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2주년 기념] 文정부 바람직한 외교안보 전략은? ④미국이 원하는 한국은 대등한 친구
  • "지켜보고 있다!"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 수리'와 성조기. ⓒ美온라인 커뮤니티 화면캡쳐.
    ▲ "지켜보고 있다!"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 수리'와 성조기. ⓒ美온라인 커뮤니티 화면캡쳐.


    앞서 말한 주변국들의 동향, 한국 사회의 문제만 보면 답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게는 ‘정답’은 아니지만 한 가지 해답이 남아 있다. 바로 미국이다. ‘친미’니 ‘용미’니 하는 표현이나 생각을 넘어, 한국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생존하기 위해 힘을 빌려야 할 곳은 미국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미국에게 힘을 빌리기는커녕 내쫓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보인다.

    1953년 이후 미국에게 ‘받기만 한’ 한국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은 3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을 선두로 한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신생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3년 2개월간의 전쟁 동안 미군은 연 인원 178만 9,000여 명이 참전했고, 사상자는 10만 명을 넘었다. 참전 미군 가운데 5만 4,246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전사자는 3만 6,940명이었다.

    이처럼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자국 청년들의 피를 흘린 미국은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운데 제6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보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할 수 있다”는 부분 때문에 한국과 미국 간의 협의가 길어져 실제 발효는 1954년 11월 18일이 돼서야 이뤄졌다.

    이후 미국의 ‘한국 퍼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5년 5월 22일 ‘조선일보’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주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한국 경제는 전쟁 이후 미국과 유엔의 무상원조 덕분에 부흥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1953년 한국 국민소득 가운데 10%가 경제원조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1956년 13%까지 비중이 올라갔다고 한다. 한국의 전후 복구에 들어간 자금 가운데 90%가 원조였다고 한다.

    이영훈 교수는 전후 한국에 대한 원조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미국의 무상원조였다고 역설했다. 미군은 1945년 한국에 상륙한 직후부터 ‘정부 및 점령지 안정화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식량 부족, 전염병, 폭동을 예방한다며 밀가루, 비료, 의류, 석탄, 석유 등을 공급했다고 한다. 미군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에 원조한 금액이 4억 달러 가량이었다고 한다.

  • 1953년 10월 1일 변영태 韓외교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美국무부 부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전자정부기록관 화면캡쳐.
    ▲ 1953년 10월 1일 변영태 韓외교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美국무부 부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전자정부기록관 화면캡쳐.


    6.25전쟁 때에는 유엔을 중심으로, ‘민간구호원조’가 이뤄졌다고 한다. 헌 옷가지, 밀가루, 담요, 침대, 쌀, 소금, 고무신, 캐러맬 등 각종 원조 물자가 전쟁 때부터 1954년까지 4억 5,000만 달러어치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유엔은 피란민들에게 하루 쌀 360g과 현금 50원도 지급했다고 한다. 여기에 들어간 자금은 대부분 미국 돈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이후에는 미국이 한국 경제 부흥을 목적으로 1961년까지 모두 17억 4,000만 달러를 원조해줬다고 한다. 참고로 1953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다. 美정부는 또한 자국 농산물 가격 안정과 후진국 식량 원조를 위해 1954년 공공법 480조(PL 480)를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에 밀가루, 보리, 쌀, 돼지고기 통조림, 담배 등의 각종 농산물 2억 달러 상당을 원조했다고 한다. 미국이 이렇게 1953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에 원조한 금액은 모두 21억 달러나 됐다.

    미국의 도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 제2공화국이 들어섰을 때에도, 5.16혁명을 통해 제3공화국이 생겼을 때에도 미국의 대한원조는 계속 됐다.

    이영훈 교수에 따르면, 1950년대 전쟁 이후 정부가 미국과 유엔에서 받은 원조자금(달러)를 민간에 불하하고, 그만큼의 한국 돈을 받아 한국은행에 예치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국가 재정에 사용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국가 재정에서 이렇게 ‘원조 달러’와 한국 돈을 맞바꾼 것이 국가 예산의 40% 내외였다고 한다. 이 정책은 이후로도 이어져 1967년에는 해당 자금이 국가 예산의 20%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미 동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해석은 다르게 해 “한국은 태생부터 친미 사대주의적”이라거나 “한국 경제는 태생적으로 미국에 종속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의 모습. 이렇게 부산, 거제 등으로 온 피란민들은 미국과 유엔의 구호물자 덕분에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 블로그 화면캡쳐.
    ▲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의 모습. 이렇게 부산, 거제 등으로 온 피란민들은 미국과 유엔의 구호물자 덕분에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 블로그 화면캡쳐.


    그러나 한국이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5억 달러 상당의 차관을 종잣돈으로 들여오고,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을 키우고 수출 중심 경제 전략을 실행하기 전까지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수출 또한 세계 최대의 시장 미국에 판매할 수 없었다면 허사였을 것이다. 미국 덕분에 수출을 늘이고 급속한 경제 성장을 하는 구도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세계은행이 2016년 기준으로 발표한, 세계 GDP 순위 11위, 연 1조 4,112억 4,600만 달러의 경제 강국 한국은 6.25 전쟁 이후 미국과 유엔 회원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30년째 이어진 미국의 불만, 여전히 외면하는 한국

    1980년대 후반, 미국은 한국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 동맹국도 모두 대상이었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냉전을 통해 동맹국들에게 ‘퍼주기’를 하고 안보역량을 키워줬는데 정작 동맹국은 자국 경제성장에만 신경을 썼다는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美정부는 1988년 통상 무역법 301조를 별도 법률처럼 적용하면서 동맹국들을 위협했다. 사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일본과 독일이었다.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등 뒤에서 자국 경제성장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일본은 한국과 미국이 막대한 국방예산을 써가며 북한과 중국, 소련을 막는 상황을 즐기며 경제성장에 ‘올 인’, 거기서 나온 결실로 미국 기업과 부동산들을 사들이며 ‘돈 자랑’을 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의 경우 미국 기업을 인수한 뒤 일본식 문화를 강요하고 미국인들에게 ‘상전’처럼 굴면서 미국 내 반일정서는 매우 격해졌다.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를 절상하는 ‘플라자 합의’를 했고, 경제에 거품이 끼는 데도 이를 방치하다 1990년대 초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국은 일본의 몰락을 보면서, 일본 거품 경제가 왜, 어떻게 생겼는지를 연구하고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고소하다”며 남의 일 인양 여겼다. 문제는 전후 수십 년 동안 일본을 따라하며 고속성장을 하던 한국기업들 또한 일본기업의 문화와 행태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1993년,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그동안의 성장 과실을 따먹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국제금융을 모르는 금융기관들이 정부 말만 믿고 해외에서 저금리 단기자금을 차입해 ‘돈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 간의 ‘플라자 합의’, 통일 비용으로 재정 적자가 커져가던 독일, 소련 해체로 인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분열과 갈등, 중국의 ‘세계 공장’ 부상 등과 같이 세계 경제 질서가 개편될 조짐들이 보임에도, 당시 한국은 정부나 기업 모두 ‘바깥세상’을 외면했다. 미국의 통상압력 또한 단순한 무역 갈등 정도로 생각했다.

  • 1997년 11월 22일자 '조선일보' 1면. 그 이전까지도 한국 언론들은 정부의 말만 믿고 "외환위기가 아닐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닷컴 과거신문 아카이브 화면캡쳐.
    ▲ 1997년 11월 22일자 '조선일보' 1면. 그 이전까지도 한국 언론들은 정부의 말만 믿고 "외환위기가 아닐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닷컴 과거신문 아카이브 화면캡쳐.


    그 결과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돼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을 휩쓴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뒤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기를 바랐지만, 한국은 그러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만큼 거대한 경제규모가 아니라고 해도 일단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한미 FTA 체결’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며 들어선 DJ정권과 이어진 盧정권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기 보다는 “한국의 이익이 곧 세계의 이익”이라는 식의 논리로 미국의 요구에 맞섰다. 2005년 당시 盧정권은 미국의 분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다. 盧정권은 공식적으로는 ‘한미 FTA’에 찬성, 2007년 4월 협정을 체결했지만,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한미 FTA’는 결국 협정을 체결한 지 4년이 지난 2011년 11월에야 국회에서 비준을 받고 정식 발효됐다. 이 과정에서도 미국은 사실 한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농축산물과 자동차, 금융, 부동산에 대한 부분이 그랬다. 

    카터와 트럼프의 공통점 “한국, 너희가 진짜 친구냐?”

    다시 과거로 돌아가, 1976년 11월 대선에서 이긴 지미 카터 美대통령은 소위 ‘진보’ 성향이었다. 그는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로 주한미군 완전철수를 내걸었다. 이유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가 한국인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터 美대통령은 자국 내에서도 냉전 당시 소련과의 대결구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권’과 ‘양심’을 내세워 중남미 군사독재정권과 공산정권 치하의 반군을 지원하던 美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을 대거 숙청하고 비밀공작 부대들을 해체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런 카터 美대통령에게 당시 좌익 인사들을 숙청하던 박정희 정권은 ‘악의 축’처럼 보였고, 한국이 자신의 신념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 11월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이런 비난과 요구는 사라졌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美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 이번에는 이유가 달랐다.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고 늘 자랑하는 한국은 왜 아직도 미국의 군사자산에 안보를 기대고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트럼프 美대통령은 미국의 안보역량 강화를 언급할 때마다 한국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언급했다. 미국과 만날 때면 항상 도움을 요청하면서 빈국 앞에서는 ‘돈 많다’고 자랑한다는 점이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공통점이었다.

  • 도널드 트럼프 美대통령의 대선 유세 구호.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 목표는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유튜브 화면캡쳐.
    ▲ 도널드 트럼프 美대통령의 대선 유세 구호.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 목표는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유튜브 화면캡쳐.


    현재 트럼프 정부의 기치는 “다시 위대한 미국으로”이다. “미국 정부의 일은 미국 국민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그 내용이다. 구체적인 목표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 서방 진영을 먹여 살릴 정도의 역량을 갖고 있던 미국의 부활이다. 이를 위해서 미국은 금융시스템이던 외교력이던 군사력이던 모두 활용하겠다는 게 트럼프 정부의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손봐주겠다는 생각을 밝혔고,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테러조직 ‘대쉬(ISIS)’와 북한 김정은 정권이다.

    트럼프 美대통령이 취임한 지 9개월 가까이 되어가는 현재, 한국을 향한 그의 발언은 크게 순화되었지만, 북한을 향한 엄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북한에 대한 엄포는 한국과 중국에게도 영향을 주는 내용이 많다.

    트럼프 美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부터 당선,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한국, 너희가 진정 미국의 친구가 맞느냐? 친구라면서 왜 친구가 어렵다는데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상징적 구호가 ‘우리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라는 점은 트럼프 美대통령이 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는지 생각하게 한다. 한국을 향해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도 아니면서 어떻게 영원히 같이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보는 한국, 과연 미국의 ‘친구’ 맞나?

    2016년 1월 핵실험, 2월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를 시작으로 2017년 9월까지 이어진 북한의 도발과 한국, 미국, 일본을 향한 협박은 트럼프 美대통령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특히 김정은 정권이 미국을 향해 “불로 미제를 응징하겠다”거나 “괌을 탄도미사일로 포위공격 하겠다”, “우리에게는 美본토를 핵공격할 수단이 있다”는 협박을 내놓은 것은 트럼프 美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협박과 도발을 하자마자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맞서면서 “한국은 친구인 미국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라고 미국 측에 위로의 말이라도 했다면, 트럼프 美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현실에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한미정보자산으로 북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일부 정치인은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전력을 당장 도입하겠다는 뜻은커녕 미국이 주한미군 부대로 보낸 요격체계 ‘사드(THAAD)’의 배치까지 방해했다.

  • 지난 10월 9일 MBN의 청와대발 보도 화면. 또 '예의주시'가 나왔다. ⓒMBN 관련보도 화면캡쳐.
    ▲ 지난 10월 9일 MBN의 청와대발 보도 화면. 또 '예의주시'가 나왔다. ⓒMBN 관련보도 화면캡쳐.


    한국 정치권 일부는 북한의 핵공격 위협이 커지자 “美전술 핵무기를 주한미군에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여당은 “전술 핵무기 재배치는 불가하다”거나 “6자 회담과 같은 대화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이끌어 내야 한다”면서 “대북압박과 인도적 대북지원은 별개이므로, 기회가 되면 북한을 도울 것”이라고 떠들었다. 이 두 가지 의견 모두 미국 입장에서는 대단히 기분 나쁜 말이다.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따라 대부분의 전술 핵무기를 폐기했다. 현재 보관 중인 것을 합쳐도 1,000여 기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이 “필요하니까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한국이 전술핵무기를 우리에게 맡겨놨느냐”며 어이없어 하는 반응은 그나마 양반일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주장은 트럼프 美대통령과 그 측근들에게 ‘한미동맹’을 재고하게 만들 수준이다. ‘美-北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을 내보낸 뒤에 적화통일을 하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북한 김정은 정권과 ‘대화’로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을 멈추게 만든다? 게다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비롯해 미국, 일본, 호주, EU 등이 제재를 통해 김정은 정권의 외화벌이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지원한다?

  • 지난 6월 13일 한미연합사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방명록에 쓴 글. '같이 갑시다!' 구호를 반복, 강조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난 6월 13일 한미연합사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방명록에 쓴 글. '같이 갑시다!' 구호를 반복, 강조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난 25년간 북한과의 대화는 무용지물이었다”는 트럼프 美대통령의 이야기 속에는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비롯해 2003년부터 이뤄졌던 6자 회담, 한국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모두 들어 있는데도, 한국 정부와 여당은 이해를 못하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이처럼 지금 한국 안팎에서 나오는 뉴스만으로 평가하면, 트럼프 美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정권을 압박함과 동시에 이를 중국을 움직일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데 한국이 그 사이에서 ‘친구답지 않게’ 어깃장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와 미국인이 원하는 한국은 ‘진짜 친구’

    현재 한국 언론에 나오는 전문가들, 여의도 국회에 있는 의원과 주변 사람들, 청와대와 정부 주요 부처 관계자들은 트럼프 정부를 움직일 묘안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들이 트럼프 정부 대응전략을 마련하면서, 전통적인 ‘워싱턴 정치인’을 상대한다는 전제를 깔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美대통령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장에서 만난 미국인들의 목소리다. 자신이 세계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점을 대놓고 강조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에 출마하게 된 것도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준 미국과 미국 국민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런 사람에게 어설프게 ‘세계 평화’니 ‘동아시아 지역 안정’이나 ‘혈맹’이니 하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들이민다고 그게 먹힐까. 

    영국과 호주, 일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트럼프 美대통령의 개성을 재빨리 파악해 ‘맞춤대응’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계속 ‘구한말 훈구세력’ 같은 ‘공자님 말씀’만 내놓으며,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착각하고 있다.

    지금 미국이 한국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북한 김정은 제거하면 너희는 뒤처리 하라”는 게 아니라 “너희들 주장대로, 한국과 미국이 피로 맺어진 동맹이고 전우라면 앞장서서 싸워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트럼프 美대통령의 스타일대로면 “한국이 친구라면, 친구답게 미국의 어려움을 덜어줘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인과 언론, 기업 가운데 미국을 ‘진짜 친구’로 여기고, 그 어려움을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이가 몇이나 있는지 한 번 돌아보면 트럼프 시대의 한미 관계가 보일 것이다.

    ‘⑤문재인 정부 “외교안보만큼은 최고였다” 소리 들으려면’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