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20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었다. 한반도의 주도권 장악을 놓고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 불꽃 튀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19세기를 마감하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중국’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일본은 아시아 지배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 나갈 ‘징검다리’인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힘을 겨루었다. 20세기의 첫 날인 1900년 1월 1일의 <지지신보(時事新報)>는 중국대륙에서의 세력 부식과 한반도 지배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국을 개방시키고 조선을 개척해야할 사명"

    "일청전쟁의 결과 다음으로 조약개정을 완수하여, 우리나라도 드디어 세계강국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지난 겨울이후 안과 밖에서 일로개전(日露開戰)의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나 결코 이를 일소(一笑)에 붙일 일은 아니다....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국의 형세를 살펴볼 때, 세계문명제국의 방침은 중국의 전토(全土)를 개방하여 각자 스스로의 상공업상 이익을 거둘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은 다행스럽게도 중국의 동쪽에 가깝게 접하고 있어 개방의 이익을 취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위에 있다. 일본은 중국 개방의 솔선자로서 보다 커다란 이익을 취하려는 각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조선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동시에 우리 상공업의 이해와 크고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든 열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 일본인은 정상의 범위 안에서 조선을 유도하고 개척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明治三十三年を迎ふ”) 

    일본은 중국에서 ‘보다 큰 이익’을 취해야 하고, 한국을 ‘유도하고 개척’하여 지배의 토대를 굳혀야 했다.

  • 한반도(COREE)를 지배하기 위한 3국경쟁, 일본 중국 러시아의 각축을 상징하는 만화 '낚시놀이' (TOBAE, 1887.02.15)
    ▲ 한반도(COREE)를 지배하기 위한 3국경쟁, 일본 중국 러시아의 각축을 상징하는 만화 '낚시놀이' (TOBAE, 1887.02.15)

    와신상담 10년...영일동맹부터 맺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는 듯 했다.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결과로 중국은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오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랴오둥(遼東) 반도와 타이완(臺灣), 펑후(澎湖) 열도를 전리품으로 취하고, 2억량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총리대신으로 전쟁을 이끌고 또한 시모노세끼조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표현에 의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일본이 대륙진출의 거점으로 확보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랴오둥반도를 토해 내야만 했다. 이른바 1895년의 삼국간섭이다.

  • 청일전쟁후 중국이 한국을 포기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현장인 슌판로(春帆樓), 협상당사자인 일본의 무츠 무네미츠(陸上宗光, 오른쪽위)와 중국의 리홍장(李鴻章)
    ▲ 청일전쟁후 중국이 한국을 포기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현장인 슌판로(春帆樓), 협상당사자인 일본의 무츠 무네미츠(陸上宗光, 오른쪽위)와 중국의 리홍장(李鴻章)

    민비시해-아관파천..."다 잡은 한국을 잃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한국에서의 우월권도 위협했다. 특히 ‘국가적 범죄(national crime)’라고 할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1895)와 이어서 전개된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俄館播遷, 1896)은 일본이 그동안 가까스로 확보했던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건을 계기로 “절대적인 패권으로 조선을 휘어잡은 지 2년 만에 일본은 평소 두려워 해 온 라이벌인 러시아의 벌려진 품속으로 조선의 국왕을 던져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는 한국 조정에서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파를 등장시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삼국간섭 후 만주에서도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해 나갔다. 일본의 전리품이었던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과 다렌(大連)을 오히려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25년 간 조차하여 이곳을 극동팽창의 전진기지로 개발했다. 숙원의 부동항을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의 세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일본은 불안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은 10년 동안 ‘와신상담’하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군사력을 보강하는 한편, 외교를 통한 국제적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1902년의 영일동맹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이 동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전제하고 체결됐다. 동맹 완성의 주역 하야시 다다스(林董)에 의하면 “일영동맹이 없었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의 러일전쟁...만주 점령후 '무적의 발틱함대' 완파

    선전포고 이틀 전인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의 연합함대가 인천과 뤼순 외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전황은 일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전개됐다. 1904년 5월에는 제1군이 압록강을 넘어 쥬렌청(九連城)을 점령하고, 제2군이 랴오둥반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6월에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9월에 랴오양(遼陽)을, 그 다음해 1월에는 뤼순, 3월에는 펑텐(奉天)을 점령했다. 그리고 5월에는 쓰시마 해협에서 무적의 발틱 함대를 수장시켰다. 승리의 기선을 잡은 것이다.

  • 포츠머스 조약의 주역들--왼쪽부터 위테, 로젠 러시아대표,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고무라, 다카이하라 일본대표.
    ▲ 포츠머스 조약의 주역들--왼쪽부터 위테, 로젠 러시아대표,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고무라, 다카이하라 일본대표.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은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 들었다. 전쟁초기 러시아가 수세에 몰렸던 것은, 타임스(The Times) 기자가 “러시아는 저녁을 위해 싸웠고, 일본은 생명을 걸고 싸운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했듯이,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는 혼잡한 내정문제를 뒤로 미루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하여 병력과 전쟁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하면서 전력을 계속 증강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보급하는 데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만주군총사령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비밀리에 도쿄를 찾아와 전선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불을 붙였으면 끌 시기 또한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책결정자들을 몰아붙였다. 도쿄 정부, 대본영, 전선의 전쟁 지휘관 모두가 조기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제3국의 간섭 막아라" 청일전쟁 교훈 살린 외교전 승리

    외교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전장(戰場)에서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외교에서의 승리가 더욱 돋보인다. 삼국간섭의 쓰라림을 맛본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와의 전쟁과 강화조약에 강대국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는 랴오둥반도의 반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터득한 국제정치의 교훈이었다. 국민사학자로 인정받는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앞 차(시모노세키조약)의 뒤집힘이 뒤차(포츠머스조약)에 훈계”가 됐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탐색했다. 그리고 전쟁 터지면서 강화를 준비했고, 러시아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입체적 외교 노력을 폈다. 1902년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 일본은 제3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어전회의에서 전쟁을 결정한 바로 그날 일본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스에마츠 겐쵸(末松謙澄)를 영국으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를 미국과 영국으로 파견했다. 전쟁 내내 미국과 영국에 체류한 그들의 역할은 두 나라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침략성과 일본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하버드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는 “미국에 부임한 이래 시종 루즈벨트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적절한’ 시기에 중재를 당부했고, 루즈벨트로부터 “일본을 위해 적절한 시기에 최선을 다해 주선의 역할에 나서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거중조종’을 요청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6월 9일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게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을 권고했다. 그리고 8월 10일부터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전쟁의 근본원인이고 오랜 숙원사업인 한반도 지배권 확보를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일층 강화했다.

    3대강국 승인아래 공개적 한국병탄 작업 박차

    일본의 반도 지배권 승인은 미국으로부터 시작됐다. 1905년 여름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William Taft) 육군 장관은 가츠라(桂太郞) 수상과 한반도 지배권에 관한 밀약을 맺었다. 7월 29일 작성된 이 비밀각서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라고 승인했다. 일본의 한국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1905년 8월 12일 런던에서 개정된 제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고,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영국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9월 5일 조인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한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러시아도 한국 지배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했다.

    태프트-가츠라 비밀협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한국 지배권을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다. 이제 일본은 강대국의 승인 아래서 한국병탄을 공개적이고도 강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