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의 건국논쟁: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대한민국 건국의 기반을 닦은 영웅 중에는 민족주의자 송진우가 있었다. 송진우는 해방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연합군과 협의해 건국을 설계한 인물이다.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제67회 이승만포럼이, 20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해방정국의 건국논쟁: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를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연합군', '임시정부', '국민대회'를 중심축으로 국가를 설계했다고 말했다.

    ◆ 민주국가를 꿈 꾼 송진우

    박 소장에 따르면 송진우는 해방 이후 우익의 대표적 인사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새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를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1910년대 일본 유학을 경험했고,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가졌다. 더불어 송진우는, 미국이 대서양헌장에서 밝힌 민족 자결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민족 자결권이 소련 국제공산당이 국내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며, 카이로회담에서 밝힌, 한반도를 '자유롭고 독립적인'나라로 만든다는 것은, 바로 소련의 간섭이 없는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는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선 우선 중국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를,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정통성 있는 독립운동 단체로 판단한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한국에서 정부로 활동하기 위해선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시정부는 미국에 정부승인을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한국 본토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대다수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 승인 거부의 이유였다. 때문에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인준을 받기 위해서는, 국민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사회주의자 여운형

    이와 달리 송진우와 대척점에 서있던 여운형에 대해 박 소장은, "여운형은 일본이 패전했으므로 일본으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일본과 투쟁했던 공산주의자들이 그 주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을 만들었으며, 건준이 형성되는 데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여운형이 말한 세 자기 요소는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어느 정도의 치안권을 인계해 준 것 ▲해방 직후 소련 진주설이 퍼지면서 한반도가 공산국가가 될 것으로 착각했던 것 ▲해방 직후부터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이 석방돼 좌익에 큰 힘을 더한 것 등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인민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들은 그 전 단계로, 혁명세력이 주체가 돼 먼저 과도정권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선 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한 만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선취돼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립하던 중,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들은 지하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만든 후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서 정식 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연합군의 등장과 임시정부 봉대론이 강하게 등장한 것이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9월 6일 인민대표자 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 소장은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정통성 있는 조선의 독립단체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가려고 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공산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반대한 이유는 임시정부가 자멸할 단체라고 판단했고, 인민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정부가 아닌 점, 그리고 임시정부 외에도 독립운동 단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박명수 소장은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은 당시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대표적 인사인 이승만과 김구였고, 송진우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모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가 건설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박명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대한민국의 기원

    결국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김구, 민족주의자들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키고 민주국가를 세우겠다는 노력으로 세워졌다. 

    9월8일 서울에 도착한 미군은 공식적으로 미군정 외에는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우익의 임시정부와 좌익의 인민공화국을 모두 부정했다. 그러나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민공화국을 만들 수는 없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정부를 세워야 할 상황에 놓이자, 임시정부를 선택했다.

    박 소장은 "미국은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을 서둘렀고, 이들을 통해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그러면서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나라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못 박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따라 역사를 기술한다면, 우리는 해방 직후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