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강경론자들, 이토의 점진정책 비판

    을사강제조약이 병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의 첫 단계였다면, 고종의 양위와 이어서 강제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병탄의 기반을 완수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통감부를 이끌었다.
    원략(遠略)으로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며 한국의 주권 잠식의 틀을 만들어 나갔고, 집권세력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지배정책의 급진적 변화를 기대하는 강경론자들은 통감지배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 일본과 한국 통감부 안에서 일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강경론자인 야마가타 계의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용구-송병준 "황제 폐하고 연방부터..." 건의

    보다 혁신적인 통감통치를 위해서 우치다는 통감에게 일진회가 제안하고 있는 “한황폐위의 계책”을 건의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일진회 내각을 구성하고 통감부의 뜻에 따라 개혁정책을 집행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지만, 고종이 황제의 직위에 있는 한 결코 혁신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선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일한연방을 이루고, 그러고 나서 한국의 근본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책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토는 우치다의 강경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할 때 송병준을 농상무 대신으로 임명하여 일진회가 내각의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토는 송병준을 내각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이완용과 송병준 사이의 친일 충성 경쟁을 기대했고, 그의 기대는 적중했다.

    우치다 "즉각 합방 못하면 통감 바꿔야"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여러 차례 자신이 관찰해 온 한국의 사정, 통감의 점진주의 정책의 문제점,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일진회의 제안, 병탄의 필요성 등을 소상하게 전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보호정치가 전혀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모든 불안의 근원”인 고종의 저항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기야마에게 “청컨대 원로대신에게 이러한 사정을 전하여 통감각하로 하여금 이 중대한 일[병탄]을 단행하도록 권유해 주십시오. 만일 통감각하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원로 가운데 한분이 반드시 연방성립의 중임을 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치다는 통감의 점진주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질의 필요성까지도 논하고 있는 것이다.

  • <p>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3인의 밀사. <br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p>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3인의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때를 기다리는 이토 "고종은 면종복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안팎에서 통감정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고종 이 통감정치에 대한 저항의 진원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한황은 면종복배의 태도를 조금도 고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고종의 폐위를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회한 이토는 서두루지 않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 1907년 6월에 발생한 이른바 ‘헤이그 밀사사건’이 그것이다.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됐다. 26개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이 회의의 제창자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i II)였다.

    고종 밀사 파견...열강은 '외교권 없는 나라' 외면

    고종 황제는 을사강제조약의 부당성과 통감정치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 檢事) 이준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했다. 황제의 신임장을 지참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전주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을 통하여 만국평화회의의 제창자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전 러시아공사관 참사관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의 밀사는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대표를 차례로 방문하여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의 협박 때문에 체결된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장과 주관국은 한국 정부는 이미 ‘자주적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대표의 참석과 발언이 거부당했다. 다만 네덜란드의 신문인 스테드(William Stead)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설명하면서 주권회복의 후원을 청하는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의 전문(全文)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구체적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밀사 음모 접한 이토 "호기회...호기회..."

    이토와 통감부
    맥켄지가 정확하게 관찰한 것과 같이 ‘밀사사건’은 “일본이 행동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명분”을 제공했다. 이토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밀사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이토는 7월 3일 하야시 다다오(林董)에게 보낸 전문에서 “지금이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해 국면일변(局面一變)을 위한 조치를 취할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믿음. 밀사파견 음모가 사실로 드러난 이상, 조세권, 병권, 재판권을 거두어 들일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인정함”이라고 하면서 대안 검토를 당부했다. 짧은 전문에서 이토가 “호기회(好機會)”를 두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이 시기를 기다려 왔다.

    4일 후인 7월 7일 이토는 다시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특별기밀’ 전문을 보냈다. 그 전문에서 이토는 자신이 고종을 만나 일본이 한국에 ‘선전(宣戰)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 고종은 밀사사건과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다는 것, 이 문제로 궁중이 ‘심각하게 번민’하고 있다는 것, 내각에서 양위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것 등의 소식을 전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허둥대는 한국조정 "이완용 총리대신이 황제양위 거론함"

    “어제 총리대신이 본관을 찾아와 선후책을 논하면서 한국정부도 사태의 중대성을 잘 알고 있다함. 그가 은밀히 본관에게 고하는 것에 의하면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황제의 신상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허둥대면서, 양위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뜻을 밝혀 본관은 항상 신중히 생각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했음. 이 기회에 우리정부가 취할 수단방법(예컨대 한 걸음 더 나간 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에게 내정 상의 권리를 양여하게 하는 것)을 묘의(廟議)에서 논의하여 훈시해 줄 것을 희망함. 양위와 같은 문제는 본관이 깊이 주의하고 있고, (양위문제는) 한인의 경거망동에 지날 뿐 그 책임이 일본에 돌아오는 것과 같은 사태는 절대로 용납지 않을 것임(日本外交文書)”

    즉 이토는 황제폐위계획은 한국의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 형태로 기정사실화하여 일본과 무관하다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문은 끝으로 “고민에 빠진 한국 황제는 일본에 밀정을 파견하여 각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부했다.

    "황제가 보호조약 무시하면 일본은 선전포고 할 것이오"

    이토는 통감부의 막료들에게도 “강력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고종을 압박했다. 7월 3일 이토는 궁내부의 예식과장 고의경(高義敬)을 통감부로 불러 도쿄의 외무성으로부터 보고된 ‘밀사사건’의 전문을 황제에게 전달토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종을 알현하고 “밀사파견과 같이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대하여 버젓이 선전(宣戰)을 포고하는 것이 첩경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완용에게는 “황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보호조약을 무시하고 배반을 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고종이 “음모를 계속한다면 일본은 한국에 직접 전쟁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수상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황제에게 해결의 길을 찾을 것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수습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에 부심했다.

    고종 "대신들이 수습하라"  대신들 "모든 책임은 폐하에게"

    한국정부
    한국정부는 헤이그 사건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7월 6일 고종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었다. 송병준을 위시한 친일파 대신들은 밀사사건의 전말을 추궁하는 한편 그 책임이 황제에게 있음을 은연중 강조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번 사건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헤이그에 있는 사람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문제는 대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황제 스스로가 앞장서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송병준 "도쿄 가서 천황에게 사죄하십시오"  고종 "경은 누구 신하냐?"

    송병준이 나섰다. 그는 밀사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사죄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황제가 러일전쟁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신의를 배반했다고 강조하면서,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도쿄에 가서 일본의 천황에게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의 예를 하십시오. 이 두 가지를 차마 못 한다면 결연히 일본에 선전(宣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 국가 존망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라고 협박했다. 고종은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이냐”라고 책망하고 분연히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경성(京城) 특파원들이 전하는 한국의 분위기는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에 연일 “어전회의와 내각회의”가 열렸고, “한국 황제는 초조”해 있었고, 한국 조정은 마치 “감옥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고종 폐위는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일진회
    일찍부터 고종의 폐위를 주장해온 우치다 료헤이와 일진회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우치다는 통감에게 밀사파견에 대하여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고, 고종의 폐위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그는 통감부의 조치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우치다는 이번 계기를 이용하여 ‘반일의 근원’인 고종의 폐위를 성사시킬 뿐만 아니라, 폐위는 반드시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고종의 퇴위 문제를 이용구와 송병준과 협의하면서,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퇴위를 주장하는 한편, 이용구로 하여금 일진회를 동원하여 고종의 퇴위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특히 이용구는 폐위와 같이 중대한 계획을 내각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진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진회, 이완용에게 '고종퇴위' 촉구...전국 유세

    “폐위를 성사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대신들의 처사만 전적으로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내각이 실패할 때에는 일진회의 힘으로라도 반드시 목적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일진회는 내각과 별도로 만일을 대비해서 해결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日韓合邦秘史)”

    일진회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일진회는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야기된 정치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조속한’ 양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양위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총리 이완용에게 제출했다. 통감 이토에게는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여 헤이그 문제와 같은 사건을 저질렀지만 “각하의 산해지덕(山海之德)과 금석지심(金石之心)으로 용서해 줄 것을 엎드려 빈다”는 사죄의 글을 담은 공식 서한을 전했다. 동시에 일진회는 유세반을 편성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지역을 돌며 밀사사건의 정치성과 고종퇴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유세를 벌렸다.

    일 언론, 병탄 촉구 "한국 왕을 일본 귀족으로 만들자"

    일본의 여론과 정부의 대응
    헤이그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은 한결같이 고종을 비난하는 한편, 이토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은 더 강력하고 적극적인 한국정책을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지지(時事)신보>는 “한국의 왕은 마땅히 일본으로 와서 헤이그 사건에 대하여 친히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호치(報知)신문>의 사설은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전진기지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대한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병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와세다 대학에서는 “한국의 황제를 일본의 화족”으로 삼자는 주장이 있었고, <니로쿠(二六)신문>은 “한국 황제를 일본으로 옮기고 내각은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으로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계 총궐기 "병합하라...안되면 양위시켜라"
     
    정치권도 강경한 입장이었다. 7월 14일 정계의 원로격이라 할 수 있는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우익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등 6인은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일한병합건의서”를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출했다. 이 건의서는 “한국 황제의 주권을 일본에 ‘선양(禪讓)’하여 두 나라를 합병”한다는 제1안과, “현황제로 하여금 그 지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통치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제2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제1안이 “상책”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제2안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우회(政友會)과 헌정당(憲政黨)의 대표들도 총리 사이온지를 예방하고 일본의 여론이 고종의 폐위를 기대하고 있으므로, 정부는 여론에 호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또한 야마가타와 가츠라 계의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도 정부의 ‘단호한 처분’과 ‘용단’을 촉구했다.

    천황 재가 "한국 전권 장악, 통감은 부왕(副王)으로 섭정하라"

     총리 사이온지는 이토가 요구한 한국정책의 기본방향을 확정하기 위하여 7월 10일 원로와 관계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을 확정하고 12일 천황의 재가를 받아 “극비”로 분류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했다. 최종 기본방침의 핵심은 “제국 정부는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고, 그 실행에 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내각에서 결정된 기본방침은 (1)장래의 화근을 단절하기 위하여 고종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케 할 것, (2)황제 및 정부의 정무결재에는 통감의 부서(副署)를 필요로 할 것, (3)통감은 ‘부왕(副王)’ 또는 ‘섭정(攝政)’의 권한을 가질 것, (4) 주요부서에는 일본이 파견한 관료로 하여금 대신 또는 차관의 직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으로 가서 통감에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7월 15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오가 최종안을 들고 서울로 출발했다.

  • '해아밀사사건'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고종을 풍자한 일본측 만화. 고종황제는 보따리를 등게 짊어지고 한손에는 인삼, 예금통장, 열쇠, 담뱃대를 들고, 또 한손으로 엄비의 손을 잡고 궁중을 떠나고 있는 모습.<團團珍聞>(1907.7.27)
    ▲ '해아밀사사건'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고종을 풍자한 일본측 만화. 고종황제는 보따리를 등게 짊어지고 한손에는 인삼, 예금통장, 열쇠, 담뱃대를 들고, 또 한손으로 엄비의 손을 잡고 궁중을 떠나고 있는 모습.<團團珍聞>(1907.7.27)

    이완용-송병준 "일본이 격분했으니 양위하시오" 연일 고종 독촉

    고종의 양위
    헤이그 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강경노선과 보다 획기적 조치를 요구하는 일본국민의 여론에 직면한 한국정부는 날마다 내각회의를 열어 수습대책을 강구했다. 문제해결을 위하여 일본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완용 7월 16일 다시 내각회의를 개최하고 해결의 방책을 논의 했다. 통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던 이완용과 송병준이 주도하는 내각회의의 결론은 황제의 양위였다. 두 사람은 회의 후 입궐하여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이 격분하고 있다는 것, 하야시 외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강경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일본의 극단적 조치를 예방하기 위하여 한국정부가 먼저 일본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사전적 조치의 하나로서 왕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상신했다. 고종은 양위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다음 날 또 다시 고종에게 양위를 요청했다.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대신들의 양위독촉에 시달린 고종은 이토를 불러 자신의 양위가 불가피한 것인지 그의 의사를 타진하려고 했다.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1907.7.21)은 “한국황제양위비록(韓國皇帝讓位秘錄)”이라는 제목으로 고종과 이토의 대화를 아래와 같이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고종: 헤이그에 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일이오.
    이토: 세계 각 국의 모든 사람이 다 (밀사를) 폐하가 파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 유독 폐하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이토: 폐하가 화란(和蘭:Netherlands)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고종: 최근 짐으로 하여금 양위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감의 의견을 어떠하오?
    이토: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통감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위는 한 나라 종실의 중대한 문제로서 전적으로 조선황실의 사안입니다.
    고종: 양위를 짐에게 권고하고 있는 자들은 통감의 뜻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데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통감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자를 이곳에 불러 본인이 직접 심문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이토, 일본 언론 활용...양위 기정사실화

    이 보도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통감부가 이 내용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고종과 이토 두 사람이 나눈 대와의 내용이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는 것은 통감부의 정보 제공과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사실보다 미화되었거나 또는 이토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많다. 이토는 이 보도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고종의 양위를 기정사실화하려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자신의 점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토는 언론을 활용한 것이다.  

    궁내에선 날마다 양위 주청...궁밖에선 일진회 '촛불시위'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양위시킬 것.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정부가 스스로 양위를 결정한 것으로 할 것”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한 하야시 곤스케 외무대신 18일 고종을 알현했다. 한국정부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18일 밤 각료 일동은 거듭하여 고종에게 양위할 것을 주청했다. 고종이 계속 받아들이지 않자, 이완용과 송병준은 다시 앞장서서 황제가 헤이그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고종의 양위를 거듭 강권했다.

    궁중에서 대신들이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그 시간에 일진회는 양위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를 벌렸다. 일진회 일지에 의하면 부회장 홍긍섭의 지휘아래 “일반회원 300여명이 모여서 15명씩 짝을 지어 촛불을 켜들고 궁궐을 돌면서 양위를 재촉”했다. 그들은 고종의 양위 소식이 전해진 19일 새벽에야 해산했다.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 받을 짓'...파란만장 44년 마감

    안팎에서 밀려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황제는 결국 19일 새벽 3시에 “이제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를 택한 것은 뒷날 군권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맥켄지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고종의 퇴위는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을 받을 짓(the Japanese Government assumed an attitude of silent wrath)"이었다. 고종은 그의 파란만장한 44년의 재위를 이렇게 마감했다.

    황제 폐위한 대신들: 이완용, 임선준,조중응,고영희,이병무,이재곤,송병준

    1907년 7월 20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황실을 강핍(强逼)하며 대신을 종으로 부리고 백성을 짐승으로 다루는 행동이 이미 극에 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7월 23일의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에서는 “대한황제의 위(位)를 폐하고 세운다는 말이 일본사람 신문에 낭자하더니, 며칠이 못되어 한국의 내각대신이 일제히 궁에 들어가 황제의 뜻에 반하여 (폐위를) 강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대신들이 외국 사람이 시키는 것을 좇아 황제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법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대신 송병준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 논설
    ▲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을 게재한 대한매일신보(1907.7.23).


    한국선 '대리식'...일본선 '양위식'

    7월 20일 일본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고종과 순종 두 사람 모두 참석치 않은 상태에서 황태자의 ‘대리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양위식’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무를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일본 측에서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권을 완전히 ‘양위’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천황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전문에서, “짐은 짐이 통감의 보고에 의하여 황제의 양위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하”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이로써 ‘대리’는 실질적 ‘양위’로 굳혀졌다.
     

    일본군 1개대대 왕궁 진입, 반대파 체포...고종-순종 거처 분리

    통감부는 다음날인 21일 밤 일반 민중의 습격으로부터 궁중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 보병 1개 대대를 왕궁에 진입시켜, 양위를 반대하고 있는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와 시종원경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 남연철(南延哲) 세 사람을 체포하여 궁중 내의 반대파를 침묵시켰다.

    ‘신황제’로서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은 약 한달 후인 8월 27일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태황제’로부터의 영향에서 순종을 차단하기 위하여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이은:李垠)을 고종이 거처하고 있는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고종은 일본 세력 앞에 무기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 저항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이어받은 순종은 그렇지 못했다. 맥켄지의 표현을 빌리면 순종은 “유순하고 지력이 유약(feeble of intellect and docile)”했고, “수치스러운 정부의 이름만의 수반(figurehead of a shame government)”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의 거세는 일본의 한국장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