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된 민중의 항일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의 근대적 민중저항은 ‘폐정개혁’과 함께 ‘반외세’를 주장한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을사강제조약(1905)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의병항쟁을 본격적이고도 전국적인 무력항쟁으로 발전시킨 것은 헤이그 밀사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고종의 강제퇴위, 한국의 주권을 송두리째 앗아간 정미7조약(제3차한일협약), 그리고 이어진 한국군대의 해산이었다.

    고종 퇴위-군대해산에 격분...이완용 집 불지르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의병과 무장항일운동
    박은식은 의병을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는 민중의 의용군(義兵者民軍也 國家有急 直以義起 不待朝令之徵發 而從軍敵愾者也)”이라고 정의하고 있다(<韓國獨立運動之血史>). 즉 국가가 존망의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는 민중의 군대를 의미한다. 고종의 강제 양위(1907.7.20) 이후 한국 민중은 친일파로 구성된 정부를 믿기보다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일본에 맞서 독립을 지키려 했다.

    고종의 퇴위와 새로운 조약은 민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토와 함께 부임하여 11년 동안 통감부와 총독부에서 외사국장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병탄’과 식민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고마츠 미도리(小松綠)가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종의 퇴위는 “한국의 형세를 악화일로의 길”로 몰고 갔다.

    고종이 일본의 압력과 친일세력의 영합으로 강제 퇴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의 반일감정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고종의 양위가 알려진 20일 격분한 민중은 이완용의 집에 불 지르고, 서대문 밖의 경찰분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부대신 이병무의 집을 습격했다. 민중들은 또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윤전기 등 기물을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전동(典洞)의 시위보병 제 1연대의 한국군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벗어나 경무청에 발포하면서 일본 경찰관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민중시위와 무력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토 "황제 이름으로 군대해산-무력진압"...이완용에 발표 시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통감 이토는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21일 사이온지 총리에게 보낸 ‘극비’의 전문은 “현재 경성(京城)의 정황이 착잡하여 그 파급이 장래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하기 곤란함. 한국군대의 정황 또한 불온하여 어떠한 사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 가장 가까운 병영으로부터 혼성 1여단을 지급 파송”을 요청하면서, 지방에는 아직 서울의 소식이 전달되지 않아 비교적 조용하지만 “수일 후면 많은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다고 상황분석을 보고했다.

    민중의 분노는 한국군대 해산과 함께 ‘의병’이라는 조직적이고도 전국적인 무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토가 29일 일본 기자들에게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고, 또한 한국도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연설했던 것과 달리, 일본정부가 파견한 증원부대인 보병 제12여단이 서울에 도착한 7월 31일 한국군의 해산을 결정했다. 이토는 이완용, 이병무,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협의하여 정미7조약 체결 당시 비밀각서의 형식으로 합의한 군대해산을 단행하기로 확정하고,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칙을 발표케 했다. 이완용과 이병무는 황제의 이름으로 “한국 군대는 용병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경비와 능률에 지장이 있으니, 후일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기로 하고.....황실호위에 필요한 자만을 선발하고 그 외에 군대는 전부 해산”한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동시에 이토는 군대해산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국인의 무력저항을 진압하는 임무를 황제가 미리 통감에게 의뢰하는 조칙을 이완용으로 하여금 아울러 발표케 했다.

    보병대장 朴星煥 자결...'온 나라에 의병이 일어나다'

    8월 1일 한국군대의 해산이 단행되었다. 아침 7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각 부대 대대장 이상을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소집하여 이들에게 조칙을 전달하고, 해산에 적극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거행될 해산식에는 총기를 휴대하지 말고 집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성환(朴星煥)이 강압적인 군대해산과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자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강제로 해체 당하는 한국군인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해산식은 무력투쟁으로 바뀌었다. 한국군은 무기와 탄약고를 부수어 무장하고 궐기하여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전투에 돌입했다. 이로써 1910년까지 계속된 무력항쟁의 막이 올랐다. 해산된 군인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義兵)’을 조직했고, 이들의 항일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온 나라에 의병이 일어났다."

  • 1895년 이후 의병이 일어난 곳.
    ▲ 1895년 이후 의병이 일어난 곳.


    일본군 속속 증파...'헌병 통치' 본격화

    의병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본 정부는 종래의 1개 사단에 더하여 1개 여단을 파견하고, 이어서 10월에는 4개 중대의 기병파견대를 또 다시 증강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종래의 14헌병대를 강화하여 주둔군 사령부 예하에 소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가 지휘하는 조선주둔군헌병대를 설치했다. 아카시가 지휘하는 헌병대는, “치안유지에 관한 경찰을 장악”한다고 법령으로 규정하여 치안경찰과 군사경찰의 임무를 겸하게 했다. 1907년 말 현재 2,400여명의 헌병을 전국 460여개의 분서에 배치했다. 소위 헌병통치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1908년 5월에는 다시 육군대신의 명령으로 23연대와 27연대를 증파했다. 의병의 항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 총을 든 한국 의병의 모습. 
    ▲ 총을 든 한국 의병의 모습. 

     

  •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 일본군이 효수한 의병들. 
    ▲ 일본군이 효수한 의병들. 

     

  • 자위단 구성을 위하여 지방으로 출발하기 전 촬영한 간부진. 앞줄 오른쪽부터,<br />大賀八三郎, 岡本慶次郞, 須佐嘉橘, 內田良平, 이용구, 이용구의 모, 이용구의<br />딸, 武田範之, 高村謹一. 
    ▲ 자위단 구성을 위하여 지방으로 출발하기 전 촬영한 간부진. 앞줄 오른쪽부터,
    大賀八三郎, 岡本慶次郞, 須佐嘉橘, 內田良平, 이용구, 이용구의 모, 이용구의
    딸, 武田範之, 高村謹一. 


    이완용이 중심이 된 내각에서는 ‘자위단조직후원회’ 결성을 독려하는 동안,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자위단 조직에 필요한 조치에 박차를 가했다. 일진회의 간부와 우치다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낭인들은 11개 팀을 구성하고 각지에서 자위단 망을 구축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하여 11월 20일부터 지방으로 출발했다. ‘별동대’에 포함된 이용구,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도 일진회원을 이끌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군마다 자위단의 세포조직을 결성했다.

    이토, 이용구에 七言詩 선물 "장도를 격려하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위단 조직을 지휘하기 위하여 지방으로 떠나는 우치다와 이용구를 격려하기 위하여 따로 자리를 만들어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우치다에게는 자신이 10년 동안 아끼며 간직하고 있던 권총을 하사하고, 이용구에게는 7언절귀(七言絶句)의 시를 지어 선물했다.

  • 자위단을 이끌고 지방으로 떠나는 우치다에게 이토 통감이 선물한 권총. 
    ▲ 자위단을 이끌고 지방으로 떠나는 우치다에게 이토 통감이 선물한 권총. 

     

  • 이토 히로부미가 이용구에게 써 준 칠언시.(이용구의 아들 大東國男 소장). 
    ▲ 이토 히로부미가 이용구에게 써 준 칠언시.(이용구의 아들 大東國男 소장). 

    이용구 아들 "아버지는 숨질때까지 이 시를 좋아했다"

    韓山草木滿紅秋(한국의 산이 붉게 물든 초목으로 뒤덮인 가을에)
    把酒欽君試壯遊(술을 들어 장도에 오르는 군에게 경의를 표하네)
    交誼平生照肝膽(평생 마음을 터놓고 서로 교분을 나누었지만)
    別時何說別離愁(막상 헤어질 때 이별의 아쉬움을 어찌 말로 다하랴)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에 의하면 이용구는 “1912년 스마(須磨)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병실에 걸려있는 히로부미의 이 7언절귀를 보면서 감개에 젖었고”,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설명해준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