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배신행위 용서못해" 신속한 새 조약 체결 압박

    고종의 양위식 다음 날인 21일부터 23일 사이에 통감부와 일본 외무성은 바삐 움직였다.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는 새로운 협약을 만들기 위한 많은 전문이 오갔다. 이토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근거로 하야시 외상과 협의하여 작성한 새로운 조약의 안을 24일 이완용 총리에게 전달했다.
    ‘기밀문서’로 보낸 조약안과 함께 이토는 다음과 같이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일본제국정부는 지난 1905년 11월 일한협약체결이래 더욱 더 양국의 우의를 존중하고 조약상의 의무를 성실히 준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누누이 배신행위를 감행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인심이 격앙되고, 또한 한국의 시정개선에 막대한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장래에 이러한 행위의 재연을 확실히 저지하고, 동시에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별지의 협약을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바이다. 본건은 대단히 긴요한 사항이므로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다. 본인은 이미 제국정부로부터 언제든지 약정에 조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았으므로 귀하의 신속한 의견을 바라는 바이다.” (日本外交文書)

    이토 통감 '대한제국의 면류관없는 제왕 되다'

    같은 날 일본이 요구하는 내용대로 새로운 조약이 이루어 졌다. 정미7조약 또는 제3차협약으로 알려진 새로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시정개선, 법령제정과 행정처분,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모두 통감의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해야 하고,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채용할 수 없게 했다. 모든 권한은 실질적으로 통감에게 집중됐다. <대한매일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일본 통감이 이 대한제국 안에서 면류관 없는 왕이 된 것”이다.(1907.7.27)

    행정-사법권 장악, 군대 해체까지..."주권 완전 상실"

    이것은 다만 공개된 내용일 뿐이다. 통감 이토와 수상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비공개 각서’는 자세한 실행내용이 들어 있다. 즉 (1)대심원, 공소원(控訴院), 지방재판소를 신설하고 주요 직책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2)감옥을 지방재판소 소재지에 신설하고 형무소 소장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3)한국군대를 정리하는 것, (4)고문 또는 참여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에 용빙(傭聘)된 모든 사람을 해용(解傭)하는 것, (5)한국정부의 각 차관과 내무부 경무국장에 일본인을, 또한 각 지방청 관리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등 내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장치를 만들었다. 사법과 행정권을 직접 행사하는 ‘고등관의 부서’를 완전히 일본인이 독점하고, 군대까지 ‘해체’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사실상의 주권을 상실했다.

    일본군에 겁먹은 덕수궁...이완용 "폐하, 망설이면 큰일 납니다"

    7월 25일 서울발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은 새로운 조약이 “이처럼 간단하고도 신속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는 “엄격하고 치밀한 우리 군대배치와 경찰의 행동에 궁중이 몹시 두려워서 떨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완용총리의 역할이었다. 즉 이완용은 24일 밤 이미 물러난 상황(고종)을 알현하고 “만일 폐하가 일본의 요구에 이론을 제기하고 망설일 경우 일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전폭적으로 용인하는 이외의 길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완용은 알현한지 40분 만에 ‘재가(裁可)’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대한 정미7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위협과 친일세력의 영합으로 이루어 졌음을 보요주고 있다.  
     
    조약이 알려지자 통감부의 검열로 일부 삭제된 <황성신문>의 논설은 한국인에게 국혼(國魂)을 다짐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왜 우리만 노예 되었나? 2천만이 '대한국혼' 없기 때문이다"
     
    “못살겠네, 못살겠네, 진실로 살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면 득생(得生)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망망(茫茫)하기만 하다. 세월아 너 가지마라. 네가 가면 우리는 늙어 종 된 나이만[奴齡] 싸여간다. 아, 슬프다. 무정한 세월[光陰]은 빠르기 이를 데 없어 흐르는 물과 같고 달리는 말과 같아 쉬지 않고 재촉하는구나.
    광무 9년 11월 18일[을사강제조약을 뜻함]이 벌써 삼년이 흘렀네. 기가 막히고 가슴이 미여지네. 우리 노예의 나이가 벌써 3년이란 말인가. 지금 20세기는 곧 평화의 세기라 남들은 희희낙락하면서 다 잘 사는데 다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참혹한 처지에 놓여있는가? 땅이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화려한 3천리 강토가 모두 백옥과 같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2천만이면 충분하고, 더하여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여 황인종가운데 상등(上等)이라 할 수 있다. 토지의 물산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금은동철과 오곡백과, 삼포(蔘圃)와 삼림과 어채(魚菜)가 가는 곳마다 흥성하고 심는 곳마다 번성한다. 이처럼 화려한 강토와 상등의 인종과 풍부한 물산을 가지고도 천층(千層) 지하에 떨어져 남의 노예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2천만 동포가 각각 대한국혼(大韓國魂)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혼이 없으면 죽는 것과 같이, 국민에게 혼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나라 혼[國魂]이 있는 나라에는 자유와 독립이 있고, 나라 혼이 없는 그 나라는 노예와 어육(魚肉)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 '대호국혼(大呼國魂)' 논설을 게재한 <皇城新聞>.(1907.7.31)
    ▲ '대호국혼(大呼國魂)' 논설을 게재한 <皇城新聞>.(1907.7.31)

     

    '신문지법' '보안법' 공포...외국 특파원들 몰려 들어 

    이토는 여세를 몰아 27일에는 한국 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을, 그리고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공포했다. 한국인의 여론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조치를 처리한 이토는 29일 저녁 언론인들을 일본인구락부(日本人俱樂部)로 초대했다. 당시 서울에는 헤이그 사태 이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취재하기 위한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리들을 배석시킨 이 자리에서 이토는 그동안의 통감부 정책, 헤이그 사건 이후의 상황변화와 ‘신협약’, 그리고 앞으로의 통감통치의 방향에 관하여 설명했다.

    "한국은 스스로 독립을 파괴했고, 일본은 한국 독립을 옹호"

    그는 먼저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나라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오히려 “항상 스스로 독립을 파괴”해 왔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해왔다는 것이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수천 년 사대주의 밑에서 벌레처럼 살아 온 한국인의 천성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이 홀로서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호와 지도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토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이토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 없습니다" 위장연극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병은 커다란 재앙(厄介)이 될 것입니다. 한국은 자치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와 감독이 없이는 건전한 자치를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번에 신협약을 보게 된 이유입니다......나는 서양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공언(公言)합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아량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역시 병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정도 행정도 한국 자신을 위해 필요합니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주의를 유지해 왔거니와 장래에도 유지할 생각입니다.”(伊藤博文秘錄)

    그러면서 이토는 한국과 일본이 ‘제휴’하여 “욱일(旭日)의 깃발과 팔괘(八卦)의 깃발이 나란히 휘날리는 것으로 일본은 만족”한다고 강조하여 병탄의 뜻이 없음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 후인 31일 한국군대를 해산함으로써 그의 ‘공언(公言)’은 ‘사언(詐言)’이었음이 밝혀졌다.

    일본 정부, 일진회에 "수고했소" 50만엔 지원금

    정미7조약이 성립된 직후인 1907년 8월 이토와 가츠라는 일진회에게 50만 엔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후원금은 “양위와 신협약 성립을 위한 일진회의 진력에 대한 보상의 뜻이 포함”된 것이다. 이토는 이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전달하기로 하고, 일차로 부통감을 통해 이용구와 송병준에게 10만 엔을 교부했다. 이는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일진회를 활용하고 그 대가를 적절히 지불하겠다는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