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페이지 분량 ‘괴문서’ 그대로 옮겨 적어...“증명력 인정하기 어렵다” 지적도
  • 이재용 부회장 공판에 참석한 박영수 특별검사, 뒤는 윤석열 특검 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 ⓒ 사진 뉴시스
    ▲ 이재용 부회장 공판에 참석한 박영수 특별검사, 뒤는 윤석열 특검 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 ⓒ 사진 뉴시스

    ‘10월22일 승마 관련 SS 보고.
    11월 독일 전지훈련 파견을 위한 마장마술 선수 3배수 추천 예정.
    첫 마필 구입 완료. 정유라 선수용 마필 58만 유로, 보험 6만6000유로.‘

    - 김건훈 前 청와대 행정관이 작성한 문건 중 일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이 이달 28일로 예정된 가운데, 청와대에서 발견된 ‘지난 정부 캐비닛 문건’이, 남은 재판 전체의 흐름을 가늠 짓는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견해가 법조계와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생중계까지 하면서 발견사실을 언론에 알린 ‘지난 정부 캐비닛 문건’은, 공교롭게도 이 사건 판결 직전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청와대는 “삼성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문건도 있다”며 해당 자료를 박영수 특검에 넘겼고, 특검은 이들 문건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다. 여기에는 김건훈 前 청와대 행정관이 작성한 ‘국회 국정감사 및 상임위 대응 문건’도 있다.

    이 문건이 특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 내용 때문이다.

    김 전 행정관이, 이미 구속된 안종범 전 수석의 국회 출석에 대비해 만들었다는 해당 문건의 내용은 위에 소개한 그대로다. 눈길을 잡아끄는 건, 정유라 선수용 마필을 58만 유로에 구매했다는 부분이다.

    김 전 행정관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10월 중순 어느 날, 안 전 수석의 지시를 받고, 위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은,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과 관련돼, 당시 국회에 출석해야 했던 안종범 전 수석을 위한 모범답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를테면 국회의원들의 공세에 대비한 ‘예상 질의 응답’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위 문건을 작성 할 때, 제목이나 작성자를 알 수 없는 ‘한 장 짜리’ 서면을 참고했으며, “승마관련 내용이 있기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해당 서면에 ‘참고자료’라는 표현만 붙어 있었을 뿐, 제목이나 작성자는 기재돼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면의 글자크기 및 양식이 청와대 내부의 그것과 달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으며, 내용을 볼 때 ‘삼성’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임의로 ‘SS’라는 표현을 썼다고 진술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 전 행정관이 문건 작성 당시 참고한, 한 장 짜리 정체불명 서면을 둘러싼 의문이 그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 전 행정관은 ‘국회 대응 문건’을 작성할 때, 비서실에 쌓여있는 수많은 문서 중 ‘참고자료’라고만 표기돼 있는 ‘한 장 짜리’ 문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진술했다.

    김 전 행정관이 근거자료로 삼은 서면에는 작성자도 제목도 없었다. 작성목적이나 작성 시점도 알 수 없다.

    김 전 행정관이 자료로 활용했다는 ‘참고자료’와 관련해, ‘괴문서나 다름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심 재판부는 지난달 25일, 박영수 특검이 이재용 부회장을 상대로 적용한 5가지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하면서, 그 근거 중 하나로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꼽았다. 그러나 재판부가 유력한 증거로 받아들인 문건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조계 안팎에서는 문건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볼 때, 재판부가 유죄 심증을 형성하는데 있어, 김 전 행정관 작성 문건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이 사건 1심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 뇌물공여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는데 있어, ‘김건훈 문건’이 일종의 ‘스모킹 건’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건훈 전 행정관이 법정진술에서, 해당 문건을 작성한 사실, 작성경위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힌 이상 ‘증거능력’은 더 이상 쟁점이 될 수 없다. 다만 문건의 ‘증명력’으로 시각을 돌리면 사정은 다르다.

    1심 재판부가 ‘김건훈 문건’을 유죄 판단의 유력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라면, 위 문건의 ‘증명력’을 둘러싼 논란은 이 사건 공판 전체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법조계에서는 ‘김건훈 문건’이 출처와 작성자, 작성 목적 등을 알 수 없는 1페이지 분량의 서면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서면에 기대 작성된 문건의 증명력은, 제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전 행정관 문건이, 이재용 부회장 뇌물공여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는  법조인이 적지 않다.

    김 전 행정관 문건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삼성이 2015년 10월22일 쯤 ‘정유라 선수용 말’을 58만 유로에 구입했다는 것뿐이다.

    그밖에 말 구입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마필을 구입했는지, 마필의 소유권을 누가 갖기로 했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을 짐작할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재판부가 ‘김건훈 문건’을 근거로, ‘이재용 부회장은 2015년 10월 중순쯤 정유라의 존재를 알았고, 그룹 미래전략실 임원들에게 지원을 지시했다’고 판단했다면, ‘1심 재판부가 사실을 오인했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위 문건을 포함해 김 전 행정관이 작성한 ‘청와대 말씀자료’, ‘안종범 수첩’ 등 특검이 혐의 입증의 증거로 제시한 문건이나 증인들의 법정진술 어디에도, 이재용 부회장이 정유라의 존재를 인지한 시점을 2015년으로 유추할만한 내용은 없다.

    ‘김건훈 문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 1심과 다르다면, 선고 결과는 뒤집힐 수도 있다. 따라서 ‘김건훈 문건’의 증명력은,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로 다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변호인단과 박영수 특검은 11일과 12일, 항소이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양측 모두 항소이유서의 언론 공개를 원하지 않고 있어, 그 내용은 28일이 돼야 알 수 있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