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 대한 객관적 평가 필요"
  • 자유경제원은 24일 원내 리버티 홀에서 '청년, 이승만과 김구를 말하다'를 주제로 청년 토론회를 개최했다.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자유경제원은 24일 원내 리버티 홀에서 '청년, 이승만과 김구를 말하다'를 주제로 청년 토론회를 개최했다.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자유경제원은 24일 원내 리버티 홀에서 '청년, 이승만과 김구를 말하다'를 주제로 청년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강영모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학생 ▲박진형 강원대 철학과 학생 ▲여 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오종택 세종대 기계공학과 학생이 참여했다.

    자유경제원 관계자는 "전국 초·중·고교 도서관에 비치된 도서 가운데 건국대통령 이승만 관련 서적은 96권인 반면 임시 정부 주석이었던 김 구 관련 서적은 4,560여 권이나 됐다"며 "이는 교육 현장의 이념적 편중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통계로, 실제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 구의 공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고 토론회 취지를 설명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비교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의 길을 제시했다.

    발제를 맡은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되짚으며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저평가'에 대해 설명했다.

  •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조우현 연구원은 "일제시대에 '독립'을 이야기한 사람들은 훌륭하다. 이승만과 김구가 그랬다. 보통 김구만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김구는 중국에서 각자 최선을 다했다"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마음은 같았지만 다른 방향과 방법으로 독립을 염원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가 주축이 되어 운영된 단체다. 중국, 만주, 연해주, 미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세력을 포괄한 큰 단체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노선이 저마다 달라 심각하게 분열된다. 김구는 와해될 뻔 했던 임시정부를 끝까지 놓지 않고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김 구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는 세력과도 격렬히 투쟁했다. 김 구가 취한 전략은 '무력투쟁'이었다. 이 노선을 실행하면서 김 구와 임시정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임시정부를 공식적인 '망명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본국 국민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를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말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같은 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조선이 사라진 상태에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외교라고 생각했다"면서 "강한 나라에 한일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그들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는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제정치에 정통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김 구는 세계를 보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다. 이 차이가 결국 한반도 상황을 바로 보는 안목의 차이로 나타났다"면서 "김 구의 무장투쟁과 이승만의 외교적 독립이 해방과 건국에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결국엔 실패로 끝났다. 분명한 것은 외교 독립에 앞장섰던 이승만의 식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이승만은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힘을 믿었고 이 믿음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다"면서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았고 타협도 없었다. 김 구뿐 아니라 수많은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에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우현 연구원은 "역사 안에 담긴 수많은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치의 의심없이 훌륭한 인물이라 생각했던 김 구가 대한민국의 탄생에 득이 되기보단 일관성 없는 행보를 펼쳐 건국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며 "김 구의 공을 기리는 동시에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데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나쁜 사람인 줄만 알았던 이승만이 선각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 토론을 맡은 강영모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학생은 "대한민국의 영웅을 꼽는다면 나라를 세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승만 박사가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강영모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강영모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강영모 학생은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그를 독재자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2011년 8월 자유 총연맹 광장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 동상 제막식 당시 반대 세력이 근처에서 “이승만은 독재자”라고 시위를 하며 행사를 방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영모 학생은 "독립운동에 있어 이승만과 김 구는 각자의 방식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며 세계정세를 살폈다. 국제정세가 한반도의 독립과 맞아떨어지도록 하는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라며 "이승만이 '현실성'을 강조했다면 김구는 '민족의 혼'을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김 구는 통일정부를 외쳤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강영모 학생은 "민족분열을 막고자 했던 김 구 선생의 뜻은 그 내용만 보면 여러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 때문에 그의 서거 이후 지금까지도 김 구 선생은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강영모 학생은 "반면 이승만 박사는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과도정부를 세워 북한에서 소련군을 물러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됐지만 분단의 원흉이라는, 큰 오해를 받았다. 그의 일생 전체가 독재와 친일로 깎아 내려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강영모 학생은 "이승만은 현실적인 길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농지개혁, 초등교육 의무화,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등 공이 많았지만 분명 과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존중해 깨끗이 하야 했다"고 설명했다.

    강영모 학생은 "해방 후 한반도는 공산주의의 수렁에 빠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현실을 직시해 최대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김 구는 이상을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없었다. 김 구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존경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으로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무나도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강영모 학생은 "국민에게는 이승만의 기념관을 지어 그의 일생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인물이 가득한 광화문에도 그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면서 "오늘날 이 나라는 조선도 아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아닌,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토론은 박진형 강원대 철학과 학생이 맡았다.

    박진형 학생은 "백범 김 구와 우남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쪽은 민족의 지도자, 다른 한쪽은 미국의 앞잡이 또는 정치적 독재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면서 "한 인물의 과오만을 풍선처럼 크게 부풀려 공적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 박진형 강원대학교 철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박진형 강원대학교 철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박진형 학생은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김 구를 떠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자적인 외교력을 발휘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면서 "그가 독립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박진형 학생은 "이승만은 1914년 하와이에서 잡지 '한국 태평양'을 창간해 한국이 독립하려면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면서 "이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 국제연맹 등과 외교 교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모든 노력이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은 분명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고 설명했다.

    박진형 학생은 "이후 1948년 2월 국제연합(UN)이 남한에서만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결의를 했다. 그러나 김 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과 협상을 벌였다. 결과는 결렬됐다. 그럼에도 그는 통일정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는 등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김 구는 그토록 바랬던 통일 정부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이렇듯 대한민국 건국에서 김구의 역할과 업적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고 평가했다.

    박진형 학생은 "같은 시기 이승만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의 영향으로 양분될 거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1946년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제헌국회 의장으로 헌법을 제정하는 일을 추진했다.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대한민국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박진형 학생은 "이승만은 대한민국 수립 후 1948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받았다. 6.25전쟁 발발 후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 개입을 실현시킨 것도 그의 중요한 외교 성과라고 볼 수 있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54년에 성사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 군사,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 번째 토론을 맡은 여 명 자유경제원 연구원은 '독립운동 재인식의 필요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 여 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여 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여 명 연구원은 "대개 많은 사람들은 해방, 독립, 건국이 같은 선상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개념은 다르다. 해방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수동적 개념"이라며 "독립은 한 민족이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는 개념이다. 건국은 영토·주권·국민의 세 조건을 갖추고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정치 체제를 가진 한 국가의 탄생을 뜻한다. 해방 이후 100년이 안된 지금도 격동의 현대사와 이념 논쟁을 겪으면서 명확했던 사실들마저 혼탁해져있다"고 주장했다.

    여 명 연구원은 "김 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두 사람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자 김 구는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장투쟁 방식은 국제사회에 호소력이 적었다. 일본군을 몰아낼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다. 한인들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 이후로는 소멸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설명했다.

    여 명 연구원은 "독립에 있어 이승만이 내린 답은 실력양성과 외교투쟁이었다. 그래서 한인 계몽에 힘썼고 스스로도 미국에 건너가 공부에 매진했다. 민족자결주의(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의 지도 교수였다. 이승만은 일본이 '민주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민족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여 명 연구원은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모두 독립국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민족주의자 김 구 선생과 공산주의의 해악을 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이견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지향점은 같았다"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여 명 연구원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인 것은 명확하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기린다고 해서 김 구 선생의 독립운동 가치가 평가절하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후세인 우리가 역사를 바로보고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오종택 세종대 기계공학과 학생은 "김 구와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두 인물의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은 애국심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다"는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 오종택 세종대 기계공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오종택 세종대 기계공학과 학생 ⓒ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오종택 학생은 "김 구의 '백범일지'는 온 겨레에 널리 알려진 책인 반면, 이승만의 제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이나 독립정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백범일지는 사건 중심을 다룬 회고록으로 읽기 쉬워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독자에게 쉽게 알려질 수 있었다. 반면 이승만의 책은 굉장한 통찰력을 담았기에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알려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오종택 학생은 "이 같은 차이에서 김 구와 이승만을 향한 국민의 평가가 공정치 못할 수도 있다"면서 "백범일지는 치하포 사건에서와 같이 자기 미화의 부분이 많은 자서전이다. 자서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회의 독서 성향이 김 구를 '성역'으로 만들었고 오늘날 김 구와 이승만의 평가를 공정치 못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오종택 학생은 "역사적 인물은 종교의 신이 아니기에 성역이 될 수 없다. 백범일지는 성경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책일 뿐"이라며 "따라서 이 책에는 김 구의 주관이 섞여있음을 독자가 인식해야한다. 백범일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백범일지와 김 구에 대한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종택 학생은 "그 당시 독립을 이야기하고 건국을 이뤄낸 이들은 훌륭하다. 김 구와 이승만은 파트너이자 경쟁자였다"면서 "그들은 3.1운동을 계승해 세워진 임시정부를 이끌어 공산주의와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켰다"고 설명했다.

    오종택 학생은 "그들의 후세로 살고 있는 우리는 김 구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던 경쟁자이자 파트너였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