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박' 정진석 대야 협상 나서는 가운데, 당권 쟁탈전 계속될 듯
  • 박근혜 대통령이 '질서 있는 퇴진'을 선언함에 따라, 범(汎)여권 내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당장 이르면 내달 2일에라도 이뤄질 듯 했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미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회의의 간사 격인 황영철 의원은 29일 오후 의원총회 도중 취재진과 만나 "여야가 '조기 퇴진'의 일정과 관련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는데, 2일은 너무 촉박하다"며 "적어도 (내달) 9일 정도까지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 ▲ 무소속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29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직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탄핵이 예정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무소속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29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직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탄핵이 예정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애타는 탈당파… '낙동강 오리알' 될라

    애가 타게 된 것은 '선도 탈당' 그룹이다. 지난 22일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이날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직후 국회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국회가 당초 예정대로 탄핵에 착수해줄 것을 호소했다.

    남경필 지사는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힌 새누리당 의원들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은 조건없이 사퇴하고, 탄핵은 흔들림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태 의원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 어물쩍 공을 넘겨 시간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본데 어림없는 소리"라며 "국회는 정기국회 안에 바로 탄핵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탈당파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자명하다.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후속 탈당이 잇따르면서 새누리당의 분당(分黨)을 기대했는데, 자칫 논의의 흐름이 '개헌을 통한 임기 단축' 등의 방향으로 전환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면 의결되기 전에 당적을 정리하겠다고 공언한 비박계 의원은 적지 않다. 김재경 의원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인 상황에서 탄핵안에 찬성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며 "만약 탄핵 투표를 해야 한다면, 나는 탈당한 뒤 탄핵안에 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구심점 노릇을 하고 있는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도 탄핵안이 표결에 들어가게 되면 탈당을 하고 본격적인 신당 창당 행보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처럼 탄핵 과정에서 후속 탈당이 나오면서 태동 움직임을 보이게 될 보수신당에 합류해야 하는데, 만일 탄핵이 이뤄지지 않거나 비박계가 마음을 돌려 탄핵에 찬성하지 않게 되면 선도 탈당을 한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지사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과 강석호 전 최고위원, 이종구·정병국 의원 등 비박계 핵심 구성원들이 의원총회에서 동료 의원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과 강석호 전 최고위원, 이종구·정병국 의원 등 비박계 핵심 구성원들이 의원총회에서 동료 의원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신중한 비박계… 당권 '어물쩡' 못 넘어가

    새누리당 비박계는 여론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일단 9일로 미룬 탄핵소추 이전까지 여야 간의 논의 진척을 주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의 이른바 '친박 핵심'은 이날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내용을 사전에 전달받았다.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이날 대국민담화가 방송되는 오후 2시 30분 이전에 이미 몇몇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대통령이 국회에서 정해준 절차에 따라 물러나겠다고 밝힐 것"이라고 귀띔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비박계는 사전에 이러한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직후 비박계 의원들은 이에 대한 평가와 향후 대응 방향을 놓고 각양각색의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동안의 혼란 끝에 비박계 의원들은 "2일 탄핵은 어렵다"와 "9일 탄핵 이전까지 진지한 여야 협상을 진행하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예정대로 9일에 탄핵한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으로는 이 지점에서 회군(回軍)하면 '외통수'에 몰린 '친박 핵심'들에게 숨통을 틔워준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현재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의원들을 결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탄핵에 있어서는 우리 당의 일부 비주류 의원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할 정도로, 이는 정국에 있어서 새누리당 비박계가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탄핵소추를 하지 않기로 입장을 바꿔버리면 '결집된 힘'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탄핵을 앞두고 '러브콜'을 받던 대야(對野) 관계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당내 역학관계에서 다시금 '평범한 소수파'로 전락하게 된다.

    당장 30일 비박계가 추천한 비상대책위원장 후보군 3인이 6인중진협의체에 상정되는 등 당권을 가져오는 게 목전인데, 여기서 친박계를 압박하는 최강의 카드를 스스로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핵심관계자는 "비박계도 개헌에는 관심이 많지만, 야당과 개헌을 매개로 딜에 나서더라도 일단 그것은 당권을 가져온 다음이라는 분명한 선후 관계의 전제가 서 있다"며 "이정현 지도부를 무너뜨리고 '친박 핵심'들을 당무에서 배제하기 전까지 비박계는 결집된 대오를 흐트러뜨리는 모습을 노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 ▲ 친박의 맏형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이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과 조원진·이장우 최고위원 등 동료 친박계 의원들을 앞에 두고 발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친박의 맏형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이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과 조원진·이장우 최고위원 등 동료 친박계 의원들을 앞에 두고 발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초조한 친박계… 판 뒤바꿀 수 있을까

    친박계는 정치권에서 유의미한 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한 승부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지켜보고 있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으로는 정치권에서 더불어민주당 친문호헌패권세력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받는 친박계는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시나리오'에 따른 한 폭의 그림을 그려냈다.

    '친박의 맏형'인 서청원 전 대표가 28일 원유철·정우택·홍문종·유기준·최경환·윤상현 의원 등 '친박 핵심' 멤버들과 오찬 회동을 열어 '질서 있는 퇴진'을 청와대에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청와대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로 이어졌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에는 당 소속 의원 129인 중 46인으로 35.7%를 차지하는 초선 의원들이 '질서 있는 퇴진'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비상시국회의를 구성한 새누리당 비박계는 3선 이상의 다선(多選) 그룹에서 숫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선수(選數)가 중요한 정치 풍토에서 이들의 정무적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이유다.

    하지만 막상 탄핵소추안이 발의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면 6선이나 초선이나 같은 '한 표'다. 46인에 달하는 초선 의원들의 목소리가 비박계에 압박이 되지 않았을 리 없다.

    황영철 의원은 "(탄핵 찬성에서 탄핵 반대로 의견을 바꾼 분들이) 비상시국회의의 입장을 바꿀 정도로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다"라면서도 "개별적으로 아주 소수의 입장 변화는 있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박계 의원들 대부분도 개헌에 찬성한다는 것을 감안해 의원총회에서 '개헌을 통한 대통령 임기 단축'을 곧 '질서 있는 퇴진'으로 총의를 모아내는데 성공하면, 승부수를 통하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찬성이냐 반대냐로 전선(戰線)이 그어지면, 새누리당 친박계가 고립되고 새누리당 비박계·민주당·국민의당 등 나머지 전부가 한편이 되는 구도다. 반면 개헌 찬성이냐 반대냐로 새로운 전선을 긋게 되면, 민주당 친문호헌패권세력이 역으로 고립되고, 새누리당 친박계·비박계·국민의당 등이 한편이 되는 구도로 탈바꿈한다.

    문제는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던 야당은 차치하고서라도, 비박계가 이와 같은 '개헌으로 위 아 더 월드' 구도로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비박계는 개헌에 나서더라도 일단 친박계 지도부를 무너뜨리고 당권을 가져온 다음에, '해체 후 재창당' 과정을 거쳐 '친박 핵심'들을 쳐내고, 그런 다음에야 개헌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 ▲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의원총회 도중 자기자신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의원총회 도중 자기자신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낀박' 정진석… 내게 힘을 하나로 모아줘

    이미 당을 떠난 탈당파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처럼 비박계와 친박계의 셈법과 수순이 다르다보니 당 차원에서 당론을 정해 운신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양측의 최소공배수는 '당장 (2일) 탄핵을 하지는 않고, 일정 기간 (9일까지) 대통령 담화를 놓고 여야 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 대야 협상의 전권은 정진석 원내대표에게 일임됐다. 결국 정진석 원내대표의 행보에 다시금 온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게 됐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친박 핵심'의 2선 후퇴 등 당의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박계와 입장을 같이 하면서도, 탄핵보다는 '개헌을 통한 임기단축'으로 '질서 있는 퇴진'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는 친박계와 의견이 같다. 이른바 '낀박'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당론조차 정하지 못하고 대야 협상에 나서서는 힘이 실리지 않기 때문에, 정진석 원내대표는 30일부터 매일 의원총회를 열어서라도 양 측의 이견을 좁히고 어느 정도 합의점을 도출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알려졌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29일 의원총회가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대통령 담화에 대한 야당의 입장과 국민적 여론을 살피면서 협상에 임하겠다"며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으니 내려오게 하는 게 탄핵인데,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탄핵 논의가 계속 유효하게 진행돼야 하는지 야당과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당 의원들이 다 한목소리일 수는 없다"며 "탄핵이라는 카드를 나도 버린 것은 아니고, 협상할 기간이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아니니, 매일 의총을 소집해서 의견을 모아가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