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⑪ 자유당 창당, 첫 직선제 개헌안 제출

    “나는 ‘쌍놈당’ 만들겠다” 이승만, 노동자-농민의 자유당 결성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나는 쌍놈당을 만들겠네.” 방문객들의 얼굴을 둘러본 이승만이 거침없이 말했다.
    ‘쌍놈 없는 나라’를 세운 그가 쌍놈이라니...주름 진 얼굴엔 그 소년 같은 미소가 흘렀다.
    “자네들은 노농당을 조직했다지? 진정한 노동자 농민 정당을 하고 싶거든
    돈푼이나 있는 떼거리 양반들 말고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로 해야지.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들일세, 예전 지주들 앞에서 아직도 꼼짝 못하는
    착한 쌍놈들을 모으게. 그 국민들이 진정한 나라의 힘이라네.”

    이날 부산 경무대 도지사관사에는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을 결성한
    노동총연맹과 농민총연맹의 간부들이 모였다.
    신당 창당을 구상하는 이승만이 노동자-농민 대표들을 부른 것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아랑곳없이 갈수록 집요한 야당의 당쟁 공세를 보다못한
    이승만 지지세력들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정당조직을 추진해 왔으나,
    해방 직후부터 정당무용론(政黨無用論)을 고집하는 이승만의 눈치를 보던 중인지라
    대통령의 입에서 정당 소리가 나오자, 반가운 듯 알았다는 듯 힘차게 손을 잡았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유명한 연설.(자료사진)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유명한 연설.(자료사진)
    그런데 왜 하필 ‘쌍놈당’인가,
    또 대통령이 줄곧 주창해온 일민주의(一民主義)는 어찌되나.
8.15 독립기념일 기념사에서 ‘새로운 큰 정당’을 만들어 힘 없는 국민들의 뜻을 모아
정당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던 이승만은 열흘 뒤
 “새 정당은 일민주의를 표방해야한다”고 강조하는 담화도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그의 정치이념 일민주의를 포기하기는커녕
새 정당이 바로 일민주의를 실천하는 정당이며, 그 정당 이름이 ‘쌍놈당’이란 말이 된다.
 
‘쌍놈당의 일민주의’--"나의 50년 독립운동의 출발이자 종착역이다"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국가의 국시(國是)를 명시하고저 한다. 
우리 민족은 하나다. 국토도 하나요. 생활에도 하나요, 대우에도 하나요,
정치상 문화상 무엇에고 하나다.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념이 일어날 때에 하나에 위반되는 바 있거든 곧 버려라.
행여 분열을 가지고 일체(一體)에 더하려 말라.
알라! 헤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이것은 이승만이 직접 써서 보급용으로 낸 [일민주의 개술(槪述)] 책자의 시작 글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미군 철수-평화통일’을 외치던 1949년 봄,
이승만은 KBS(당시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일민주의를 몇 차례 강연하고
그 내용을 간추려 국민용 책자를 펴낸 바 있다.
  •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일민주의 개술' 책자표지.(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일민주의 개술' 책자표지.(자료사진)
    “이 ‘일민’이란 두 글자는 나의 50년 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추(歸趨)이다”라고 단언한다.
    이승만은 일민주의가 신생 대한민국의 국시, 평생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
     본디 하나인 단일민족이 38선으로 나뉘어선 안된다, 38선을 없애기 위해 먼저 대한민국
    모두가 ‘일민주의=하나주의로 뭉쳐야 한다’면서
     ‘네가지 평등’이란 대원칙을 전제로 내세워 설명하였다.
    계급평등, 분배평등, 남녀평등, 지역평등, 이중에 가장 강조한 것이 지역평등이다.

    500년 당쟁의 뿌리 ‘동인 서인’ 지역별로 갈라져 권력투쟁 왕권장악등 국가의 자기파괴를
    되풀이 하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러일전쟁을 불러왔고 급기야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에 이르렀으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50년 동안 부르짖었던 이승만이다.

    ★<장면 1>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인기 연설자는 23세 이승만.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민권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인 것이
    가두집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이다. 집회에 모인 인파가 만명이나 된다해서 붙여진 이름,
    당시 19만명 도시 한성(漢城: 서울)인구를 감안하면 그 민중적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3월10일 첫 공동회에서 명연설로 급부상한 23세 이승만은 연말 고종황제가 강제해산 시킬 때까지 왕정개혁과 러시아등 강대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청년지도자가 되었다.
    종로 네거리, 경운궁(현 덕수궁) 정동길, 광화문 육조 앞, 경찰서 재판소 등등
    이슈에 따라 장소를 이동하며 벌인 수많은 시위집회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민중들의 정치참여 운동이다. 어느 덧 정부 대신등 고관들이 참여하여 ‘관민공동회’가 되고
    여기서 채택된 사항은 경운궁 고종황제에게 보냈고, 황제가 불응하면 철야농성을 계속하는 등
    ‘옥외 국회’와 같은 정치기구, 고종에게 직소하는 압력단체, 이름 없는 민중들의 국가기관처럼
    되어 갔다. 
    10월 어느날 종각앞, 만세와 박수소리가 요란한 군중 속에서 박성춘이란 사람이 나섰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하고 무지 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애국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천하다는 그는 ‘백정’이었다. 소 돼지 잡는 도살꾼이 대신들 앞에서 연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그뿐인가, 다방골 술집의 기생도 나와 연설하였다.
  • 독립협회가 개최한 대중집회 '만민공동회' 1898년 종로거리 모습. 태극기가 걸려있다.(자료사진)
    ▲ 독립협회가 개최한 대중집회 '만민공동회' 1898년 종로거리 모습. 태극기가 걸려있다.(자료사진)
    만민공동회는 이렇게 만민평등회로, 500년 계급사회를 타파하여 국민통합을 이루는
    신분혁명으로 변질되고 그 혁명적 시위를 앞장서 선동하는 청년이 이승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