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충호' 37호 (2017 신년호) 전재>

    군약신강(君弱臣强)의 한국 정치를 혁파하라 

    ‘붓잡이’들의 패거리 싸움 종식만이 해결책

    김 용삼   / 동원대 특임교수

    급기야 이 나라가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었고,
    국회는 연일 ‘민의(民意)’를 앞세우고 선동정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촛불 시위대는 청와대 100m 앞까지 점거했고, 언론은 대통령의 유죄 여부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하야 혹은 탄핵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가히 질풍노도를 방불케 하는 정치 난동의 와중에 급전직하하는 경제를 걱정하거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의 당선 이후 요동치는 세계정세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 국가의 흥망은 뒷전에 미뤄놓고 연일 지지율 쌍곡선에 일희일비하는 대권주자들의 번질거리는
    면상(面上)을 대하면서 느는 것은 한숨과 소주뿐이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대체 뭐가 문제이고, 무엇이 고장 났기에 한 시절 ‘일사불란한 리더십’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었던 이 나라가 무정부 상태로 전락하여 촛불 앞에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을까.
    박근혜 정부 들어 세월호 침몰사고, 통합진보당 해산, 메르스 방역 실패, 국회법 수정안을 둘러싼 청와대와 국회의 대립,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북한 핵·미사일로 인한 안보 위기, 동남권 신공항을 둘러싼 지역 이기주의, 사드 배치 좌우익 격돌… 등등 크고 작은 일들이 연발하는 사이 우리의 의식구조는 현재와 과거에 매몰되어버렸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준비도 못하고 국내 정치 사안에 함몰되어 허둥대는 사이, 선진국들은 4차
    산업혁명으로 재빨리 달려 나갔다. 지난 2015년 4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4차 산업혁명’(Industrie 4.0)을 미래 독일, 나아가 미래 세계를 만들어 갈 핵심 키워드라고 선언했다. 2016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제4차 산업혁명’을 선언했다.
    과학기술과 디지털의 결합으로 자고 일어날 때마다 창조적(혹은 파괴적) 기술혁신이 일어나 인류의 삶의 양태가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이 혁명적 상황을 전 세계의 석학들은 제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했다. 제4차 산업혁명은 가공할 파괴력으로 기존의 산업과 경제, 기업과 국가, 통상의 관념과 질서와 방법론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그 초토화의 뒤에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 창조경제의 참혹한 종언(終焉)

    ‘무능과 부패의 화신’으로 낙인찍힌 박근혜 정부도 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가 닥쳐온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정권적 아젠다로 ‘창조경제’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참뜻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급조된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4차 산업혁명의 한줄기 물결이라도 타보겠다고, 전국 17개 지역에 18개 센터를 문 열고,
    빅데이터·IT 스마트 공장·수소연료전지·탄소섬유·스마트 농업·태양광 사업 등에 뛰어든 것이 창조경제혁신센터다.
    그런데 한 정권의 명예와 국가의 운명이 걸린 프로젝트치고 권위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사업 단위나 범정부적 열의, 참여기업의 화려함(삼성·포스코·현대자동차·KT·SK·한화·LG 등)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참여나 필요에 의한 자생적 생태계 조성이 아니라,
    억지로 기업의 팔을 비틀 듯 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한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급기야 창조경제·문화융성의 배후에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고,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 실세의 음습한 부패 행위의 후폭풍으로 탄핵·하야 위기에까지 내몰렸다.
    정보화 사회의 ‘무서운 아이들’이었던 한국이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 사이 독일·미국 등 선진국들은 오래 전부터 전력을 다해 연구개발을 진행해 온 인공지능, 뇌과학, 무인자율 주행차, 우주산업, 나노기술, 생명공학, 3D 프린터, 그리고 드론의 융복합으로 인한 기술 진보에서 파생되는 경쟁력 우위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우리나라 국가 지도부는 발군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선제적 대응에 성공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십분 발휘한 결과 전두환 정권 시절 TDX 전자교환기, 4MD램 등의 국산화 개발로 정보화 시대의 물결을 선점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우리 사회를 뒤흔든 슬로건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였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산업화 건설과 정보화 전략의 핵심 리더십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인 출신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군인 리더십’이 뜻하는 바는 문명사적 관점은 무엇인가.
    군인이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치의 연장선’으로 해석했는데, 한 마디로 전쟁은 모든 권력과 제도의 파괴이자 역사의 소멸을 의미하며, 국가의 생존을 담보한 제로 섬 게임이다.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와 행정, 용병과 전투의 기술, 역사와 문화와 심리전, 심지어 미인계 등까지 총동원된다. 누구보다 군 지휘관은 문무겸전의 지식에 해박해야 하며 선진 문물의 습득,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안목과 성찰이 뛰어나야 전쟁에서 승리를 담보할 수 있다.

  • 세계사에서 예외의 나라 한국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은 1170년 무인정권 등장 이래 이어진 700여 년의 문민통치를 단숨에
    붕괴시킨 역사적 대이변이었다. 문민통치란 붓을 든 붓잡이(양반 지식인, 학자, 선비)들이 칼을 쥔 칼잡이들을 찍어 누르고 권력을 행사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인통치로 일관해 온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과 비교하면 지극히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하는 일이었다.
    서양을 비롯하여 이웃나라인 일본만 해도 칼을 든 정복자들이 왕으로 군림하여 통치하는 무인통치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운영방식이었다. 전쟁 지휘부는 세월이 흐르면서 정부로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다.
    한 나라가 자위를 위해서든, 다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동원해야 한다. 이들을 먹이고 입혀 훈련을 시켜야 하고, 최신 무기로 무장을 시켜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과학적 연구와 국민의식교육이라는 두 가지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의 발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한 결과다. 비행기나 자동차도적시에 물자와 병력 수송을 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이 산업분야에 활용되어 오늘과 같은 고도 산업사회의 원동력이 되었다.

  • 또, 상무(尙武)정신의 강화를 위해 꾸준히 국민의식교육을 시켜야 한다. 무인 통치국가의 근본이념은 기사도(騎士道)인데, 그것은 국가를 사랑하고(애국), 국가에 충성하며(충성), 상관의 명령에 복종(복종)하고,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희생), 임무에 책임을 다하고(책임), 용기를 세우는(용기) 오늘날 우리의 군인정신과 동일하다.
    전쟁을 위해서는 엄청난 물자가 소요된다. 물자의 생산과 공급을 위해 과학기술과 운송, 행정, 조세와 경리가 발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이 등장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자유시장 제도가 탄생한다. 부르주아가 등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하나 둘 강화하면서 민주주의가 등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서구 선진국들의 보편적인 역사발전법칙은 무인통치에 그 핵심 본질이 닿아 있다. 반면에 한반도에서는 고려의 무인정권이 사라진 이래 700여 년 문치로 일관해 왔다. 국가 안보는 상국(上國)인 중국에 의지함으로써 상비군이 없어도 평화가 난만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지극히 예외로 울 정도로 한반도에는 전쟁이 없었다.

    군사정권 시대는‘예외의 시대’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춘추의 필법을 구사하여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논하는 것에는 능하나
    실용적인 학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육체를 사용하는 무예나 노동을 천시했다.
    일본의 정치학자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양반들이 풍기는 대인(大人)의 풍모에는 동양인의 정신적인 고장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지만,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근대국가 경영자로서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덕분에 조선시대 말기, 일부 지사들이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망국의 길로 굴러 떨어졌다.

    문민통치 시대에 정치 수행의 도구는 칼이나 창이 아니라 말과 글이었다.
    오늘날 그 종류조차 헤아리기 힘든 언론들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미친 듯이 설쳐대는 근원은
    문치 시스템에서 찾아야 한다.
    국란이 자주 일어났다면 국가 지도부가 나라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조선시대는 외침이 뜸하다보니 권력투쟁의 칼날이 내부로 향하면서 투쟁의 열기가 한층 격렬해졌다. 전쟁이 사라진 나라에서 양반 지배층들은 자신들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폐쇄 고립의 쇄국, 개방과 통상·무역이 아닌 자급자족 시스템에 안주하여 ‘내부의 적’과의 싸움에 몰두하다 나라가 거덜 난 것이 조선의 참혹한 역사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사관학교 출신의 무인 지도자다. 1961년 박정희가 불과 3,600여 명의 군인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찬탈하기 전까지 이 나라의 양반 지도층은 군인 따위가 정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박정희의 재임 18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을 합산하면 30년이다. 이 30년의 군사정권(즉 무인통치) 시기는 ‘붓잡이들의 천국’이었던 한국사에서 지극히 예외중의 예외에 속하는 이단의 시기였다. 따라서 이단의 시대가 종료되면 한국 사회는 당연하게도 국회의원과 정치인으로 대별되는 양반 귀족들이 주인공인 문민통치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일본의 정치학자 다나카 메이다.

  •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국회 독재(elective despotism)는 그 역사적 뿌리가 깊다.
    무인통치 하에서는 병권을 쥔 집권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이합 집산하지만, 붓잡이들이 정권을 잡은 문치주의 하에서는 말과 글로 다투기 때문에 절대 우위를 가진 권력자가 등장하기 어렵다.
    이럴 때 국왕이 절대 권력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국왕은 혈통에 의해 계승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이나 스타일에 따라 왕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양반 관료들은 과거시험을 거쳐 능력 위주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은 가능하면 왕권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권한(臣權)을 강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조선의 경우, 양반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권은 강했고, 왕권은 미약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군약신강 체제에서 패거리(朋黨)가 조성되고, 패거리 사이에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권력의 종말』을 쓴 모이제스 나임은 “21세기에는 권력을 얻기는 더 쉬워지고, 발휘하기는 더 어려워졌으며, 잃기는 매우 쉬워졌다”고 말한다. 즉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양적 증가 혁명이다. 국가의 수, 인구 규모, 생활수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수, 시장의 상품 수 등 모든 면에서 양적으로 증가한다.
    둘째는 이동 혁명이다. 사람, 노동력, 상품 돈, 아이디어, 가치, 정보들이 빠르게 세계 곳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셋째는 의식 혁명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심리적 기대와 사고 기준의 변화로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고 있다.

    권력이 종말을 고하는 세상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운운하면서 너도나도 부나방처럼 대권을 향해 질주하는 정치인들의 뜨거운 권력욕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그들을 부추겨 ‘정치’가 생계수단인 인간들은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전차처럼 돌진하여 권력을 쟁취한들 군약신강(君弱臣强), 한국적 상황으로 말하면 국회가 제왕인 이 나라에서 의원 나리들과 ‘촛불’이 무서워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