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업체 앞세워 러시아 석유 20~30만 톤 매년 수입…中 송유관 '무상차관' 50만 톤
  • 한국에 귀순했다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전직 北39호실 고위간부 리정호 씨. ⓒ美VOA 인터뷰 보도화면 캡쳐.
    ▲ 한국에 귀순했다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전직 北39호실 고위간부 리정호 씨. ⓒ美VOA 인터뷰 보도화면 캡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 일본, EU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김정은 정권의 외화수입 및 군수용 에너지 자원 차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가 대북 석유공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북한이 석유를 수입하는 경로가 중국에만 치우쳐 있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28일 전직 北노동당 39호실 고위간부 리정호 씨와의 단독 인터뷰를 보도했다.

    2014년 北외화벌이 기업 ‘대흥총회사’ 中다롄 지사장으로 근무하다 한국에 귀순한 뒤 2016년 미국으로 망명한 리정호 씨는 인터뷰에서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매년 20~30만 톤의 연료를 수입하고 있는데, 싱가포르 소재 기업들이 지난 20년 동안 중개역할을 해왔다”고 폭로했다.

    리정호 씨는 ‘미국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일단 싱가포르 회사들과 원유 수입계약을 한다. 그러면 싱가포르 회사들이 러시아 원유 회사들과 재계약을 하고, 북한으로 원유를 보낸다. 이런 중개과정에서 싱가포르 회사들은 이익을 취한다”고 밝혔다.

    리정호 씨는 “싱가포르는 아시아 석유거래의 중심지이자 많은 석유중개업체가 있어, 북한은 1990년대부터 이들을 통해 러시아와 석유거래를 해 왔다”면서 “신용도가 높은 싱가포르 회사를 앞세워 러시아 석유업체와의 계약을 맡김으로써 투명성을 확보하고, 석유를 먼저 받은 뒤 대금은 나중에 지불하는 특권 또한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리정호 씨는 “북한이 유조선인 ‘대흥 6’호, ‘대흥 7’호, ‘대흥 12’호 등을 1990년대 일본에서 사들인 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싱가포르 업체의 중개로 러시아 석유를 도입하는 일에 자신이 직접 관여했다”고 밝히며 “싱가포르를 통한 러시아 석유의 북한 수입은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리정호 씨에 따르면, 현재 북한과 러시아·중국을 오가는 북한 유조선은 10~12척 사이로, 석유 1,000~3,000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크기이며, 필요하면 러시아 선박을 빌리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리정호 씨에 따르면, 북한은 이 같은 ‘싱가포르 라인’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는 연 20~30만 톤의 석유를, 중국으로부터는 연간 5~10만 톤의 가솔린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에 의해 대북수출이 금지된 항공유는 정기적으로 수입하지는 않고 노동당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수입하는데, 연간 5,000~1만 톤 규모라고 한다.

    리정호 씨는 “이밖에도 중국에서 송유관을 통해 무상 차관으로 제공받는 석유가 50만 톤 규모이지만, 이는 기업이나 주유소 같은 민간 분야에게는 유통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무상 차관’이라며 북한에 공급하는, 연 50만 톤의 석유는 봉화화학공장에서 가공해 휘발유 10만 톤, 경유 10만 톤, 항공유 일부, 중유, 원활유, 나프타 등 석유화학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리정호 씨는 “실제로 북한 트럭과 승용차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석유제품은 20만 톤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것마저 전부 인민군에 공급하고 일부는 비축한다”고 밝혔다.

    리정호 씨는 김정은 정권에 치명적인 대북제재를 하려면, 대북 원유공급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만약 美정부가 대북원유 공급을 제재하면, 러시아와 중국에서 유조선으로 공급하는 통로가 막혀, 아마도 북한 정권의 생명줄이 끊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리정호 씨에 따르면, 北노동당 39호실에서는 수십만 명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당 중앙기관 가운데 금강총국은 금, 대흥총국은 송이버섯 등 농수산물과 사금, 대성총국은 가공무역 및 상업, 해외중개무역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北노동당 39호실 산하의 모든 기관들은 은행 업무도 맡고 있으며, 모란지도국, 선봉지도국, 유경지도국은 상업 활동을, 대외건설총국은 북한 근로자 해외파견, 대경지도국은 수산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리정호 씨는 “하지만 39호실의 불법 경제활동은 점차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북한 지도부가 나서서 불법 경제활동을 엄격히 통제하는 추세”라고 주장했다. 해외에서 불법 경제활동을 벌이다 들키면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고, 北노동당의 이미지와 권위가 손상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자신이 일하던 대흥총국의 경우 25년 전에는 아편을 생산, 수출했는데 지금은 중단했고, 외부 세계에 알려진 것과 달리 39호실은 마약, 위조지폐, 가짜담배 생산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법 행위는 다른 ‘특수기관’에서 맡아 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39호실에만 편중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 리정호 씨는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하면서 '석유공급'과 '석탄 및 광물 수출'을 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역설했다. ⓒ美VOA 인터뷰 보도화면 캡쳐.
    ▲ 리정호 씨는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하면서 '석유공급'과 '석탄 및 광물 수출'을 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역설했다. ⓒ美VOA 인터뷰 보도화면 캡쳐.


    리정호 씨는 또한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할 때 북한 전체 수출의 45%를 차지하는 석탄과 광물 수출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당국도 대외수출 가운데 석탄과 광물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우려해 2008년부터 500만 톤의 수출 상한선을 설정했지만, 2016년에도 그 4배를 초과하는 등 당국의 정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정호 씨는 장성택을 비롯한 고위 관료 숙청바람이 불던 2013년 12월, 몇 달 동안 북한의 석탄수출이 중단되자 관련 기업은 물론 평양의 장마당, 식당, 상점이 일제히 문을 닫을 정도로 여파가 컸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정권은 2014년 8월 무역 거래선을 중국에만 의존하지 말고 러시아, 동남아 등으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리정호 씨는 “최근 북한 경제가 호전된 것으로 보이고, 주민들의 생활이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김정은 정권의 지도력이나 경제정책 때문이 아니라 시장이 확대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생겨난 장마당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먹고 살기 시작한 덕분이라는 주장이었다.

    리정호 씨가 ‘미국의 소리’ 방송과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는 北노동당 16호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2012년 하반기 인민경제대학 교수 출신이자 39호실에 근무하던 간부를 16호실 실장으로 앉혀 북한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려 했지만, ‘수령 유일 중심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방식을 결합하는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리정호 씨는 2014년 자신과 친했던 고위 간부들이 고사총으로 처형당하거나 가족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체제에 회의를 느껴 귀순했다고 한다.

    그는 귀순 전까지 北노동당 직속 중앙기관에서 30년 동안 근무하면서, 39호실 대흥총국 선박무역회사 사장, 대흥총국 무역관리국 국장, 국방위원회 금강경제개발 총회사 이사장 등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200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