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릴 줄 아는 맹수'...때가 오면 전광석화처럼 덮친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주의자이면서 ‘점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이토는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늘 조심스럽게 정책을 다루어 나갔고 점진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만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가였다. 동시에 그는 테러는 물론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면 누구보다도 극단적이고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헤이그 사건’ 이후 이토가 취한 조치가 그의 이러한 일처리 스타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토가 헤이그 사건의 내용을 처음으로 보고받은 것이 1907년 7월 3일이다. 그는 이 사건을 ‘보호정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기에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고종을 협박하여 황제의 직을 양위케 하고(19일), 한국의 내치권을 장악하는 정미7조약을 조인하고(23일), 한국군대를 해산하고(31일), 그리고 한국의 내각과 통감부를 확대 개편하는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이토가 결코 온건주의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부서 차관을 일본인으로....'차관통치' 개시

    통감부 권력 강화
    전광석화와 같이 ‘헤이그 문제’를 처리한 이토는 한국지배를 위한 새로운 구상과 조치를 취했다.
    먼저 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통감부 권력을 확대하고 한국내각과의 관계를 신속히 재정비했다. 통감부에 부통감제를 신설하는 한편, 정미7조약을 근거로 한국 내각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했다. 8일 이토는 한국정부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내무(木內重四郞), 농상공부(岡喜七郞), 학부(俵孫一), 탁지부(荒井賢太郞), 궁내부(小宮三保松), 법부(倉富勇三) 차관과, 경무총장(松井茂), 경시총감(丸山重俊), 총세무사서리(永濱盛三)에 일본인을 임명했다. 이들 모두는 통감부의 참여관으로 겸임하면서 한국정부와 통감부의 일을 겸하했다. 소위 ‘차관통치’의 시작이다. 이로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실질적으로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되게 되었다. 이름은 ‘한국대신회의’였지만 실은 일본인이 움직이는 회의였다.

    "황태자를 일본 유학보내자"... 한국 황실부터 일본화

    이토가 보다 더 정성을 기울인 구상은 한국의 황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통감부의 제도개편과 확대가 내정장악을 위한 가시적이고도 즉각적인 조치였다면, 황태자의 일본식 교육은 한국 황실의 일본화를 위한 장기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 황태자의 일본인화는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상징하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황태자가 일본에 와서 ‘신교육’을 받는 것은 한국이 자립의 바탕을 마련하고 한일 두 나라의 영원한 화친의 자질을 배양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이다. 황태자의 일본행은 그동안 반일운동의 근원이었던 궁중을 묶어 두기 위한 ‘인질’이고, 멀리는 황태자를 ‘일본인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정미7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정부와 통감부의 체제정비를 끝낸 이토는 8월 초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기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출발 전 이토는 순종을 예방하고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주청했다. 순종에게는 이미 반대할 힘이 없었다. 또한 일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각료로 구성된 정부 또한 거부할 의사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 황태자 방한 먼저...."폭탄 날아오면 내몸으로 막겠다" 설득

    그러나 노회한 이토는 한국 황태자의 일본 유학을 보다 명분 있게 실행하고 반대 여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먼저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추진했다. 이토는 천황에게 일본 황태자(뒷날 다이쇼(大正) 천황)의 한국 방문을 상신했다. 이토의 전기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배일폭동”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천황은 “다소 난색”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토가 “신명을 걸고 호위하겠다는 적성(赤誠)을 피력하여 주청”하자, 천황은 황족을 대표하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신노(有栖川宮威仁親王)의 동행을 조건으로 내락했다. 이토는 즉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찾아가 양국을 위해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해야 한다는 뜻을 주장하면서 동행을 요청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로부터 “천황의 명령이라면 동행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토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감사의 뜻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언제 폭탄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그 때는 히로부미가 전하에 앞서 먼저 희생하겠지만, 전하도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토가 아니면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천황에게 황태자의 방한을 주청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리스가와노미야에게도 감히 이런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란한 환영행사....3천개 등불행렬에 기생악단까지 "만세"

    이토가 부통감으로 임명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3일이다.
    일본 황태자 일행은 10월 10일 도쿄를 출발하여 16일 인천에 도착하여 황제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날의 행사를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황태자 전하 도한(渡韓)시에 봉영 예절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 농상대신 송병준 3인을 고문으로 하고...대한문전, 종로, 수표 등 세 곳에 푸른 문[綠門]을 세우고 (황태자가) 입성(入城)시 종로에서 예포를 발(發)하고...시민회장이 봉영위원을 이끌고 큰 기를 앞세우고 남문 밖 정차장으로 행진하고 일반회원이 그 뒤를 따르고...제등(提燈)은 큰 등 한 쌍과 둥근 등(球燈)을 3천개 준비하고, 악대를 구성하고, 실업단, 노동단, 진신단(縉神團), 기악단(妓樂團)이 각각 1백 명씩 조를 편성하여 제등을 들고 황태자의 숙소까지 행진하여 그 앞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축하한다더라.”(1907. 10.11)  

  • 일본 황태자의 한국방문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伊藤博文, 有栖川宮, 한국황태자, 일본황태자. 뒷줄 오른쪽부터 조중응, 송병준, 桂太郞, 東鄕平八郞, 이완용, 이병무. 
    ▲ 일본 황태자의 한국방문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伊藤博文, 有栖川宮, 한국황태자, 일본황태자. 뒷줄 오른쪽부터 조중응, 송병준, 桂太郞, 東鄕平八郞, 이완용, 이병무.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위시하여 수상을 역임한 가츠라 다로(桂太郞) 육군대장,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해군대장 등이 황태자를 수행했다. 황태자는 정부와 통감부가 주관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한국의 황제와 황후, 황태자, 퇴위한 고종, 그리고 정부 요인들을 만나 훈장을 주고받는 등 의례적인 4박 5일의 국빈방문을 끝내고 20일 귀국했다. 

    순종, 이토를 '太子太師' 임명....한국 왕족 대우

    다음으로는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할 차례다. 그러나 한국 황태자의 일본 방문은 단순한 답방이 아니라 도쿄 유학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명목은 유학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인질이다. 순종은 11월 4일 왕세자가 도쿄로 유학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19일 이토 히로부미에게 “왕세자를 성심성의껏 지도하고 인도[保導啓沃]”하는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책을 맡겼다. 이토는 한국 궁정에서도 왕족의 대우를 받게 됐다.

    한국의 황태자 영친왕은 반일·배일운동이 나날이 격화되고 있는 1907년 12월5일 이토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대한매일신보>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는 영친왕의 일본행이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됐는지 상상할 수 있다.
    “황태자전하께서 일본으로 행계(行啓)하시기 전에 태황대폐하(고종을 뜻함)께서 궁내대신 리윤용씨에게 하교하기를 이등(이토) 통감과 교섭하여 동궁이 떠나기 전에 부자간의 정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같이 거처할 수 있게 하라고 했으나, 리윤용씨가 아뢰기를 교섭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태황대폐하께서 대단히 섭섭하게 여기셨다더라.”(1907.12.6)

    10살에 떠나 일본 육사까지...정략결혼으로 '일본 왕족' 된 영친왕

    1897년에 태어난 비운의 영친왕(英親王, 은垠-순종의 배다른 동생)은 1907년 고종의 강제양위 후 순종이 그 대를 이어가자 황태자에 올랐다. 그의 나이 10살에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의 인질로 서글픈 한 세상을 살았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철저히 일본인으로 교육받았다. 학습원과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처 1915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공주(한국 이름 이방자)와 정략결혼이 이루어 졌고, 부부 사이에 아들 구(玖, 1931년생)가 태어났다. 1935년 일본 육군 보병 대좌가 되어 우츠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을 맡았으며, 육군 사관학교 교관 및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수부장을 거쳐,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7월 일본 제1항공군사령부에 발령을 받았으며, 종전까지 제1항공군 사령관 및 군사참의관을 맡았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살다가 1963년, 혼수상태인 채로 56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70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 일본 옷을 입은 영친왕 李垠과 이토 히로부미. 
    ▲ 일본 옷을 입은 영친왕 李垠과 이토 히로부미. 


    모든 법과 제도를 일본식으로...'자치 진흥정책'에 총력

    ‘자치’진흥정책: 동화정책의 틀

  • 군복 또는 교복(?)을 입은 어린 영친왕과 이토.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간 일본은 그를 학습원(황족 귀족학교) 육군중앙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 황족으로 키웠다.
    ▲ 군복 또는 교복(?)을 입은 어린 영친왕과 이토.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간 일본은 그를 학습원(황족 귀족학교) 육군중앙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 황족으로 키웠다.


    정미7조약 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통감지배정책은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배양한다는 소위 ‘자치’진흥정책이다. 그가 추진한 자치진흥정책은 한국이 근대 국가형태를 갖추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태’만 근대였을 뿐 ‘실상’은 보다 철저한 한국의 일본 예속화였고 병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자치’진흥이라는 이름 아래 추진된 모든 개선정책은 법과 제도, 그 법과 제도의 틀에서 진행되는 사고와 행위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일본식’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화를 위한 식민정책의 기반을 보다 확고하게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황태자가 한국방문을 끝내고 돌아간 직후인 1907년 10월 26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제22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동안 헤이그사건 이후 중단됐던 대신회의가 5개월 만에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인 차관들을 임명한 후 최초의 회의이기도 한 이 모임에는 한국대신 전원, 새로 임명된 부통감, 일본인 차관, 그리고 통감부 고위관리 전원이 참석했다. 1909년 6월 통감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 넘게 이토가 열의를 보인 ‘자치진흥’정책은 크게 4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일본의 ‘감리와 지도와 보호’에 근거한 사법제도정비, 금융기관 설치, 교육진흥, 식산흥업이 그것이다.

    "한국의 법은 朝令暮改 昨非今是 錯雜紛更이라..."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로 사법제도의 정비를 강조해 왔다. 이토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법치국가라는 근대 국가로서의 위상 확립과 법에 의한 국민의 재산과 생명보호 보장, 그리고 치외법권의 종식이었다. 정미7조약의 비밀 각서에서도, “국가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률의 제정과 재판기관의 구성에 있고, 이것이 결여됐을 때는 국민의 신명재산(身命財産)의 보호를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한국의 법률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朝令暮改],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昨非今是]”, 재판기관의 구성은 “뒤섞이고 흩어져 있어[錯雜紛更]” “그 근원을 알 수 없는”것이었다. 또한 이토는 한국을 구속하고 있는 불평등조약의 치외법권을 종결하기 위해서도 사법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토는 대신회의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근본법 5법 편찬..."법과 조직 갖춰야 한국은 비로소 국가"

    본인이 (한국의) 법제도개선이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정개선을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치외법권의 철거를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상태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국가의 근본법인 5법, 즉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 및 재판소 구성법을 특종의 법률로 하여 일본법을 모범으로 삼아 잘 편찬 하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법률도 점차 완비하고 재판소 조직도 완성한다면, 본인의 생각으로는, 일본이 먼저 (한국에 대한) 치외법권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도 일본의 예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일반 한국인들은 아직 왜 법률이 필요하고 재판소를 왜 설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러한 (법과) 조직을 갖출 때 한국은 비로소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토는 내각 안에 법조사국을 설치하고 도쿄제국대학 우메 겐지로(梅謙次郞) 법학박사를 법률고문으로 초빙하여 법전편찬과 법관양성, 재판소와 감옥 신설을 서둘렀다. 그리고 1907년 11월 재판소구성법, 재판소구성법시행령, 재판소설치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재판소는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여 구(區)재판소, 지방재판소, 공소원 및 대심원의 4종류로 정하고, 대심원(1), 공소원(3), 지방재판소(8), 구재판소(130)를 설치”했다. 그리고 1908년 1월부터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에 8개 감옥(평양, 대구, 함흥, 공주, 광주, 해주, 진주)을 설치하여 일본인을 소장으로 임명하여 운영을 개시했다.

    법전-재판소-감옥까지 일본 모범따라...법의 식민지화

    이토의 사법제도 개선 주장은 옳다. 한국의 경우 사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했고, 또한 이토의 정책은 이에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근대국가로 인정받고 치외법권을 해소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과 법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일본법을 ‘모범’으로 한 법전편찬, 일본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재판소 설치, 그리고 일본인에 의한 법운영이라는 이토의 의도다. 일본법을 그대로 ‘모방’한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 및 재판소 구성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법사상, 법제도, 법운영 등 ‘법’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사고와 운영을 일본화하겠다는 의미이다. 즉 법의 식민지화이다. 해방으로부터 65년이 되는 오늘도 우리나라의 법에는 아직도 일본의 그림자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화폐제도 실시...각종 세금 부과...한국은행-동양척식회사 설립

    ‘자치’진흥을 위해 이토가 주력한 두 번째 영역은 금융제도를 근대적 기구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은행을 위시한 금융기관 설치를 계획했다. 통감으로 부임한 이래 금융·재정문제는 대체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재정정책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정미7조약이후 최초의 대신회의에서 이토는 “재정상의 문제는 그동안 통감이 직접관계하지 않고 전적으로 탁지부 대신과 재정고문이 협의하여 실시”했지만, “앞으로는 재정상의 일에 관하여 직접 알아보고 관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그는 그 후 화폐제도를 실시하고(1908), 세수증가를 위하여 황실재정 정리, 관세, 지세, 주세, 연초세, 가옥세 등을 부과하는 등 세제를 정비했다. 이와 병행해서 그는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1909), 지방금융조합(1907), 노업은행, 동양척식회사 등을 설립했다. 화폐주권의 상실로 경제권은 일본에 종속됐고, 금융기관과 그 운영 방법은 일본을 본받게 됐다.

    "학교 만들어 한국인 문명화"....교사와 교과서 모두 일본 복사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은 1895년 갑오개혁당시 교육입국을 강조했으나, 유학(儒學)에 바탕을 둔 한국의 교육은 주로 향교를 중심으로 서당에서 이루어졌다. 근대적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고 문맹률도 높았다.
    이토에 의하면 한국이 “쇠운(衰運)의 길로 접어” 들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근대적 교육을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한국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으나, 미래의 한국인을 계발(啓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를 만들고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교육을 받은 것과 교육을 받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큰 차이가 있다. 점진적으로 교육을 보급하고 오랫동안 실시하면 결국 한국인이 문명인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시급한 교육은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문맹자의) 인구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취학아동의 연령을 강제하는 국가의 의무교육을 강조했다. 이토는 한국 교육의 제도와 내용을 정비하기 위하여 도쿄사범학교 교수 미츠치 쥬조(三土忠造)를 학부참여관으로 초빙했다. 그는 일본을 준거로 삼아 교과서를 편찬하고,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제도를 정착시키고, 사범학교, 농림학교, 상업학교 등 각종학교를 만들어나갔다. 물론 근대교육의 교사는 일본인이고, 교육의 내용이나 교육 기법의 ‘모범’은 일본이었다.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일본화....동화정책의 창시자

    한국의 ‘자치’진흥을 위하여 이토가 중요시한 또 하나의 영역은 식산흥업이었다.
    메이지가 부국강병을 위하여 식산흥업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한국의 자치를 위해서 산업진흥과 자원개발을 위한 시책을 여러 방면에서 진행했다. 농림업의 진흥과 발전을 위하여 근업모범농장(1907), 광업법의 개정(1907), 동양척식회사(1908) 등을 통하여 식산흥업을 이끌었으나, 결국 이는 일본의 경제침략활동의 길을 열었다.

    이토의 ‘자치’진흥 정책은 그의 열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자치진흥정책이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실행의 주체와 실제의 수익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사법제도의 개선으로 인한 절대 다수의 법관과 법관계 업무는 일본인이 독점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송사로 인한 재판 결과 는 항상 일본인에게 유리했다. 금융기관이 설립되면서 중요 직책은 모두 일본인이 독점했다. 식산흥업의 대명사처럼 홍보된 동양척식회사는 실질적으로 착취기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학교교육은 일본인이 지배했고, 교과내용 또한 일본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수신’과 ‘일본어’를 중요시했다. 일본을 표준으로 한 ‘자치’진흥정책은 그 제도와 내용과 운영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일본화시켰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토는 동화정책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의병들이 신출귀몰....日露전쟁보다 한층 어렵다"
      
    이토의 통감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은 더욱 강화됐다. 일시적 현상으로 평가했던 ‘의병’활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격심해졌고 전국으로 확대됐다. 의병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하세가와 총사령관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은 “토벌부대가 우세할 때는 심산유곡에 잠입하여 머리카락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척후나 정찰과 같이 소부대라는 것을 알면 양민이 폭도로 변하여 농부도 쟁기를 버리고 갑자기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면서 의병이 “숨고 나타나는 것이 대단히 자유로워 작전 수행의 어려움이 일로전쟁보다 한 층 더 심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황실과 정부는 지배할 수 있었으나 민중의 마음은 지배할 수 없었다.

    일본 각계서 '反이토 세력' 등장...조기 병탄론자들 집결

    일본에서도시간이 가면서 이토의 통감부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실력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투자한 것에 비하여 수확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토의 점진주의와 자치진흥정책이 한국병탄에 기여하지 못했고, 오히려 강화되는 의병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더 많은 일본군의 파병을 요구할 정도로 잘 못됐다고 평가했다. 헤이그 사건 이후 일본의 정치권에서도 병탄을 포함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고, 여론도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 계에 흩어져 있는 ‘반(反)이토’ 여론을 한 데 모아 병탄의 추진력을 이끌어 간 중심 세력이 우치다를 중심으로 한 조기병탄론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