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 '관리하는' 조선일보, '대권 캐스팅 보트' 쥘 수 있을까

  • 오래 전 조선일보 구독은 물론,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와 인터뷰를 모조리 거부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9월까지 1,600여명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 해괴망측한 운동에 동참했다. 개중에는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도 있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활동해오던 소설가 이순원씨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박원순 서울시장도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안티조선' 지식인선언에 참여했었다는 점이다.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박원순 시장은 오늘날 조선일보의 인터뷰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하는 광역단체장 중의 한 명이 됐다. 물론 그때와 지금을 같은 선상에 올려 놓고 비교하긴 힘들지만,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평생 조선일보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이가 이제는 자신의 시정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일보 지면에 얼굴을 내비치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해 버렸지만 십수년 전만 해도 좌파 운동권 인사들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기고문을 쓰면 '변절자' 취급을 당하곤 했다.

    피아(彼我) 구분이 분명했던 시절, 정권 타도를 부르짖는 이들에게 조선일보는 수구언론의 대명사이자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조선일보로부터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칭호를 얻었던 박원순 변호사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조선일보 지면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명사가 됐다. 단순히 '공직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받아들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일보와 철저히 거리를 두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박원순 시장도 얼마든지 조선일보를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일보를 여타 다른 신문들처럼 '편하게' 대했다. 취임 이래 인터뷰를 고사한 적도 없고 광고 배정에 불이익을 준 사실도 없다.

    혹자는 박원순 시장을 가장 호되게 다그친 언론이 바로 조선일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해 민언련이 조사한 주요 방송·신문사들의 '박원순 시장 비방 보도 현황'을 보면 조선일보의 보도 횟수는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대동소이한 수준을 보였다. 계열사인 TV조선이 상대적으로 많은 횟수의 '비판 방송'을 내보냈지만 본지 만큼은 결코 '수위'를 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보도 내용도 청년수당이나 서울역 고가 공원화 사업 등 서울시정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으로 인신 공격성 '비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정적으로 박원순 시장 아들(박주신)의 병역비리의혹이 최대 사회 이슈로 떠올랐을 때 조선일보는 침묵을 지켰다. 유력 대권 주자의 아들이 관련됐다는 점에서 채동욱 사건에 비견될 정도로 비중을 가진 사건이었지만 조선일보는 온라인뉴스팀에서만 간략히 다루는 등 소위 '변죽'만 울리는 보도로 우파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다.



  • 조선과 박원순의 오월동주(吳越同舟)


    최근 박원순 시장의 인터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곳은 계열사 조선비즈다. 조선비즈는 지난달 박 시장이 추진 중인 '공유도시 서울'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해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폭염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16일 '굳이' 박원순 시장을 찾아간 조선비즈 취재진은 1시간 가량 인터뷰를 나누며 박 시장으로부터 대한민국의 경제 재도약 구상과 서울시 정책 방향 등을 들었다.

    해당 인터뷰에서 박원순 시장은 그동안 가슴 속에만 담아 왔던 국가 운영 철학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사드 배치로 중국 관영여행사가 태도를 바꾸면 서울 관광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까지 했다. 한때 (좌파 진영으로부터)수구언론의 대명사 취급을 받았던 조선일보를 통해 '좌파 시민운동의 대부'가 마음껏 정부를 비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된 것.

    이외에도 조선비즈는 박원순 시장이 북미 순방 중에 거론한 지하 개발 사업과 청년활동 지원사업(청년수당) 계획 등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식으로 박 시장의 정책과 비전을 지속 홍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청년수당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정당한 자료 요청을 (서울시 관계자의 입을 빌어) 대표적인 '국회 갑질 사례'로 손꼽는가 하면, 박 시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영화 '귀향'에 대한 소감문을 소개, 박 시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는 '연성 기사'도 수차례 내보냈다.

    이렇듯 조선일보가 박원순 시장의 '피알'에 조선비즈 등의 계열사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두고 중앙일보가 JTBC를 통해 좌파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행태와 흡사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 언론사 고위 관계자는 "소위 청년수당 정책을 겨냥, '박원순 서울시장이 업적 쌓기를 위해 실효성에 의문이 있거나 정부가 반대하는 정책을 밀어붙이려 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조선일보가 다른 계열사 지면에선 청년수당을 적극 홍보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같은 논조 파괴 현상은 계열사를 이용해 독자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중앙일보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한쪽에선 박원순 시장의 행보를 '청년 표를 의식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보수층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내고, 다른 한쪽에선 박 시장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실어 반대 진영 독자들에게 선심을 베푸는 식으로 '외연 확대'를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 중앙의 '좌클릭' 시도, 조선이 벤치마킹?


    이같은 '좌클릭' 움직임은 중앙일보의 성공 사례와 맞물려 더욱 가속화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종합편성채널 JTBC를 앞세워 삼성을 비판하고 정부 여당과 각을 세우는 보도로 강력한 매니아층을 확보한 중앙일보그룹(중앙미디어네트워크)은 국내 언론 사상 초유로 중도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매체가 됐다.

    그동안 국내 언론은 미국 언론과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독자를 양분하는 스탠스를 취해왔으나 중앙일보는 이같은 관행을 깨고 '네 말도 옳다'는 황희 정승식 보도로 기존 언론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놀라운 점은 중앙일보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언론사가 된 이후로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중앙과 JTBC를 독자 언론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대중은 손석희 앵커를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으로 추켜세우며 결과적으로 중앙일보의 위상을 드높여주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안티조선 운동에 가담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JTBC의 열혈 시청자가 됐음은 물론이다.

    다양한 경제지와 종편을 거느린 조선일보그룹도 중앙의 사례에 고무된 듯, 최근엔 각사마다 논조를 달리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이를 테면 TV조선에서 세게 후려치고 경제지에서 달래주는 식이다. 본지는 사설로서 기존 논조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강도' 면에선 이전만 못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승만과 싸우려면 '기지론자'와 싸워야 한다"는 최병천 전 더불어민주당 보좌관의 글을 '화제의 페북' 코너에 올리고,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치욕적인 후퇴"라고 말했던 안경환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를 칼럼니스트로 영입한 것도 조선일보의 달라진 면모다.

    중앙일보가 반대 진영의 독자들을 끌어모아 덩치를 키우는데 혈안이 돼 있다면, 조선일보는 반대 진영의 정치세력을 끌어모아 차기 정국을 주도하려한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은 최근 '문재인 지지 안경환, 조선 칼럼서 박근혜 맹공'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조선일보의 고정관념은 '우리가 캐스팅 보트를 흔들 수 있는 정국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된다"며 문창극 사태 이래 사사건건 박대통령을 흠집내고 김무성을 '미래권력'으로 띄우는 행보를 보인 것을 그 예로 들었다.

    박원순 시장을 추어 올리고, 좌파 성향의 필진을 끌어모으고, 우파 진영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도 '우리가 캐스팅 보트를 쥐고 흔들겠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일까?

    얼마 전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고 물었던 질문을 이제는 조선일보에게 되물어야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