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문에 게재한 물가통계...구한말의 경제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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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漢城旬報)·한성주보(漢城周報)의 시직탐보(市直探報)*- 우리나라 최초의 물가통계 -신 한 풍 /고려대학교 명예교수(통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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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그 뒤 1886년 1월 25일 발간된 한성주보(漢城周報)에 시직탐보(市直探報)라는 표제아래
최초의 공식 ‘물가 통계’표가 게재되었다.한성순보는 10일마다 1883년 10월 31일에서 1884년 10월 9일까지 36호가 발간되었고,
한성주보는 7일 간격으로 1886년 1월 25일부터 1888년 1월 23일까지 99호가 발간되었으나,
결측자료(missing data)로 인해 39호 만이 남아있다.
본 연구에서는 순보와 주보의 시직탐보에 게재된 36개 품목의 물가통계를 시계열(時系列)로서 표시하였다. <아래 부록 도표 참조>II. 육의전(六矣廛)․육주비전(六注比廛)시직탐보에 게재된 물가통계가 육의전(六矣廛) 또는 육주비전(六注比廛)을 통하여 공표되었으므로 시전(市廛)의 역할을 간략하게 설명하려한다.
조선은 건국 초 수도를 개성으로부터 한성으로 이전하면서 태종 10년(1410)부터 종로 일대에 대규모 행랑을 짓고 시전(관립시장점포)을 개설하였다. 시전에게 그 대가로 국가에 일정한 국역을 부담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시전은 ‘一物一市’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미전(米廛)의 경우는 시민들이 매일 소비하는 생필품이기 때문에 一物一市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어 상미전(上米廛)과 하미전(下米廛) 그리고 잡곡전의 세 미전이 각각 영업구역을 달리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다.(본 연구에서 참고한 자료는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에서 출간한 한성순보․한성주보의번역판과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한성순보 영인본임을 밝혀둔다.)
- ▲ 조선시대 육주비전의 하나, 종로 미곡전.(자료사진) 멀리 북악산 봉우리가 보인다.
상미전의 위치는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와 종로 네거리의 중간쯤에 있었고
하미전은 종로3가 종묘 입구 부근에 위치하였다.
잡곡전은 지금의 종로2가 철물교 바로 왼쪽에 있었다.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진 뒤, 입전(立廛)이 가장 먼저 섰으므로 서울의 백각전(百各廛)·육주비전(六注比廛)의 으뜸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중국산 비단을 거래하였고 선전(線廛·縇廛)이라고도 불렀다.
두 번째는 지금의 종로1가 일대에 자리하면서 국산 비단만을 판매하는 면주전(綿紬廛)이 있었다. 세 번째는 질이 좋은 전라도 강진·해남과 경기도 고양의 상품(上品) 무명옷감 그리고 질이 낮은 하품(下品) 무명옷감 따위를 거래하는 면포전(綿布廛)과,
네 번째로 지금의 종로3가 일대에 자리하면서 모시를 거래하는 저포전(苧布廛)도 있었다.
다섯 번째로 지금의 남대문1가 일대에 자리하면서 크고 두껍고 질긴 후지·장지(厚紙·壯紙), 강원도 평강의 상백지(上白紙), 편지용으로 쓰이는 화초지 등을 취급하는 지전(紙廛)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종로에 자리한 내어물전(內魚物廛)과 서소문 바깥에 자리한 외어물전(外魚物廛)을 합한 내·외물전 등 도성 안의 여섯 개 집단 시전을 통칭하여 흔히 육의전 또는 육주비전이라 불렀다. 감독 기관으로는 경시감(京市監)을 설치해 시내 상업교역에 관한 물가조절, 상세(商稅)징수 등을 주관하게 하였다.- ▲ 조선 육주비전의 하나, 남대문 시전.(자료사진)
III. 조선미의 일본 수출과 일본미의 조선 수입<표1>은 개항 이후 조선미의 대일본 수출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개항 직후 조선미의 대일 수출은 그 양이 많지 않았으나 조금씩 증가하여 1877년에는 474석, 1879년에는 70,635석, 1880년에는 93,288석으로 급증하다가 그 이후 하락추세를 보였다.
조선미의 수출은 1884년 43석으로 최저점을 보인 후 다시 상승추세를 보였다. -
쌀 수출의 증감을 자세히 보면 1882년부터 1888년까지는 임오군란, 동학란, 청일전쟁, 갑신정변 등 연이은 정치사회의 격변으로 수출은 별로 늘지 않거나 감소 추세를 보였다. 개항 이후 조선은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작황이 흉작일 경우는 일본으로부터 쌀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1885~1889년은 조선의 작황이 흉년이어서 쌀값이 오르자 일본의 쌀이 조선에 수입되었다.<표2>는 조선의 일본미 수입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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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쌀 수출 증가는 쌀값의 상승을 초래하였고 조선 내에서의 쌀 공급 부족을 가져와 가난한 백성들의 식생활 수준을 열악하게 만들었다.1886년 흉작으로 조선의 쌀값이 폭등하자 일본 상인들이 일본미 246,202담(擔)을 조선으로 수출하였다.(표2 참조)정부는 쌀값 폭등의 원인을 각 도의 관찰사와 군수들이 흉년을 핑계 삼아 마음대로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쌀이 타지방으로 팔려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쌀값이 떨어지면 국고에 상납할 세금으로 쌀을 구입하여 비싼 값으로 외국상선에 팔기 때문이라고 「협성회보」(배재학당 학생회신문)는 광무2년 4월 2일자에 보도하였다.
「한성순보」는 1883년 농형장계(農形狀啓)에서 농산물 작황을 십여 차례에 걸쳐 보도하였다.- ▲ 1905년 촬영한 고종의 사진.
「한성주보」는 1886년 2월 22일[제4호]는 고종의 교시를 게재하였는데,"수원유수등보에 의하면 근래에는 어찌하여 재난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겹쳐 10家에 9家는 비었는가 하면 모두들 죽음의 직전에 우환을 되씹고 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주야로 근심에 젖어 애태우면서 자신에게 반성할 뿐이다. 이에 정월초하루를 맞아 中外에 諭旨를 반포하노니, 田功에 해로운 모든 일을 일체 제거하고 農政을 補益하는 일을 거행하도록 하라”며 고종 왕은 당시 경제비상조치로 긴급명령을 내리고 있다.
「한성주보」1886년 8월 16일[제24호] 6월 10일(음력)자를 보면, 흉년 끝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한성주보의 발간이 1개월 늦어졌다. 동년 10월 11일[제32호] 평안도관찰사 보고에 전염병으로 자산․정주 등 22개 읍의 사망자수가 남:5,530명, 여:4,992명으로 집계되었다.IV. 개항 이후의 재정위기조선정부의 재정은 임오군란(1882)을 전후하여 위기상황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정부재정의 기본적 운용수단인 쌀이 먼저 몇 년째 경창(京倉)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고종 18년(1881)에는 중국에서 오는 칙사를 대접할 쌀이 호조(戶曹)에 없어 정부 각 아문에서 은자를 차입하여 급한 사정을 모면하였다. 정부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료들의 녹봉을 삭감하여 지급하는 상태였다.- ▲ 1894년 동학란과 청일전쟁(자료사진)
수요측면에서의 문제점은 재정지출의 급증이다. 개항 이후 개화정책의 추진으로 개항장의 시설비, 각국 사절의 접대비와 전권대사의 파견, 해외시찰단의 파견, 신식 관서의 창설과 유지, 신설 군영의 설치와 신식 군병의 양성, 외국인 고용비, 각종 배상금의 지불 등으로 종전에는 없던 경비의 지출이 크게 증가하였다.정부는 재정수요가 증가하나 이를 충족시킬 미곡이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 부족하자 화폐를 주조해서 위기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공급측면에서의 문제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불수단인 쌀이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에 정상적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장기간에 걸친 흉작으로 쌀의 생산량이 감소하였으며 지방의 세곡을 납입받아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로 수송하는 조운(漕運)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은지가 오래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라도 성당창(聖堂倉)은 고종 22년(1885)초 현재 4년 동안 거두지 못한 세곡이 7,080석이나 되었다. 법성창도 고종 17년(1880) 이후 2년 동안 납부하지 못한 세곡이 근 1만석에 달하였다.
상황이 이처럼 어려운데 고종18년(1881)에 경상도 좌창인 진주 가산창의 조선 9척이 충청도 홍성 연해에서 한꺼번에 침몰하여 세곡 수천 석을 상실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조선 정부의 통화는 두 종류가 있는데, 1문전(文銭)과 5문전文銭이 그것이다.
1문전은 함경도·강원도·경상도·평안도·전라도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고,
5문전은 이른바 당오전(當五錢)으로 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 3도에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당오전은 1883년 2월 18일 명성황후의 척족인 민태호(閔台鎬: 민영환의 양부)의 관리 아래 주조된 것으로 종전의 1문전보다 상당히 조악한 품질이었다.
그러나 이 당오전은 명목가치가 실질가치의 2~3배 밖에 안되었으므로 정확한 화폐가치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였다. 또한 당오전은 조선 민간이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마음대로 위조함에 따라 물가가 급등하는 부정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
발행당시 일본화폐에 대한 35활, 즉 당오전 1매의 가치가 1전7리5모였지만,
1888년 1매의 가치가 2리5모를 조금 웃돌고 있다. -
- ▲ 1883년2월 유통개시, 1894년 7월 청일전쟁으로 사라진 당오전.
V. 맺음말우리나라 최초의 36개 품목의 물가통계를 시계열 자료로 작성한 것을 근거로<부록1도표 참조>
년도별 물가추세를 정리하였다.프랑스의 물가사(物價史)연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라브루즈는 자료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근거로 ① 자료의 수가 많을 것, ② 연관 자료는 상호간 통제 가능할 것, ③ 기록이 규칙적일 것, ④ 감사를 거친 기록일 것이란 네 가지 근거를 들었다. 그는 이러한 조건을 갖춘 자료로서 파리의 공설시장의 곡물가격을 채택하였다. <Rabrouse, C.E. "Esquisse du mouvement des prix er des revenus en France au 18siecle (A sketch of the movement of prices and revenues in France in the 18th century)" ; 竹罔敬溫 「近代 フランンス 物價事序說」創文社, 1980>우리나라 최초의 물가자료를 가지고 통계분석을 시도하려 할 경우 라브루즈가 제시한 4가지 근거를 충족할 수 없다. 농산물 가격의 경우 불규칙변동(Irregular variation)이 많고 순환변동(Cyclical variation)과 계절변동(Seasonal variation)이 중복되어 나타나 이들 요인을 분리하여 산출하기 어렵고, 특히 결측치(결손자료)가 많아 통계분석이 불가능 하였다.역사적 자료(Historical data)는 그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앞서 연구자들에게 자료(Data)를 제공한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虛構)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연구에서 제시한 결론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며 예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 서양인이 찍은 종로의 점포.(자료사진)
부록: 한성순보 시직탐보(1883. 10. 31 ~ 1884. 10. 9)
부록: 한성주보 시직탐보 (1886.1.25~1888.1.23)부록; 칼러 도표
부록 1 도표1. 미곡·小豆·大豆 가격 통계 시계열 자료에 의한 변동을 보면, 1883~1884년 가격은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년 가격은 폭등하였고, 1887년에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2. 북어·미역·면화 가격의 추세를 보면 1883~1884년 가격은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년과 1887년 가격이 폭등하였다.3. 장지·상백지·중백지·하백지 가격의 추세를 보면 중백지와 하백지의 가격은 1883년, 1884년, 1886년 그리고 1887년 안정세를 보인 반면 상백지는 1886년과,1887년 폭등하였다. 유철전 가격 가운데 구리(銅) 가격은 1883년과 1884년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년과 1887년 상승하였고, 유철(놋쇠)·숙철 가격은 1886년 폭등한 가격이 1887년까지 계속되었다.4. 산전가격(땔나무·숯·소금)의 추세를 보면 숯(炭)의 가격은 안정세를 보이고, 땔나무(柴)는 1886년 폭등하였고, 1887년 폭등세가 진정되었다. 소금가격은 1883년과 1884년까지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년 폭등하였고 중반기 안정세를 보이다 다시 가격이 상승하였다. 과자전 가격(대추·밤)의 추세를 보면 1883 ~1884년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년 폭등하였고 1887년에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5. 중국비단(모초·갑사)과 면포(상·중·하·양면) 가격은 1883~1884년 안정세를 보이다가 1886~1887년 급등세를 유지하고 있다.6. 면주가격(상·중·하)과 모시가격(상·중·하)은 1883~1884년 안정세를 1886년 폭등한 가격이 1887년까지 유지되었다.7. 삼베(상·중·하) 가격은 1883년과 1884년 급등세를 보였는데, 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끝>