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줄다리기...요충 개성 탈환 요구도 물거품유엔측, 북한 도서들 댓가없이 내주고 서해 5도만 확보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⑤ 휴전 협상 개시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맥아더 후임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동경으로 떠난뒤 8군을 맡은 밴플리트 장군은‘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그의 말처럼 이대통령의 뜻에 따르는 듯 북진작전에 적극공세를펼치면서 큰 전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즈음 뉴욕으로부터는 참전17개국 대표들이 지지부진한 휴전논의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중공군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올린 뒤 협상해 보자고 결정했다는 뉴스가 들어왔다.평양-원산 방어선은 지난해 겨울 맥아더가 구상했다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포기한 것인데한반도의 가장 잘록한 허리 ‘평양-원산 선’은 러일전쟁때도 ‘분단선’으로 거론했던 곳으로
키신저가 휴전 한참뒤 “당초 맥아더가 압록강 말고 거기까지만 진격했던들 중국은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뒷북을 치기도 했다.그 대동강이 아닌 압록강까지 다시 북진하겠다는 밴플리트가 38선 동서남북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1952년 여름, 국내언론이 ‘평양-원산 선’ 뉴스를 기분 좋게 대서특필한 다음날이었다. 잠잠해지던 휴전설이 마침내 소련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터져나왔다.6월 23일 소련 유엔대표 야콥 말리크(Jacob Malik)가 유엔 라디오 연설에서
“모든 외국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38선에서 물러나 정전 협상을 시작해야한다”고 방송한 것이다.영국 외무성은 “영국과 여러나라가 바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말”이라며 대환영하였고,
트리그비 리Trygve H. Lie) 유엔사무총장은 고향 노르웨이 휴가 도중에 달려와
“희망찬 평화의 신호”라며 반겼다. 중공 마오쩌둥은 즉시 “동의”를 선언한다.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전쟁 1주년을 맞아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는 화평안이라면
언제나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 ”말리크 소련대표의 제안이 세계평화를
위함이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취하여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를 해임한지 두달 반 만이다.▶6월25일 부산 임시중앙청 경남도청 광장에서는 ‘6.25 항공(抗共)총궐기대회가 열렸다.진작부터 “타협은 거짓 평화! 국제공산주의는 타협을 안하는 집단”이라는 경고성명을
냈던 이승만 대통령은 단상에 올라 유엔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열변을 토하였다.“유엔은 스스로 결의하고 발표했던 약속대로 지켜야 한다.
모든 공산군이 압록강 너머로 철퇴할 때까지 스스로 정한 임무에 충실해 줄 것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 한인들은 자유민으로 죽을지언정 남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 혈전 마당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표명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침략자를 다 타도시키고
자유로 살 수 있든지 그러지 못하면 끝까지 싸우다 죽든지 할 작정입니다.우리 조국을 통일함으로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자는 우리의 변치않는 주장을 누구든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거든 수백만 전재민들이 집을 잃고 방황하면서도 지금까지 변치 않고 모든 고난과 죽음을 이겨 나온 것을 여기 와서 보라고 요청합니다....(중략)만일 대한민국의 완전무결한 안전을 보장할만한 결말을 짓지 못하면, 자유를 위하여 귀중한 생명을 희생한 세계 청년군인들의 신앙을 우리가 배반하는 것이니 우리는 결코 않겠다는 것이요.
우리가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바는 이 전쟁이 모든 민주국가의 대승리로 결말이 나서
영구 평화가 우리나라에 임하여 우리 통일민주국의 태극깃발이 대한반도 압록강까지 자유로이
날리자는 것입니다...(후략)“한국국회는 두 번째로 ‘38선 정전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정부는 연일 비상각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하는 중에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발언이 나와 한가닥 희망을 갖기도 한다..애치슨은 미의회 외교위원회 답변에서 “말리크의 정전안은 미국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하게
하였으며 중공군은 정전과 동시에 압록강까지 철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외국군이
철수하는 제1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애치슨의 이 발언은 중공에 던지는 협상용일 뿐, 한국의 통일 열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휴전협상 내내 이런 종류의 발언은 미국 지도자들로부터 계속 튀어나왔고,
그것은 한국을 달래려는 속셈으로 그래서 더욱 한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무서운 전쟁의 서곡될 평화제안 수락 못할 터”이대통령 전세계에 중대경고 (동아일보 28일자 2면)소련 국제연합대표 말리크가 최근 제의한 비공식평화안을 26일 정례국무회의에서 검토한 결과
국무원의 합의된 견해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어느 인위적 경계선을 가지고 이 나라를 분활하는 조건이 포함되어있는
소위 평화안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고 간에 남북 전국민이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일이다.침략자가 한국의 땅 일부라도 계속 점유할수 있게 놓아두는 제안은 결국 이 나라에 대한
모욕이다. 소련의 지도자들이 지금 평화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기네들의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요, 그들이 무력으로써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 와서 양면외교를 통해 완성해보려고 드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지도자들이
그들의 말을 충실히 지켜나가리라고 믿을 사람은 전세계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유엔의 평화안과 소련의 평화안은 각각 별개의 다른 것이다.만약 유엔이 소련측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면 전세계인민의 눈에 국제적 정의의 법정으로서의유엔의 자격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엔이 소련 제안을 무시할 줄 믿는다.도대체 언제부터 소련 지도자들은 그렇게 세계평화를 갈망하여 온 것인가?한국을 자기네들 판권 속에 집어넣으려고 남침을 개시하였을 때 그들은 평화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우리 국민을 학살하고 우리 영토를 파괴하는 것이 세계평화를 보장하는 노력이었던가? 소련을 포함한 유엔내의 몇몇 국가는 오늘날까지 38선으로 한국을 분할하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으며 장차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될 똑 같은 상태를 계속 존치하려고 힘쓰고 있다.
이것이 평화제안이라는 것인가?중공군은 분쇄되고 있으며 압도적 패퇴를 당하고 있다. 이렇게 분쇄된 중공군을 왜 38선까지
다시 내려오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침략자에게 벌을 주려는 것인가, 상을 주려는 것인가?그러한 제안은 평화안이 아닌만큼 우리는 그것을 평화안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공산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철퇴할 것을 동의하도록 만들므로써만 비로소유엔이 선언한 제목적에 합치되는 평화교섭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원한의 38선 이북에 사는 수백만의 한국 국민이 공산당 상전들의 노예로서 생활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한 결코 그냥 놓아둘 수 없는 것이다.한국정부는 북한을 해방시키고 보호할 것이며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북한문제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 할수 있는 것이며 북한 주민은 우리가 그렇게 하여줄 것을
바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유엔은 어떠한 결정을 할 때나 반드시 사전에 잔혹한 공산주의자의 공격에 전인류가 멸망하도록 방치해두느냐, 그렇지 않으면 유엔은 자기 주장을 꺾지않고 고난을 겪으면서라도 승리를 획득하고 침략자를 처벌하는 동시에 자유통일된 한국이 모든 국가의 대소를 막론하고 다 자유의 권리를 가질수 있다는 신성한 원칙에 대한 영원한 기념탑으로서 존속될 수 있게 하느냐를 생각해야
할 줄로 믿는다.한국정부는 정의와 영구한 평화가 한국에 수립되기를 열망하는 것이다.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정의에 의하여 영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싸움이 빨리 끝나서 우리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을 누구나 다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적의 모략에 빠져
결국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 제안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첫째,전한국민은 민족통일을 원하고 있다. 남한사람에 지지않게 38선이북에 사는 한국남녀들은
하나의 정부 즉 대한민국 정부 밑에 통일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5년 동안
우리의 국토를 분할했던 인위적 경계선을 또 다시 만들려는 여하한 제안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둘째,해결을 지으려면 반드시 한국민에 대한 공산침략이 장차 또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을 먼저 해주어야 한다.셋째,한국 국민은 그들이 민주주의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즉 한국정부를 통하여
화평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협의를 받고 정보를 받을 수 있어야한다.말리크의 제안은 이러한 조건에 응할 수 있는 가, 그러나 우리는 조속한 평화라는 허망한 약속에 속아가지고 결국 더욱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되어버릴 어느 평화제안도 수락하지 않음을
전세계에 경고하는 바이다.6월29일 트루먼은 아랑곳 없이 휴전 제안문을 확정하여 유엔군사령관에게 전하였고,
리지웨이는 다음날 아침 8시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휴전협상 준비회담을 원산항에 정박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열자고 공산측에 제의하였다.
중공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회담을 7월15일 개성에서 시작하고
김일성이 협상을 주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보냈다.
스탈린은 김일성은 안된다며 마오가 회담을 주도하라고 지시하고,
리지웨이에게 보낼 답신 문안까지 만들어 보냈다.
그때부터 스탈린은 휴전회담의 모든 것을 막후에서 총지휘 감독한다.▶부산 임시수도에서 몇 차례 반공총궐기대회를 열고 ‘38선 휴전반대’를 외치던 시위는
이제 본격적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전국민대회로 확대, 거리투쟁의 먼길을 출발한다..폭발된 민족의 비분, 진동하는 정의의 절규어제 정전반대 국토통일 총궐기대회민족의 수난을 다시금 초래할 38선정전을 반대하는 국토통일 국민총궐기대회가 1일 오전10시부터 시내 충무로광장에서 국민의 가슴속에서 폭발된 총의로써 수십만시민이 노도와 같이 몽린 가운데 개최되었다. 결의문 낭독에 이어 참전국 원수들과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멧시지를 낭독 채택한 후, 신익희국회의장이 등단하여 “우리는 공산침략자의 원흉 소련의 뱃속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내민 정전 교섭도 믿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 한민족은 우리주권과 국토통일을 침략하는 어떠한 정전도 결사반대하고 역사 오랜 우리조국통일을 달성할때까지 용감하게 싸워나가자”고 격려하였다. 이어 참전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주권 영토를 침해하는 어떤 결정도 거부한다”는 멧시지를 전달하였다.이에 앞서 변영태 외무장관은 정전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명백히 하겠다는 전제아래중공군의 국경외로 완전철퇴, 북한 괴뢰군의 무장해제, 북한공산당에 대한 원조근절 보장,한국대표의 한국문제토의 회의 참가,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안고 효력을 인정치 아니한다는 등 5개조건을 제시하는 담화를 30일 발표하였다.국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지지를 천명하였다. (동아일보 7월2일자))공산측은 리지에위 사령관의 제안을 수락, 8일 첫 접촉을 가지고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합의했다. 한국정부는 5개조건에 따라 백선엽 장군을 회담대표로 참석시키기로 했다.전세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약소국 따위 한국의 목소리는 무시한채
‘휴전=평화’라는 소련의 달콤한 미끼를 향해 몰려드는 물고기들 같았다.
뉴욕 유엔빌딩은 저마다 경쟁적으로 ‘휴전조건 아이디어’를 흔들며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고,
특히 영국 언론들은 때를 만난 듯 한국정부를 도마위의 고기처럼 제멋대로 난도질했다.영국 ‘가디언’지는 “이승만은 영국의 외교적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하고,
이승만이 협상을 방해하게 만들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7월9일자엔 ”한반도 통일의 이점은 이승만 정부가 흡수되어 없어질 새정부를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거침없이 혹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아일랜드의 대표신문 ‘아이리시 타임스’까지도 ‘북을 치고 나서는 판‘이었다.“악명 높은 이승만에 대한 감시의 눈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유엔은 한국처럼 작고 중요하지 않은 나라를 위해 다시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최종 리허설에 불과하다. 본 공연은 유럽에서 펼쳐질 것이다.”
(R.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하권 p544)백인 우월주의, 또는 유럽 우선주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 주장이라지만
유색인종 약소국 지도자에 대한 표현은 지나치게 망설임 없는 막말을 쏟아냈다.
당시 트루먼 애치슨 처칠이 휴전을 서두른 것은 ‘유럽 우선주의’라는 분석이 정설이다. -
▶북한의 침략 개시 2년만에 열린 휴전협상 본 회담은 7월10일 개성(開城)시 고려동송악산 기슭에 위치한 한옥 99칸짜리 내봉장(來鳳莊) 대청 마루에서 시작되었다.유엔군 수석대표 조이(Turner C. Joy)는 4개항을 제시하였다.
①완전합의 때까지 회담기간에도 전투 계속, ②쌍방은 성의를 다할 것,
③ 협상범위는 군사문제에 국한, ④ 정치적, 경제적 문제 배제.
공산측 수석대표 북한 남일(南日)은 ① 모든 군사행동 중지 명령,
② 39선을 비무장지대로 설정, ③ 모든 외국군 조속 철수 등을 내놓았다.남일은 이미 의제에서 제외키로 합의한 외국군 철수문제를 날마다 물고 늘어졌다.애치슨은 7월19일 담화를 발표, “외국군 철수는 또 침략하려는 음모”라며 휴전이 되더라도
한국에 외국군은 주둔할 것“이라고 역공을 가하자 공산측은 수그러들었다.7월26일엔 의제로 5개항이 확정되었다. *회담 의제 확정, *비무장지대 설정을 위한 군사분계선,, *휴전 감독기관 구성, *포로에 관한 협의, *쌍방 관계국에 대한 건의 등이다.38선 이남인 개성은 공산군 점령지가 되고 보니 중립지대로 설정했지만
공산군이 주인행세를 시작, 협상에 유리하게 ‘장난질’을 시도하였다.
회담장 좌석도 공산측은 남향 높은 자리에 앉고 유엔대표단을 내려보았으며
중립지에 백기를 꽂고 드나드는 유엔대표단 차량을 항복하려 왔다고 선전하고
공산군 경비대가 밀착 감시하고 유엔 기자단의 자유로운 출입을 멋대로 통제하는등
묘한 꼼수 횡포에 항의가 잦아졌다.공산측은 8월23일 느닷없이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미 공군기가 회담장을 폭격했다고 생떼를 쓰는 남일은 백선엽을 노려보며 비난하였다.“요전에도 총기사격등 중립위반 공격을 하더니 이번엔 폭격까지 하다니...”라며 흥분했다.유엔군 측은 진상조사결과 ‘허위 날조’라고 반박했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회담은
10월 하순까지 두 달 이상 개점휴업 상태로 들어간다. -
▶이 대목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휴전협상 뒤에 숨은 비화(秘話)를 소개해야겠다.다름 아닌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 극비중의 극비 사항이었던지라 일체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그 명령, 유엔군이 알면 안되는 대통령의 비밀지령, 그것은 ‘휴전회담 무산 작전’이다.[월간 조선]이 그 작전 지휘자를 만나 취재 보도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2015년 8월호)-----------------------------------이승만 대통령, 휴전회담장 파괴 지시 비화HID, 1951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 야습 성공⊙ 판문점 중립 지역에서 공산군 측 중공군 장교와 병사 8명 납치⊙ “李承晩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다”글 | 김태완 / 월간조선 기자1951년 7월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휴전회담을 시작, 휴전과 분단 가능성이 커지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비밀리에 판문점 회담장 파괴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판문점 무장공격은 1951년 초 창설된 육군 4863부대(육군첩보부대)가 주도했으며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 간격으로 3차례 진행했다.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이 대통령의 지시로 육군첩보부대장 이극성(李極星) 중령과 김진수(金晋洙) 소위가 주도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사안이다.《월간조선》은 당시 판문점 습격을 직접 지휘했던 김진수(86·육군본부 공작처장 역임·예비역대령)씨를 만났다. 육군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기로 입교,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1951년 3월부터 HID에 복무하면서 모두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 공작활동을 벌여 20여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월간조선》 2006년 4월호 참조). 특히 적진에 침투해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대좌를 생포해 귀환시킨 일도 있다.그는 “가슴에 묻어둔 비밀 하나를 털어놓고 싶다”며 60여 년간 봉인된 판문점 회담장 파괴의 진상을 고백했다.“1951년 7월 12일쯤 이극성 첩보부대장이 저를 불러서 갔더니 ‘내일 경무대에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리라 생각도 못 했어요. 이튿날 새벽 대구에서 출발, 경무대에 오전 11시쯤 도착했어요. 그 시절엔 요즘 같은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구간마저 적었지만 무척 긴장하며 서둘러 지프를 몰았어요.”경무대에 도착한 그들은 비서실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다른 배석자 없이 4명이 마주 앉았는데 대통령과 이극성 중령, 나,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당시 高在鳳) 아니면 경무대 서장(당시 金國振)이 배석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곽영주(郭永周) 경무관(당시 경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이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판문점 회담으로 휴전이 되고 분단이 되면 민족통일이 어렵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어요. 어떻게 해서든 휴전을 반대해, 아니 못 하게 막아 북진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또 휴전회담이 성립되면 영원히 통일을 못 한다고도 하셨습니다.”잠시 후 이 대통령은 두 사람을 부른 속내를 털어놨다.
김진수씨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이 대통령의 발언을 재구성하면 이렇다.“현재로선 남북통일이 어렵습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판문점 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전진(前進)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렸나요.김진수 예비역대령의 말이다.“이 대통령께서 ‘회담장소를 야간에 침투해 파괴하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그럼 부탁하네. 가까운 시일 내에 휴전회담을 못 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그는 “경무대 한 인사가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말고 대통령과 우리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덧붙였다.그러나 속으론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일촉즉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하라니…’1차 거사(擧事)는 1951년 7월 16일… 휴전합의를 깨라!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회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1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자력으로 한반도를 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엔군 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결국 1951년 6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회담 제의를 했고 7월 8일 개성 광문동(光文洞)의 한 민가에서 예비회담이 열렸다. 장소를 옮겨가며 진행된 회담은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거친 신경전으로 소득없는 논쟁만 되풀이되었다. 유엔군 측은 국제적십자의 포로수용소 방문과 전쟁포로에 관한 협의를, 공산군 측은 38도선 문제와 유엔군 철수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첫 판문점 습격은 언제인가요?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다. 널문리란 널빤지로 만든 문짝마을이란 뜻. 그러나 널문리는 회담의 공용어(한글·중국어·영어) 가운데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널문을 한자로 쓰면 ‘판문(板門)’인데 구멍가게를 의미하는 ‘점(店)’이라는 글자를 넣어 판문점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널문리는 구부러진 밭뙈기와 초가 몇 채, 작은 주막이 전부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으나 판문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세계 전사에 남은 현장이 되었다.“7월 16일 아직 야심한 새벽이었을 겁니다. 민간인 복장의 대원 10명을 이끌고 판문점 남쪽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판문점 회담장으로 진입했어요. 다행히 회담장은 텅텅 비었고 초소에도 사람이 없었어요. 회담장 앞에 중공군 지프인지, 인민군 지프인지 모르겠지만 주차된 지프를 미제 칼빈 총으로 쏴 전소시켰어요. 회담장 주변엔 4~5개의 천막이 있었는데 한쪽은 유엔군 측이 쓰고 다른 한쪽은 공산군 측이 썼어요. 총을 난사해 회담장 천막을 모두 쓰러뜨리고 탁자니 의자니 기물도 부쉈어요. 불탄 천막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복귀했어요.”주변에 중공군 1개 소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고, 아군(유엔군)도 판문점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누구도 대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인명 피해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당시 김진수 소위와 함께 파괴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은 HID 문산파견대(제2파견대) 장단분견대 소속이었다. 판문점 공격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장단분견대와 함께 대덕산분견대, 두매리분견대도 조직돼 있었다고 한다.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었다. 판문점 근처 장단군(長湍郡·지금은 파주시와 연천군에 모두 편입)과 대성동(大城洞)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파주 장단에 ‘도라산 전망대’가 있고, 대성동은 군사분계선 남쪽 DMZ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 지역이다.김진수 소위와 장단분견대는 왜 하필 7월 16일을 거사일(擧事日)로 정했을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날인 7월 15일은 유엔군과 공산군 간 휴전회담장 통제규칙을 두고 합의가 성사된 날이었다. 양측은 ‘개성 중심으로 반경 5마일 내에 중립지대를 설정하고 회담장 주변에 무장병력도 두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로 이 합의를 깨뜨리려 했던 것이다.판문점 일대에 민간인 유격대 출몰… 2차 판문점 공격 감행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으로 구성된 공산군 측은 판문점 회담장이 쑥대밭이 되자 분기탱천했다.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을 향해 사격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휴전회담은 경색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전사(戰史)에는 공산군 측이 ‘비록 부상자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립 지역 내의 무장행위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반면 유엔군 측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문 서명 직후 발생한 ‘중립협정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즉각 조사에 착수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공산군 측도 내심 휴전을 바랐던지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김진수 소위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경무대로 찾아가 작전 성공을 보고했다고 한다. 직접 이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경무대 한 인사로부터 “이 대통령 뜻을 받들어 목숨 바쳐 싸워줘 고맙다”는 격려를 받았다.1951년 8월이 시작되자 휴전회담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신경전이 치열했다. 그해 8월 4일에는 중공군 1개 중대가 휴전회담 지역을 침범, 유엔군 측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8월 13일에는 공산군 측이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군 측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공식 성명을 통해 “그때 그곳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유엔군이나 공산군 측도 모르는 군사적 충돌을 누가 일으키고 기획한 것일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를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1951년) 8월 19일 중립 지역인 송곡리(판문점 서쪽 1km 지점)에서 중공군 헌병소대가 순찰 도중에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사망하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 측은 즉각 유엔군 측이 중립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조사결과 그 시간에 송곡리 근처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그런데 민간인 목격자에 의하면 “중공군을 기습한 대원들은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고, 전에도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하였다. 이에 유엔군 측에서는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판단하였다.〉(p155, 《6·25 전쟁사》 9권)―‘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을 한 이들이 HID 대원들이죠?김진수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모두 우리가 한 일입니다. 민간인 복장으로 아군이나 유엔군의 지시 없이 독자 행동한 것이죠.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 있고 그해 8월 중순쯤, HID 장단분견대는 2차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했어요. 구체적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2차 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어떤 방식이었나요?“1차 공격 때와 같은 방식으로 판문점 주변 철조망을 끊고 침투해 회담장 천막을 쓰러뜨리고 주변을 총으로 난사, 무력시위를 했어요. 추측건대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했을 겁니다.”1951년 8월 하순 들어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충돌과 분쟁이 계속됐다. 서로가 무장병력을 동원, 중립협정을 위반했다며 비난했고 상대방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반박했다.결국 양측은 8월 24일 휴전회담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 한 단락이다.〈이로써 공산군 측에 의한 중립협정 위반사건의 날조와 이에 대한 비난이 거듭된 끝에 결국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에 휴전회담을 중단한다고 통보함으로써 8월 24일부터 무기휴회로 들어갔다.공산군 측은 “8월 29일 유엔군 항공기가 개성 중립 지역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30일에는 유엔군 부대가 판문점 교량 너머로 사격하여 공산군 순찰대를 공격했으며 9월 1일에는 유엔군 항공기가 두 번째로 개성을 폭격했다”고 비난하였다.이때마다 유엔군 측은 “현장조사 후 어떠한 유엔군 항공기도 결코 그러한 사건을 범한 일이 없으며 지상사건에 관해서는 아마 유격대원의 소행일 수도 있다”고 해명하였다.〉(p156~157, 《6·25 전쟁사》 9권)3차 공격,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 생포1951년 7월 휴전회담장인 개성 내봉장(來鳳莊) 앞뜰에 선 공산군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팡(解方), 덩화(鄧華),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표 이상조와 장평산.1951년 9월 초 김진수 소위와 HID 장단분견대는 3차 판문점 공격을 감행한다. 대원들은 판문점 주변에 쳐진 철조망을 끊고 회담장에 들어섰다.그러나 이번에는 판문점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HID 부대원들은 이들을 모두 생포했다.“제 기억으로 성이 위(偉)씨인 중공군 소위가 기억납니다. 모두 납치해 아군(육군 1사단)에 넘기고 우리도 이들을 심문한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나중 포로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공산군 측 경비대를 납치했다는 게 사실인가요.“물론입니다. 다만 유엔군 측이 HID 장단분견대가 주도한 것을 알게 됐어요. 어느 날 미 8군이 우리 부대에 오더니 대원들을 강제로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실었어요. 한참을 달려 임진강을 건너자 대원들을 내리게 하고선 ‘판문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고 경고하곤 떠났어요.”김진수 소위는 그 후 다시 경무대를 찾아갔다. 전후 과정을 설명했더니 경무대 한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이젠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 대통령께서 ‘그 정도 했는데도 휴전회담이 계속되니 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저도 안타까웠지만 그게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했어요.”―이 사실을 지금 공개하는 이유는 뭔가요.“휴전회담 당시 이 대통령께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던 겁니다. 통일을 위해 휴전회담을 망치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의 절절하고 급박했던 대통령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HID 부대가 후방으로 물러나자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의 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1951년 9월 10일 미군 폭격기 한 대가 항로이탈로 북측 개성지구에 진입, 보호차 기총사격을 했다. 공산군 측이 항의하자 유엔군 C·조이 중장은 9월 11일 유감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번에는 9월 18일 DDT를 실은 한국군 트럭이 판문점을 넘었지만 공산군 측은 항의 없이 간단한 조사만으로 병사 4명과 트럭을 돌려보냈다.그리고 이후 2년여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의 종식을 위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월간조선 2015년 8월호)----------------------------------- -
장기 휴회에 들어갔던 협상이 재개된 것은 깊은 가을 10월26일이다.공산측이 38선 고집을 버리고 유엔측의 현 접촉선(line of contact)에 따름으로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 위한 잠정적 분계선 작업이 한달 만에 마무리되었다.이 한달동안 전선에서는 양측이 "한뼘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대혈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려의 4백년 왕도 개성이 북쪽으로 들어가자 이승만이 개성 확보작전'을 주장하였다.“쓸모없는 폐허의 개성! 요는 침 넘어가는 게 송악산의 군사적 가치”조선일보는 이런 제목을 붙인 기사로 ‘개성 쟁탈전’을 상세히 추적 보도하고 있다.며칠간 줄다리기를 하던 끝에 결국 유엔측이 “개성에 대한 입장이 완고하기는 하나 이젠 완강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개성 탈환은 물건너갔다고 썼다.피차 개성을 원하는 이유는 유엔측이 “서울로 통하는 전통적인 침략코스”라는 군사적인 반면에, 공산측은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는 한국 휴전의 상징인 동시에 저절로 선전무대가 될 것이므로 효과가 크기 떼문”이라는 전략적 사고의 단면을 보여주었다.이것이 바로 이승만이 무력으로라도 개성을 다시 찾자는 목적이기도 했던 것이다.이 보다 더 통탄할 일은 유엔군이 완전히 장악했던 북한 바다의 무수한 섬들을 양보한 것.제공권과 제해권을 놓친적 없이 북한 공격기지였던 도서들에 대하여 육지에서 그 반대급부를 얻어내려 싸우던 협상에서 유엔측은 고작 “개성이라도 달라”고 버티다가 굴복해버렸다.조선일보는 “네것도 내것, 내것은 내것”식으로 덤빈다고 공산측의 부당함을 비난하였지만
어쩌랴. 38선 이남의 백령도등 서해 5도를 겨우 확보한 것에 만족해야 하느냐고 한탄하였다.더 심각한 문제는 뒤늦게 드러났다. 국경아닌 국경 쟁탈을 벌이던 협상 5개월간 북한은 비무장지대로 설정되는 동서 250km 비무장지대에 지하갱도(땅굴)를 팠으며 그 숫자는 대피호와 지휘소, 무기고등 토치카가 10만1,500개에 달한다고 조사되었다.(남시욱 ‘6.25전쟁과 미군’ p238)가장 치열했던 영토 분계선 문제가 타결되자 휴전감시기구 문제와 쌍방 관계국 건의사항도
다음해(1952) 5월2일까지 모두 매듭을 지었고 휴전 협상은 이제 제3항 포로교환문제만 남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