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현 칼럼] 빗발치는 독자불만, 생색내며 지면 할애한 보수정론지… 그 속내는?
  • 요즘 세대가 열광하는 '아이언맨'이란 영화 주인공이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어마어마한 부자에 매우 뛰어난 천재다. 잘 생겼고,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다. 가질 거 다 가진 금수저 중에 금수저지만, 왠지 밉진 않다. 부자를 증오하고 잘난놈을 혐오하는 요즘 세상에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아이언맨은 결코 겸손하지 않다. 오히려 거만해 보일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강철슈트를 벗은 내가 누구냐고?
     천재, 억만장자, 플레이보이, 독지가
    (篤志家)  등등…"
    (영화 어벤져스 대사 中)

    (그래! 난 아이언맨이야.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지.  하지만 난 아이언맨이기 이전에 토니스타크라는 한 사람이야. 세계 최대 군수회사의 CEO이며,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야. 그러니 나에게 과거의 영웅들에게 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삶이나, 고뇌와 외로움을 강요하진 말아줘.)





    가식에 찌든 겸손보다는 솔직한 오만이 낫다는 인식의 변화는 신선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 토니스타크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존재한다 해도 영화처럼 환영 받을지는 모르겠다. 스티브 잡스가 토니스타크의 대사를 읊는 모습은 차마 상상하기조차 싫다.



    상상(想像)과 사유(思惟)의 영역인 줄 알았는데, 오늘(28일)자 조선일보에서 '토니스타크 코스프레'를 목격했다.

    「조선일보」는 조간 29면에  <독자의견, 조선일보에 불만 있다> 코너를 마련, 최근 조선일보에 쏟아지는 비판적 목소리를 실었다. '최순실 사태' 이후 사실상 '보수정론지' 노선에서 이탈했고, 정부여당을 비판하고 정권교체 세력을 옹호해왔다는 독자들의 비판을 사뭇 당당하게 담았다.

    - 촛불 세력의 뜻에 맞춰 대통령을 당장 끌어내려야 한다는 논지에 실망해 나 같은 보수 독자들이 돌아서는 것이다. 저속한 잡지에서나 볼 법한 대통령의 사생활을 다루고 외부 세력이 끼어든 촛불 민심만 따르니 대단히 잘못됐다.

    ― 45년 독자다. 촛불 민심을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에는 정부 전복 위장 세력도 많다. 조선일보가 촛불의 단초를 제공했고, 그 촛불이 이제 횃불로 번졌는데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

    ― 편향 보도에 화가 나서 신문을 볼 수가 없다. 촛불 집회는 과장되게 많이 보도해놓고 보수 집회는 축소해서 보도한다. 사실 그대로 공정하게 보도해주기 바란다.

    - 조선일보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보수가 왜 박근혜 대통령을 탓하고 김무성 편을 드는가. 제발 그러지 마라. 보수는 어디로 가라는 건가. TV조선은 더 심하다. 주위에서도 화병이 나서 조선일보와 TV조선을 못 보겠다고 말한다.

    - 비박은 비판하지 않고 친박만 비판한다. 같은 당이니 비박과 친박 모두의 잘못인데 왜 한쪽 잘못만 추궁하는가.

    (28일자 조선일보 29면 '독자 불만' 코너 발췌)



    언뜻 그동안의 논지 이탈을 반성하고, 새롭게 보수의 기치를 들겠다는 의지로 보일 뻔 했다. 하지만 이날 조선일보의 지면편성을 보면, '중립'과는 거리가 먼 편향보도는 여전했다.


  • # 1
    「조선」은 1면 톱기사로 개혁보수신당(가칭)의 창당 기사를 배치하는가 하면, 4면 정치 톱기사로 문재인 페이스북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기사제목 : 문재인 "삼성 개혁, 특별히 지켜보겠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향해 '프로포폴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들과는 다르게 복수하겠다'는 문재인의 과격한 발언도 조선일보는 그대로 보도했다.

    또 이념 정체성 논란이 있는 단체들을 '시민단체'로 포장했고, 민주당이 이들과 공동정권을 구상한다는 내용도 전향적인 입장에서 기사화했다.(기사제목 : 民主, 시민단체와 공동정권 생각하나)

    5면 정치 톱기사에는 또다시 개혁보수신당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기사는 그 아래 배치했다. 기사 내용에도 개혁보수신당에는 '기대감'을, 새누리당에게는 '위기론'을 담았다.



  • # 2

현 정부 최대 숙원과제인 '국정교과서 시행'에 대한 내용은 12면으로 밀렸다. 게다가 「조선」은 해당 기사에서 '교육부의 고육책'을 비판하는 논조를 유지했다.

이 같은 논조는 '여론이 악화할 대로 악화한 상황에서 국정교과서를 전면 적용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박근혜 정부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백년지대계인 국가 교육정책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극히 비논리적인 인식이 조선일보의 현 상황이다.




  • # 3

  • 칼럼과 사설이 배치된 오피니언면은 한술 더 뜬다. 첫번째 사설로 '보수신당, 거창한 이념 앞서 도덕성과 책임 보여달라'는 제목으로 새누리당 탈당세력에게 한껏 기대감을 실었다.

    '반기문의 배신자 딜레마'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논설위원의 글도 지면에 올렸다. 최순실 사태로 국민이 예민해져 있는데, SNS에서 떠도는 반기문에 대한 근거없는 의혹도 무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독자의 거친 불만을 지면을 할애해 담으면서도 여전히 비판받는 부분을 고치지 않는 당당한 「조선」의 진짜 속내는 독자불만 코너에 함께 실은 '편집자 주'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근래 수개월,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로 이어진 소용돌이 정국을 전달한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많은 독자가 우려, 질책, 충고의 전화와 글을 보내왔습니다.
    수십년 장기 독자도 다수이며, 논조에 실망해 절독(絶讀)하겠다는 분도 적잖습니다. 대체로 '나라가 어려울수록 정통 보수 언론으로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텐데 대중적 흥분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이분들의 비판과 고언(苦言)을 가감 없이 담아보았습니다.
    ㅡ편집자 주




    독자들의 울분을 충분히 인식한다면서도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거나 '보수의 기치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반성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무슨 뜻일까?

    '보수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우리는 보수이기 이전에 언론이야. 언론은 가치 중립적 보도를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 보수를 부르짖는 독자들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그건 일부 독자들의 의견일 뿐 반대 입장을 가진 여론도 많아. 무엇보다 독자라는 이유로 언론에게 논조를 강요 하지마'


    마치 영웅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격체로 먼저 봐달라고 당당히 말하는 토니스타크의 논리가 덧대어 보인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토니스타크는 아이언맨으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본업에 충실했다. 목숨을 걸고, 악당들과 싸웠다. 플레이보이로 살았지만, 결국에는 한 사람에게 순정을 바치는 남자로 돌아갔다. 다만 겸손보다 솔직당당한 캐릭터로 대중에게 어필했을 뿐이다.

    과연 「조선」은 언론의 본업에 충실했었나. 대통령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정부 전복 세력의 주장을 여과없이 담았다는 독자들의 불만을 그저 일부 극우의 목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나. 그렇게 보수의 기치를 저버리고, 종북좌파 입맛에 맞춰왔던 조선일보가 '독자불만'이란 코너 하나로 반성하는 척 다시 언론의 길로 회귀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인가.

  • 게다가 현실의 조선일보는 아이언맨이나 토니스타크처럼 가상의 영웅 혹은 천재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분명 「조선」은 이런 착각에 빠져 있다.

    '그래. 우리는 너희들이 보기에 보수가 아닐지 몰라. 그런데 말야. 우리는 보수 정론지를 표방하고 있고, 우리는 1등 신문이야. 우리가 말하는 게 곧 보수의 가치라는 얘기야'

    '박근혜 정부 무너지는 것 봤지? 조심해! 하지만, 언론은 영원하지. 너희들이 우릴 외면해도, 우리는 우리 갈 길 갈 거야. 어짜피 너희들도 결국에는 집토끼잖아. 우리 가는 길 따라올 수 밖에 없을걸?'



    오만 넘치는 조선일보가 '불통 박근혜'나 '안하무인 친박'이란 비판을 입에 담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배신감을 느끼며 훌쩍 빠져 버린 독자들이 조선일보의 어설픈 밀고당기기 전략에 다시 돌아갈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몇십년간 '보수 정론지'로 쌓아온 「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은 이미 상당부분 손실됐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더 안쓰러운 부분은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한 '기계적 중립'을 표방한다 해서, 체제를 뒤집고 혁명을 정의로 내세우는 세력들이 결코 「조선」을 영웅 대접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때서야 어렵게 세운 보수 정론지 타이틀을 잃은 것을 아쉬워 한다고 해도 누구하나 돌아봐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