. 언론보도(예컨대, <조선일보> 2013년8월16일자)에 의하면 정부는 작년(2013년) 8월15일을 “제68주년 광복절”로 기념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광복절’의 주년(周年)은 1945년으로부터 기산(起算)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45년8월15일에 이루어진 것은 ‘해방’이지 ‘독립’이 아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다면 우리나라가 기념하는 ‘광복절’은 ‘해방 기념일’이지 ‘독립기념일’이나 ‘건국절(建國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광복절’ 정의는 틀린 것이고, 정부의 ‘주년’ 기산이 옳다면, ‘광복절’은 ‘해방기념일’로 그 호칭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지 아니 하고 8월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기로 한다면 교육부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광복’의 의미를 수정해야 한다. 
  
이 같은 혼선(混線)은 대한민국이라는 ‘독립국가’에 ‘호적(戶籍)’상의 ‘탄생일(誕生日)’이 없는데서 초래되는 현상(現象)이다. 실제로는 대한민국에 어엿한 ‘독립기념일’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8월15일이 곧 그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특히 우리나라 역사 중 ‘근•현대사(近•現代史)’를 전공하는 국사학자(國史學者)들의 주류(主流)가, 1948년8월15일을 “대한민국의 독립기념일”로 받아드리지 않은 기상천외(奇想天外)의 현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사실은 그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즉 ‘독립기념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19년 3.1만세운동 후 중국 땅 샹하이(上海)에 모인 독립지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날인 1919년4월13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절’, 즉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어서 역대 대한민국 정부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이 문제에 관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 같은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 하면, 1919년4월13일 샹하이에서 있었던 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3년의 ‘몬테비디오 조약’(Montevideo Convention) 이후 국제법은 ‘국가’의 구성 요건으로 ① 국토, ② 국민, ③ 주권(主權) 및 ④ 타국(他國)과의 조약 체결권 등의 구비(具備)를 요구하는 것이 정설(定說)이 되어 있다. 1919년에 샹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네 가지의 ‘국가 구성 요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하여 이룩한 것은 오직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독립’은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자력(自力)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에 자리 잡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많은 독립지사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해방’은 그들의 힘에 의하여 쟁취된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을 무너뜨린 전승국(戰勝國)들이 합의한 ‘전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같은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한반도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남북 분단의 비운(悲運)을 마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 같은 ‘전후처리’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한반도의 ‘독립’은 1945년12월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의 합의에 따라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열렸던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의 ‘독립’을 실현시키는 문제는 유엔(United Nations)의 몫이 되었다. 
  
1947년11월14일 유엔총회는 미국의 주도 하에 상정된 “한국의 독립 문제”(The Problems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 감시 하에 인구비례 원칙에 입각하여 실시되는 자유 총선거”를 통하여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의 총회결의 112-II호를 채택하고 이에 의거하여 선거감시를 위하여 조직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한반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이 북한의 소련점령군에 의하여 거부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서의 총선거 실시가 불가능해 졌다. 이렇게 되자 1948년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소총회는 “우선 유엔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의결했고 이에 따라 1948년5월10일 38선 이남 지역에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하여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국회(制憲國會)는 7월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에 의거하여 8월15일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 날짜로 대한민국이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 점령 하에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9월9일자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독자적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한반도의 ‘국가분단’을 초래했다. 이 결과로 남북의 두 ‘분단국가’ 사이에서는 ‘정통성(正統性)’ 시비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이번에도 유엔이 심판역(審判役)을 담당하게 되었다. 
  
유엔총회는 1948년12월12일자로 역시 “한국의 독립 문제”라는 제목 아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상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선포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내용의 총회결의 제195-III호를 채택함으로써 “한반도 상의 유일 합법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합법 국가’로서의 승인을 거부했다. 
  
이 같은 당시의 상황 전개는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의 사실은 대한민국은 1948년8월15일자로 ① 국토와 ② 국민, 그리고 ③ 주권과 ④ 국제적 승인 등의 모든 요건을 구비한 ‘독립국가’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의 사실은 1948년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기 등장한 2개의 ‘분단국가’ 가운데서 대한민국은 당시 “한반도 독립”의 ‘산파역(産婆役)’이었던 유엔에 의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승인된 반면 북한은 ‘합법국가’로서의 승인이 거부되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이 표류를 계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호적 정리’는 1945년8월15일을 ‘해방기념일’로, 그리고 1948년8월15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1919년4월13일에 있었던 샹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독립 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기념일로 기념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통하여 금년에 정권을 장악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내년(2018)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으로 지정하여 기념하는 것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과 그의 추종세력의 노림수는 결국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희석시키겠다는 좌파 세력의 집요한 역사 왜곡 및 변질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에 내년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으로 지정하여 기념하려고 하는 이들의 기도는 애국시민들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저지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이 기회에 필자는 좌우간 이념대결의 쟁점이 되어 버린 ‘건국절’ 논란에 관하여 논란을 해소시키기 위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그것은 1948년8월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자는 주장을 거두어드리고 이 날의 명칭을 ‘독립기념일’로 하자는 것이다. 본래 ‘건국절’은 “민족국가 건설”의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이고 그 같은 뜻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개천절(開天節)’(10월3일)이 ‘건국절’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 특정 국가의 건국은 ‘독립’(Independence)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다 보편적이어서 영어로도 ‘건국절’에 해당하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 반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국가건설 기념일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로 기념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독립’은 일본에 의한 식민 강점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과는 상관없이 1947년 11월14일자 유엔총회 결의 112-II호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그 같이 이루어진 ‘독립’의 정통성이 1948년12월12일자 유엔총회 결의 195-III호에 의거하여 인정된 것이 부정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중국 충칭(重慶)에 소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5년의 해방 이후 ‘임시정부’ 자격으로 봉환(奉還)되지 못하고 구성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1948년 8월15일의 대한민국 탄생일은 ‘건국절’이 아니라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어 기념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이 제안에 대하여 국민적 차원에서 활발한 토의가 전개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